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두 말 않고 힘을 보탠 것은 R가문이었다. R가문 입장에서는 끊임없이 반목해온 상대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결국 아랍 왕족들은 알짜배기 농장을 하나 내놓고 말았다. 절대 자신들이 주도한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아랍 왕족인 것을 감안하여 보상해주겠다는 식으로 나온 것이었다.
강운은 덥석 미끼를 물지는 않았다. 땅은 좋지만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버티고 버티다 어느 정도 황실의 체면을 차렸다 싶을 때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심후에게 발전소를 조건 없이 양도한 것을 어느 정도 메울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심후는 연일 사랑을 나누며 모든 공사가 완공되길 기다릴 뿐이었다.
아흐메드가 죽은 순간 테러에 대한 관심은 사라졌다.
"으항!"
오직 눈앞의 아름다운 여인을 탐하고 또 탐할 뿐이었다. 전신이 열을 받아 쫀득한 치즈처럼 늘어질 때까지 허리 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눈을 감으니 별이 보였다. 유성이 계속해서 떨어져 내리며 검은 우주가 하얗게 물들었다.
"아아!"
행복에 겨운 낮은 신음이 심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결혼하자."
관계를 맺고 나서 목욕을 하던 심후는 툭하고 내뱉었다.
멋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청혼이었다. 하지만 에린은 심후가 먼저 말해줬다는 사실 하나에 감사했다. 마음 같아선 혼인신고부터 해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아왔던 에린이었다.
행여나 심후가 부담스럽게 여길까 싶어 참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참지 않아도 되었다.
"응."
망설일 필요도 없이 대답은 바로 나왔다. 농담이었다며 무른다고 해도 물러줄 생각도 없었다.
욕실 안에선 또 다시 뜨거운 핑크빛 폭풍이 일었다.
'뭘 해주면 좋아할까?'
심후는 결혼을 위해 곰곰이 생각했다.
화려하고 돈 많이 드는 결혼식을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들과는 차별되는 결혼식을 하고 싶었다. 아울러 결혼식을 통해 에린이 최고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기억 속을 뒤졌다. 에린과 얽힌 이야기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되돌아보았다.
'그래, 동화 속에 한 번 들어가 보고 싶다고 했었지.'
언젠가 뭘 해보고 싶으냐는 말에 에린이 한 대답이었다. 그냥 스치듯 얘기한 것에 불과했지만 눈부시게 발전한 기억력은 모두 기억했다.
이때부터였다. 심후가 벽돌을 굽기 시작한 것은.
하지만 평범한 벽돌이 아니었다.
밀가루를 이용해 만든 벽돌이었다.
'아주 오랜 옛날 사람들은 망치 대신 빵으로 못을 박기도 했다지?'
진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 정도로 단단한 빵이 있었다는 것은 심후도 알고 있었다.
결혼식장을 직접 짓기 위해 심후는 매일 같이 대량으로 벽돌빵을 구워냈다. 동시에 식장을 지을 부지에는 유리온실을 짓게 했다.
둥그런 돔 모양의 유리 온실의 꼭지에는 오뚝한 분홍색의 유리가 박혀 있어서 멀리서 보면 거대한 여성의 가슴처럼 보였다.
이와 같은 사실을 에린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제니의 협조를 얻어 만드는 것이기에 에린은 깜쪽 같이 모르고 지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많은 일이 벌어졌다.
모두 회사에 관한 일들이었다. 회사는 심후가 없어도 잘 돌아갔다.
한 번 궤도에 올려놓으니 알아서 쭉쭉 컸다. 배경에는 R가문이 있었다.
때문에 일을 한다고 나가서 몰래 벽돌빵을 굽고 식장을 만들고 있어도 에린은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다.
건물은 그리 크게 짓지는 않았다.
무게가 많아지면 빵으로 만든 건물이 무너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었다. 여러 번 망가질 뻔한 위기를 겪긴 했지만 심후는 거대한 식장을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이후 장식이 시작 되었다. 벽돌로 예식장을 지었으니 이번에는 초콜릿을 비롯한 과자들로 장식해 동화 속의 한 장면을 재현할 생각이었다.
'아, 호박마차.'
예식장을 다 지은 심후는 문득 호박마차가 떠올랐다. 이어서 에린이 신을 구두의 컨셉도.
메이드들이 입혀주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제니가 신겨주는 유리 구두를 신는 순간 에린은 무엇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대체 뭘 꾸민 거야?"
"직접 보시면 압니다, 아가씨."
충실한 메이드 제니는 즐거움을 미리 말해버리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에린은 하는 수 없이 직접 확인해야 했다.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끝나고 본 거울 속에는 한 명의 공주가 서 있었다.
"세상에서 아가씨가 제일 예뻐요."
묻지도 않은 말에 대답이 되돌아왔다. 거울 뒤에 숨었던 메이드의 소행이었다.
피식 웃고 밖으로 나오자 호박 마차가 서 있었다.
"이건......."
이번에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디즈니랜드 같은 곳을 가지 않는 이상 보기 힘든 것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마차가 정말 호박으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고의 실력을 가진 농부가 온갖 정성을 기울여 생산해낸 슈퍼 호박은 작은 마차로 둔갑해 있었다. 여러 사람이 타기는 곤란하지만 에린 혼자 탄다면 별 무리가 없었다.
호박 마차에 올라탄 에린은 한참 동안 마차를 타고 움직여야만 했다. 에린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만든 예식장은 꽤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저건......"
움직이는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본 거대한 돔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꼭대기 부분의 핑크빛으로 인해 야릇한 풍경이 되어버렸다. 마치 거인 여성의 가슴이 꼿꼿하게 서 있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가장 놀란 것은 바로 입구에 도착했을 때였다.
호박 마차에서 내린 에린은 연신 눈물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검은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화장을 할 때 마스카라를 하지 않은 것은 모두 눈물을 계산에 두고 한 일이었다.
"흑."
연신 훌쩍거리는 에린을 번쩍 안아든 심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예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온통 먹을 것으로 만들어진 예식장은 내부 장식도 화려했다. 온갖 과자들로 장식이 되어있던 것이었다.
"먹어봐도 돼?"
"응."
안에 들어선 에린은 근처의 꽃을 따더니 입에 넣었다. 그러자 상큼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사탕 공예로 만든 꽃이었다.
"정말 고마워."
에린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진짜 동화 속 공주가 된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 가슴 속에 봉인했던 동심의 봉인이 풀리자 아이처럼 웃으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행복의 눈물이었다.
"이제부턴 행복하게 사는 거야.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면서."
"응. 잘 부탁해."
결혼식이 거행되자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이들이 나섰다. 모두 동화 속의 캐릭터들을 따라한 사람들이었다.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 아동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 정말 잘 할게."
작게 속삭인 에린은 다짐했다.
심후를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로 만들겠다고.
에필로그결혼한 두 사람은 신혼여행을 에린이 사놓은 섬으로 갔다. 섬에서의 나날은 매우 즐거웠다.
두 사람은 벌거벗은 채 섬을 돌아다니며 아무데서나 관계를 맺었다. 완벽한 자연인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가끔 게임 속에서처럼 서로에게 싸움을 걸며 놀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장난처럼 싸울 때마다 무공이 더욱 늘어난다는 것이었다.50년 후, 두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
50년 간 종우가 남긴 접속기의 기술을 이용해 이룩한 부는 R가문에 거의 필적할 정도였다. 현재 세계를 움직이는 권력을 쥔 사람은 심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에린과의 사이는 여전했다.
심후는 에린 이외의 여자와는 만나질 않았다.
인생의 동반자인 에린은 언제나 심후를 즐겁게 하기 위해 게임을 준비했다.
"오늘은 고양이귀를 할까? 아니면 토끼귀를 할까?"
나이를 먹었지만 여전히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에린은 손에 든 머리띠를 번갈아 대보며 물었다.
"뿔은 어때? 황소처럼."
"그럼 난 산소가 되는 거네?"
"그래."
대답을 하는 심후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문득 과거를 떠올리며 조상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게임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게임은 심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 남자의 인생을 게임이 바꾼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