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가문의 천재는 사실 귀환자-1화 (1/141)

1화

어렸을 때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하는 동화책을 읽은 적이 있다.

경주 중에 낮잠 자느라 방심한 토끼를 부지런한 거북이가 이기는 이야기.

하지만 동화는 그냥 동화일 뿐.

인생은 길다.

토끼 같은 천재는 잠깐 쉬더라도 언제든지 거북이를 앞서 나갈 수 있다.

수년 동안 노력해서 얻었던 결과물을, 천재라 불리는 녀석에게 반년 만에 따라 잡혔던 경험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흐르지만, 그 효율은 재능에 따라 천차만별.

그렇기에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이 누군가에게만 다르게 주어진다면 어떨까.

100년이 지나고.

500년을 넘어서.

이윽고 1000년이 쌓인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서진은 그에 대한 답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런데 오랫동안 쌓아 올린 강대한 무력도 작금의 위기 앞에선 한계에 도달한 듯하다.

“썩을.”

관통상을 입은 배에서 계속 피가 흘러나온다.

다리는 치명상을 입어 제 기능을 상실했고 심장에는 고룡들의 저주마법이 직격한 상태.

입고 있는 옷은 피로 잔뜩 물든 지 오래다.

다른 놈들이었으면 진작에 죽었겠지.

하지만 버티는 것도 한계에 도달했다.

지금 생명이 꺼져가고 있다.

두 발을 땅에 딛고 서 있지만, 그마저도 위태롭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은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떨어지는 절벽이다.

나름 이 세계에서 명소로 여겨지는 곳.

좋은 의미의 명소는 아니지만 말이다.

발밑을 내려다보면 어둠만이 보인다.

소멸의 협곡.

떨어지면 끝이라는 말이 자자한 곳.

단순히 높이만으로 유명세가 쌓인 장소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무슨 능력이 있든 간에 협곡에 처박히면 누구도 살아 나오지 못했다.

신조차 떨어진 후 못 나왔다고 할 정도니.

“쿨럭.”

입에서 울컥 검붉은 피가 쏟아진다.

갈수록 정신도 혼미해진다.

죽기 직전이라 그런가 옛 생각이 떠오른다.

지구에서 들었던 주마등이 이런 건가.

서진은 이곳에 처음 왔을 때가 떠올랐다.

살아남아야 한다.

20살에 알지도 못하는 세계로 와버린 당시엔 그 생각뿐이었다.

지구에서 항상 보던 태양과 달은 보이지도 않고 처음 보는 동식물과 익숙하지 않은 기후환경.

한국에서 현대문명을 누리다 이곳에 오니 모든 것이 낯설고 무서웠다.

인간은 하나도 없고 몬스터만 가득했기에.

이곳은 인외마경, 약육강식이란 단어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세계였다.

괴물들로부터 몸을 지키는 것도 문제지만 당장 뭘 먹어야 좋은지조차 알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이곳에 떨어진 뒤 3일도 버티지 못하고 죽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한서진은 어떤 인외종의 도움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추억 회상은 다 하셨습니까.”

갑자기 들려온 말소리에 주마등에서 깨어났다.

눈앞에는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주범들이 포진해있었다.

일반적인 몬스터들이 아니다.

한계를 초월한 힘과 지성을 갖춘 괴물들.

“아니 이제 도입부 들어가려고 하는데 네가 끊었어.”

“유감이군요.”

방금 존댓말 썼던 저놈만 해도 드래곤이라 불리는 존재다.

저 도마뱀 녀석이 항상 입고 다니는 깔끔한 양복은 한서진과의 전투로 인해 천 조각이 된 상태.

평소에 싸울 일이 없어서 죽기 전에 저 양복을 찢어보고 싶었는데 오늘 소원을 이뤘다.

“어째서 미소를 지으시는 거죠?”

드래곤, 에스카네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 게 있어.”

“어쨌든 이제 당신도 끝이군요.”

“뭐, 그렇지 니들 소원대로 됐네 축하해.”

“축하받기엔 희생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대륙을 지탱하는 7성주 중에 5성주가 죽고 저의 동족들도 수명을 못 채우고 당신 손에 죽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애초에 날 안 건드렸으면 좋았을 것을.”

서진은 가벼운 웃음과 함께 몸을 늘어뜨렸다.

정말 힘이 하나도 없다.

심장을 타격했던 저주마법이 온몸을 옭아매고 있다.

지금 할 수 있는 행동은 고작 몇 발자국 움직이는 정도.

이건 서진도 알고 저 녀석들도 안다.

에스카네는 작게 한숨 쉬며 그를 바라봤다.

“그대에게 안 좋은 감정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죽이지 않으면.”

“알아. 이유는 지겹게 들었으니 그만해도 돼.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드래곤들 빼고 다른 세력들은 나한테 악감정이 넘쳐서 공격한 것도 사실이지.”

“물론 그 말도 맞습니다. 그럼 이제 끝내드리죠.”

“벌써 대화를 끝내려고?”

“투신(鬪神)이라는 이명을 가진 당신을 상대로 시간을 끌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간의 정이 있으니 마지막 유언 정도는 들어드리겠습니다.”

“흐, 고마워서 눈물이 나네. 내가 전에 고향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지?”

“그곳으로 돌아갈 순 없냐고 물어보신 적이 있었죠.”

“마법의 극에 달한 드래곤이라면 방법이 있을까 해서 물어봤었지. 결국 소용이 없었지만. 여기서 1000년 동안 살면서 한 번도 고향이 그립지 않았던 적이 없어.”

세월이 흐르면서 감정이 무뎌질 때도 있었지만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 이룩한 힘을 모두 잃는다고 해도 기꺼이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몬스터만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사람이 너무 보고 싶다.

무엇보다 지구의 음식이 제일 그립다.

“에스카네. 내가 왜 죽기 전에 여기로 온 줄 알아?”

“...설마, 그 전설을 믿으시는 겁니까.”

“일종의 도박이지.”

소멸의 협곡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

저 어둠에 빠진 존재는 죽는 게 아니라 다른 세계로 건너간다는 말이 있다.

한 번도 증명된 적이 없는데 왜 그런 전설이 내려오는 걸까.

정말 협곡에 빠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전부터 궁금했는데 죽을까 봐 실천은 못 했다.

그런데 어차피 죽을 거라면.

이곳만 한 자살 장소가 없다.

에스카네는 서진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마나를 움직였다.

서진이 떨어지기 전에 숨을 끊을 속셈.

눈치채지 못할 서진이 아니다.

마법이 구현되어 닿기 직전.

서진은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

서울 광화문에서 북쪽으로 70km 정도 떨어져 있는 개성.

개성 중심부에는 흑룡이 새겨진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흑룡검가.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 가문.

흑룡가의 검은 패도적이고 빠르며, 극에 달하면 용의 형상을 한 흑뢰(黑雷)를 다룰 수 있다고 전해진다.

흑룡검가의 심처에 위치한 회의실.

ㄷ자형으로 쭉 뻗은 거대한 탁자에 좌우로 가신들이 자리해있다.

가주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한서진 그 아이가 쓰러지고 의식을 잃은 지가 꽤 됐지 않나요?”

“올해로 5년째요”

“오래도 누워있는군.”

“마광병 증상 중에 식물인간 비슷한 증상도 있나?”

“글쎄요, 제가 알기론 처음 있는 경우랍니다.”

“이거 참.”

회의실 가장 상석에는 흑룡검가의 주인, 한벽호가 눈을 감고 앉아있다.

가신들의 의견을 듣겠다는 무언의 의사표시.

그들은 가주의 허락 아래 연이어 말을 이어간다.

“애초에 재능도 그리 대단치 않았었지요?”

“대단치 않은 게 아니라 아주 형편없었던 정도요.”

입방아에 오르고 있는 한서진은 눈앞에 있는 가주의 손자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가주 앞에서 내뱉기엔 수위가 높은 발언.

만약 다른 가문 같았으면 입 밖에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주의 뒤틀린 냉정함과 가문의 복잡한 속사정이 이런 발언들을 허용케 했다.

그들은 한참 한서진의 재능에 대해 비난을 하다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한서진 그 녀석에게 1년간 들어가는 병원비만 해도 만만치 않다 들었습니다.”

“얼마였다고 했었죠?”

“지난 4년간 전부 계산하면 50억 가량이지요.”

“허허...”

가주 회의에 참석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저런 정보를 모르지 않는다. 알면서도 명분을 위해 짚고 넘어간다.

그 명분이란 무엇인가.

이 회의가 소집된 이유와 관계가 있다.

한서진의 처우에 대한 결정.

마른 얼굴에 차가운 인상을 한 남자는 분위기를 보며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흑룡가의 차남이며 한서진에겐 이복 숙부인 한정후.

그가 입을 열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마광병은 위험합니다. 병원에서 자칫 폭주하면 의료인과 환자들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런 참사가 일어난다면 사람들이 우리 가문을 뭐라 생각할지...”

“한서진 도련님은 아직 초기입니다. 3기가 되어야 폭주 가능성이 생기는 건 알고 계실 텐데요.”

누군가가 한서진을 변호했다.

한정후는 그를 보며 말했다.

“부원주, 당신도 알다시피 전례가 없습니다. 마광병 초기라도 식물인간 상태에서 갑자기 폭주를 할지 안 할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약제사인 정선은 근거가 없어 반박할 수 없었다.

한정후는 이에 쐐기를 박았다.

“유니온의 압박은 물론이고 대한가문회, 헌터협회에서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한서진을 정리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정선이 반박을 하려 할 때, 가주가 눈을 떴다.

“그만.”

그리고 결정이 내려졌다.

“12월 말까지 차도가 없으면 처분 회의를 열겠다.”

**

“으음.”

사르륵.

환자 옷과 이불이 스치며 나는 소리.

5년간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던 몸이 움직였다.

한서진을 아는 사람이 본다면 경악할 정도로 놀랄 일.

서진은 이윽고 눈을 떴다.

삐쩍 마른 팔에 꽂힌 줄과 하얀 벽이 제일 먼저 보였다.

“뭐지.”

생각해보자.

무슨 일이 있었더라.

그래 맞아.

싸우다 죽기 직전까지 몰려서 절벽에서 떨어졌지.

소멸의 협곡으로.

그런데 지금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뭔가.

“병원...?”

천 년간 다른 세계에 있던 탓에 판단이 느렸다.

“이거 꿈인가?”

한서진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본 순간, 불안한 의심이 사라졌다.

계속 그리워했던 고향의 풍경이다.

꿈이 아니라면 정말 돌아온 게 틀림없다.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잠시 몇 분이 흐르고 감정을 수습했다.

우선 한서진은 자신의 몸을 살폈다.

이계에서 쌓았던 강대한 마력은 온데간데 없었다.

있는 거라곤 뼈다귀 같은 빈약한 육체와 좁쌀만 한 마력.

“내 몸이 맞나?”

서진은 병실 안을 둘러봤다.

다행히 옆의 벽면에 거울이 있다.

그곳에 비친 얼굴은 말랐지만 틀림없는 본인이었다.

이계로 건너가 고생하기 전의 얼굴.

그러면 협곡에 떨어진 육체는 어떻게 됐을까.

정신만 이렇게 돌아오다니.

마침 긴 꿈을 꾼 것만 같다.

허무한 감정이 들 법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겠지.”

곧바로 상태창을 열어본 서진의 동공이 확대됐다.

❴한서진❵

【레벨】 1

【특성】 투신전[잠김]

【스텟】 근력1 체력1 민첩1

마력10 지력9

【스킬】 -

【상태】 마광병 19% 진행

“역시.”

스텟은 현재 육체에 알맞은 수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서진은 실소하면서도 그리 걱정되지 않았다.

그는 이전의 한서진이 아니기에.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보낸 천년의 세월은 둔재를 천재로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문제는 스텟이 아니다.

“투신전?”

한번도 못본 능력이 상태창에 버젓이 박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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