더위와 허기, 피로가 중첩되자 지윤은 어지러웠다.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때문에 화가 났다.
"저리 가요."
하지만 화를 내지 못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카메라 앞에선 꾹 참아야 하는 것이 연예인의 운명, 포식에게 한바탕 욕을 퍼부어 주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다. 포식은 프로의 진행자였다.
그가 지윤하고 방송 못하겠다고 하면 방송국에선 지윤을 쫓아낼 수 있었다. 포식이 잘릴 확률보다 지윤이 잘릴 확률이 더 높았다.
그래서 까칠하게 구는 것이 전부였다.
'또 저녁거리를 찾아야 한다니.'
점심은 도마뱀, 저녁도 도마뱀. 어디서 그렇게 많은 도마뱀이 나오는지 궁금할 정도로 많은 도마뱀이 잡혔다.
'혹시 촬영을 위해 방생한 건 아닐까?'
맞았다. 촬영을 위해 대량으로 풀어놓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를 지윤이 알 순 없었다.
'아, 밥 먹고 싶다.'
계속 잡히는 도마뱀을 보며 엉뚱한 생각을 하던 지윤은 밥 생각이 간절해졌다.
반찬도 필요 없었다. 그냥 하얀 쌀밥이 먹고 싶어졌다.
밥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루 내가 들게."
"안 돼요! 이리 줘요!"
심후에게 다가가는 포식을 보며 지윤은 기겁했다.
포식이 또 다시 자루를 열고 도마뱀들을 방생할 것 같아서였다. 실수라고는 하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분명 있었다.
이유는 바로 현재 상황이 진정한 100% 서바이벌이 아닌 예능 촬영 현장이기 때문이었다. 시청률을 위해 출연자들에게 맛 나쁜 음식을 퍼 먹인 포식이었다.
몸 개그로 방송 분량 늘리려는 수작을 충분히 부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자루를 손에 쥐자 힘이 들어갔다.
'이제 보물만 찾으면 돼.'
도마뱀 잡기는 심후가 최고였다. 아무도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이제 보물만 찾으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얻을 수 있었다. 손에 너무 힘을 줘서 그런지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이제 지윤은 눈에 빛을 내며 보물을 찾기 위해 집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보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직 아쉬워 하긴 일러. 다른 조에서 보물을 찾았다면 그건 내꺼야!'
묵직하게 느껴지는 자루를 들고 지윤은 베이스캠프로 돌아갔다. 하지만 캠프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봐! 우리가 이만큼 찾았어!"
소고기와 당면의 조가 연 자루에선 도마뱀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실 이것은 비리에 가까웠다.
이들은 도마뱀을 잡은 것이 아니었다. 통에 들어있던 것을 그대로 담아온 것뿐이었다.
도마뱀을 잡다 통을 발견한 것이었다. 통은 촬영팀이 포식의 언질을 받은 피디가 옮겨놓으라고 지시했던 것이었다.
피디는 포식이 치사한 수를 써서 1등을 하려는 줄 알았지만 포식은 소고기와 당면에게 이를 양보했던 것이었다.
사정을 알 리 없는 지윤은 허탈해졌다.
"말도 안 돼."
손에서 힘이 풀렸다. 자루는 땅에 떨어졌고 도마뱀들은 도망갔다.
지윤은 또 다시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구경하게 되었다.'다 싫다.
'다 함께 하는 고생이라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군 행복하게 먹고 누군 쫄쫄 굶어야 하는 현실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이번에 사람들이 얻게 된 보물은 바로 라면과 떡볶이였다.
이를 가지고 라볶이를 만드네 뭐네 시끄러웠다. 몇몇 힘이 남아도는 출연자들은 그거라도 얻어먹어볼까 기웃거리며 아양을 부렸다.
허나 지윤은 다 싫어졌다.
힘이 없어서 그냥 쉬고만 싶어졌다.
이대로 그냥 다이어트 한다는 생각으로 꾹 참았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다. 움직이고 싶지도 않았고 방송 분량 따위도 걱정 되지 않았다.
그렇게 천막에 누워 홀로 눈을 감고 있을 때 다가온 남자가 있었다.
"일어나 봐요."
심후였다.
평소라면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일어났겠지만 이젠 그런 마음도 귀찮아졌다.
"왜요?"
"잠깐 일어나 봐요. 줄게 있어요."
자꾸 귀찮게 하니 시선이 자연 곱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에 카메라가 있으니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했다.
"뭔데요?"
"이리와 봐요."
"피곤해요. 쉬고 싶어요."
"그러지 말고 좋은 거 줄 테니까. 배고프잖아요."
순간 지윤은 눈치 챌 수 있었다.
'먹을 것?'
눈이 번쩍였다.
한 밤중에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처럼 눈에서 빔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먹을 것을 얻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지윤은 얼른 일어났다.
이후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곳으로 두 사람은 움직였다. 두 사람을 신경 쓰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카메라맨 하나만 피디의 눈짓에 슬쩍 따라붙은 정도였다.
"이거 먹어요."
"이건!"
파인애플 통조림과 다른 여러 가지 음식들이었다. 아침 일찍 초콜릿 도마뱀을 구워 먹으며 사람들과 교환했던 음식들을 심후는 다 먹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
"먹어봐요. 힘들잖아요."
서둘러 캔을 따서 한 입 먹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미각을 자극했다.
파인애플의 과육이 씹히자 뇌는 환호했다. 열대 우림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폭포가 보였고 그 아래 자신이 서있는 것 같았다.
"아......."
눈물이 앞을 가리는 맛이었다.
울지 않으려 하는데 자꾸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콧물이 흐를 것 같아 훌쩍이다 고개를 돌렸다.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하고 고생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끔찍하게 싫어하는 도마뱀을 씹었을 때의 불쾌한 감촉도 되살아났다. 하지만 천상의 맛을 내는 파인애플 조각으로 인해 불쾌함은 녹아내렸다.
"잉."
그래도 마지막까지 녹이지 못한 것은 서러움이었다. 울면서 파인애플을 먹던 지윤은 급기야 울기 시작했다.
그때 심후가 움직였다.
부드러운 바람처럼, 포근한 이불처럼, 달콤한 사탕처럼 심후는 지윤을 살며시 감싸 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이었으나 지윤은 거부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마음에 솟아오른 설움을 따스한 품안에서 녹여내고 싶을 뿐이었다.
뜨거운 눈물과 남자의 포옹이 함께 어우러져 지윤의 설움을 서서히 녹였다. 그리고 모든 것이 눈물과 함께 배출 되었을 때 지윤은 느낄 수 있었다.'이 남자....... 따뜻하다.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감정이었다. 연예계에 들어서기 전, 아무 것도 모르던 소녀 시절 느꼈던 감정이었다.
바쁜 사회생활로 인해 거의 잊고 지냈던 첫사랑의 감정이었다. 순수한 호의.
지윤은 그것을 잊고 살아왔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심후에게 소녀의 감정을 품게 되었다.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숨기기 위해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좋다.'
땀 냄새가 조금 낫지만 기분 나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후는 지윤이 안정 된 것 같자 슬며시 뒤로 물러났다.
"이제 괜찮아요?"
"네."
"그럼 얼른 먹어요. 누가 뺏어먹기 전에."
"고마워요."
지윤은 정말 고마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파인애플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이어서 땅콩도 먹고 아몬드도 먹었다. 말린 망고도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행복한 미소가 입가에 맴돌며 떠날 줄 몰랐다.
반면 지윤을 바라보는 심후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맺혔다. 먹는 데 온 신경을 기울이는 지윤은 절대 볼 수 없는 미소였다. 또한 두 사람을 찍고 있는 카메라맨도 볼 수 없는 각도였다.
정말 교묘하게 자신을 숨긴 심후였다.'맛있게 먹어라.
'심후가 잘 해줄 때 지윤은 의심했어야 했다. 까칠하게 굴며 거리를 두던 심후가 갑자기 잘해 줄 때는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정신은 물론 육체까지 피곤해진 상태였기에 깊게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이 바로 의심을 건너 뛴 이유였다. 사실 챙겨둔 음식들은 밤에 몰래 먹을 생각이었다.
지윤이 제대로 버티는 눈치였다면 아마 주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눈빛을 본 심후는 순발력을 발휘했다. 고집스럽게 계획을 밀어붙이기보다는 유연하게 대처했다.
그래서 친절을 베푼 것이었다.
'아직 덜 괴롭혔는데 그만 두면 섭섭하지. 그리고 내 옆에서 계속 있으면서 질투심도 유발해야하고.'
수동을 통해 영수는 물론 차영의 상태까지 보고 받던 심후는 지윤이 옆에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때문에 더욱 적극적으로 지윤을 이용할 참이었다.
"오빠, 이거 먹어봐요."
바쁘게 혼자 먹던 지윤은 갑자기 멈추더니 심후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손에는 볶은 아몬드가 들려 있었다. 혼자 정신없이 먹다가 겨우 심후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아이, 얼른 먹어요. 아!"
못 이기는 척 입을 벌리자 아몬드를 쏙 넣어주었다. 둘은 마주 보며 웃었다.
허나, 둘 사이의 감정의 뒤틀림을 알아본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지윤의 마음속에는 심후가 서있었으나 심후의 마음속에는 아무도 서있지 않았다.
그저 황량한 사막만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