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이찬민 앞에 서 있는 부길드장 정이환도 그날 치욕을 당했던 일원.
그렇기에 눈빛만으로 두 사람은 의견을 통일했다.
정이환이 입을 열었다.
“애들 당장 소집하겠습니다.”
“전부 모을 필요까진 없어. 지금 다른 사업도 있고, 게다가 한서진 그놈, 1레벨이고 마광병 걸려서 마력도 못 쓸 텐데.”
“그 옆에 호위가 한 명 있어서 말입니다.”
이찬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누군데, 강해보이냐?”
“모르겠습니다. 여자인데 허리에 검 하나 차고 있고, 마스크로 얼굴의 반을 가린 상태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년은 내가 상대하면 되겠네. 그 사이에 니들은 한서진 데리고 자리를 뜨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정이환은 뒤늦게 우려를 표했다.
“정말 괜찮을까요? 그래도 명색이 흑룡검가 장손이지 않습니까.”
“걔 완전 내놓은 자식인 거 몰라? 가문 내에 세력 하나도 없어서 건드려도 탈 안 난다. 그리고 우리 길드가 터 잡은 곳이 백야다 백야. 여기를 쑤시는 리스크를 짊어지고 쭉정이를 챙길 것 같아?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준비하러 가.”
“옙.”
**
한약방 1층에 발을 들인 한서진은 안내데스크로 향했다.
“....”
그곳에 앉아있는 여직원은 무기력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직원 태도가 왜 이런가 생각할법하지만 한서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냈다.
“여기서 항마제를 살 수 있다고 하던데.”
동시에 명함을 내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소리 없이 의자 밑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이 아이를 따라가면 됩니다.”
뭉클.
반투명한 분홍색 물체가 등장했다.
설하윤의 눈이 동그래졌다.
“루비 슬라임?”
“만지진 마세요.”
여직원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제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듯 시선을 책으로 떨구었다.
대신 슬라임이 통통거리며 움직였다.
슬라임의 안내를 따라가니 1층 뒤편 복도 끝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탑승하니 바로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버튼을 누를 필요도 없었거니와 버튼 자체가 없었다.
띵-
지하 몇 층인지 모를 곳에 멈추고 문이 열리자 연기가 쏟아졌다.
철컥.
설하윤이 경계를 위해 검을 완전히 뽑기 직전.
“괜찮아.”
서진을 그녀를 말렸다.
경험상 이건 무해한 연기다.
비록 육체는 리셋됐어도 본능은 살아있기에 알 수 있다.
서진은 서두르지 않고 한 걸음씩 나아갔다.
짙은 연기 속을 지나자 한 사람이 보인다.
“생각보다 배짱이 있네.”
여유로우면서 웃음기를 머금은 소리.
조금 더 다가가자 누군가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약방의 주인이자 백야의 주요 세력 중에서 중립을 표방하고 있는 약화련의 련주.
독특한 백색 단발에 복장은 흰색 로브.
피부까지 백옥처럼 하얘서 이곳 연기의 일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배경과 일체감이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한서진입니다.”
“음, 반가워. 쓰러졌다고 들었는데 멀쩡하네? 얼굴도 쏙 빼닮게 잘 컸고.”
“부모님이랑 많이 친하셨습니까?”
얼굴만 봐선 부모님 나이대보다 어려 보인다.
“그래서 이렇게 부른 거 아니겠어? 뒤에 여자는?”
“설하윤입니다, 한서진 님의 호위를 맡고 있습니다.”
그녀는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최이린은 눈짓으로 인사를 받고 서진에게 말했다.
“항마제가 필요하고 했지.”
“예.”
“단계별로 있는데 어떤 걸 원해. 약발 강하게 받는 센 거? 아니면 소프트?”
“처음부터 강한 약을 먹으면 내성이 빠르게 생기지 않습니까?”
“보통은 그런데 비싼 건 다르지. 내성은 늦추면서 억제 능력도 괜찮아.”
“그런 건 가격이 얼맙니까.”
“고급형은 2등급부터인 거 알지? 그중에 가성비 제품이 라이젤이라고 하는 녀석인데 10정에 한 세트고 세트당 1천 8백만 원.”
“개당 유지 시간은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30분. 적으면 20분.”
한서진은 고민에 빠졌다.
지금이야 돈이 남아있으니 살 수 있지만 꾸준히 구매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부담이 되는 가격이다.
‘돈이 필요하긴 해.’
부모님이 남겨주신 재산은 있지만 수입 없이 쓰기만 하면 약값으로 다 나갈 기세다.
가문의 지원은 바라지도 못하는 상황이고.
서진은 최이린에게 다른 제품들도 소개를 듣고 나서 결정을 내렸다.
“라이젤 2세트 사겠습니다.”
그리고 책상에 3600만 원에 달하는 현금을 올렸다.
“센스가 좋네? 첫 거래니까 3천만 받을게. 그리고 특별히 선물.”
최이린은 자신의 주먹만 한 크기의 캡슐을 꺼냈다.
“연막탄이야. 필요할 때 있으면 써.”
“감사합니다.”
서진은 사양 없이 바로 챙겼다.
힘이 약할 땐 뭐라도 있는 게 좋은 법.
최이린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며 손을 흔들었다.
“이제 가봐. 다음부턴 특별한 일 없으면 나 볼일은 없을 거야.”
“네. 이만 가보겠습니다.”
설하윤도 고개를 숙인 뒤 서진을 따라나섰다.
*
볼일을 마친 서진은 이 도시의 스쳐가는 정경을 감상하며 생각에 잠겼다.
제일 시급한 과제는 훈련생과 대련.
백랑대가 훈련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라고 해도 수준이 마냥 낮진 않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지금 몸 상태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서진의 머릿속에 그에 대한 걱정은 없다.
‘일주일 동안 계획대로만 움직이면 대련이야 고민거리도 아니야. 문제는.’
돈이다.
5년간 지출된 병원비만으로 유산으로 물려준 돈 대부분을 내야 하는 상황.
이놈의 가문은 재능이 없다고 판단되면 지독하리만치 지원에 대해 철저해진다.
‘하여간 정이 안가.’
그래서 다 줘패고 가주가 되고 싶은 거지만 말이다.
어쨌든 약을 사기 위해서 거액을 충당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수입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려던 서진의 감각에 무언가 걸렸다.
“잠깐 차 세워요.”
설하윤은 바로 갓길에 차를 대며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하윤 씨는 레벨에 비해 기감이 부족하네요. 단련하는 게 좋겠습니다.”
“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설하윤의 안색이 굳어졌다.
마력을 끌어올려 기감을 확장하자 적지 않은 수의 헌터들이 느껴졌다.
조금만 더 앞으로 갔다면 포위되는 위치에서 습격당했을 것이다.
“전방에 매복 중인 놈들이 있었군요.”
설하윤은 믿어지지 않았다.
한서진이 100명이 덤빈다 해도 이길 자신이 있을 정도로 무력 차이는 명백했다.
그런데도 자신이 한참을 늦게 눈치채다니.
능력이 탐지에 특화되어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실전에선 별로일 텐데.’
탐지계 헌터들 대다수가 실제 전투에서 약한 면을 보이니까.
“늦게 알아채서 죄송합니다. 나가서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아니요. 지루하기도 하니 저도 나갑니다. 약발 시험도 할 겸.”
“예?”
덜컥.
그녀가 말릴 새도 없이 한서진은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조금 전 구매한 라이젤 한 정을 입에 넣는 모습이 보인다.
설하윤의 가죽 마스크 안에서 얕은 한숨이 나왔다.
‘좀 성숙해 보였지만 그래 봤자 곱게 자란 도련님이네.’
감지 결과에 따르면 매복 중인 인원은 15명.
다행히 평균 레벨 수준은 낮은 걸로 추측되지만 한서진은 제대로 된 실전 경험이 없다.
듣기론 그렇게 알고 있었고 저 모습을 보니 역시 맞는 것 같다.
설하윤은 이전 보직인 흑룡대가 그리워졌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최대한 그가 다치지 않게 끝내자.’
하지만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그녀였다.
한서진과 설하윤이 차를 멈추고 밖으로 나오자 잠복했던 그들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언의 길드장 이찬민은 혀를 차며 말했다.
“쓸데없이 눈치가 빠르네.”
부길드장 정이환이 말을 받았다.
“저년이 얘기했겠지요.”
“포위는 실패했지만 꼬라지 보니 이대로 가도 충분하겠다. 나하고 니들 4명은 마스크년을 상대한다. 이환이 넌 나머지 애들 데리고 가서 애송이 보쌈해라.”
“알겠습니다.”
이찬민은 벌써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번 습격은 단순한 화풀이만이 목적이 아니다.
한서진의 부모가 물려준 재산이 많을 터.
유약해 보이는 저놈을 납치해서 두들기면 알아서 술술 뱉어낼 게 뻔하다.
거기다 저 여자는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눈매만으로 미인이라는 확신이 든다.
재미 좀 보고 구속구 채워서 노예로 팔아치우면 짭짤하리라.
“얘들아 가자.”
부길드장의 지시를 신호로 도로 옆 수풀에서 열 명이 넘는 헌터들이 튀어나왔다.
이찬민과 길드원 3명은 다른 방향으로 땅을 박찼다.
펑!
파공음을 내며 제일 먼저 날아간 이찬민은 그녀의 목을 향해 검을 뻗었다.
타앙!
설하윤은 이를 본능적인 전투 감각으로 쳐냈다.
검신이 약간 흔들릴 정도의 강한 일격.
자신보다 1레벨 아래거나 아니면 동급이다.
생각보다 놀란 건 이찬민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이년 만만찮군. 약을 먹길 잘했어.’
일정 시간 동안 스텟을 올려주는 아이템을 복용했음에도 비등한 수준이다.
비싼 약은 아니기에 지속시간도 짧고 부작용도 만만찮다.
이찬민의 번들거리는 붉은 눈을 본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뭘 먹은 건지 짐작이 갔기에.
설하윤이 한서진이 걱정돼서 빨리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은 직후, 두 사람의 검이 다시 부딪혔다.
카앙!
순간적인 마나 출력은 마약을 삼킨 이찬민이 우세했다.
설하윤은 검을 틀어서 그의 검을 흘렸다.
몇걸음 물러난 그녀에게 다른 방향에서 검이 날아들었다.
탕.
받아치고 보니 4명이 추가되어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마약 상태인 놈을 포함해 총 5명을 상대하긴 이대론 힘들다.
설하윤은 어쩔 수 없이 고유 스킬을 발동했다.
‘투신의 가호.’
시전자가 받는 적개심에 비례해 마력과 스텟을 일시적으로 증폭시키는 능력.
시간 제한이 있으며 끝난 뒤 부작용이 귀찮지만 지금 상황에서 가릴 형편은 아니었다.
“음?”
그녀의 변화된 기세는 이찬민이 제일 먼저 감지했다.
‘저년 상태가 달라졌는데.’
조금 전까진 일대일로도 붙어볼 만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시발.”
이찬민은 품에서 마약을 꺼내 제일 측근에게 던졌다.
길드장의 눈짓을 받은 측근은 바로 약을 삼켰다.
“크아악!”
그가 잠깐 멈칫한 사이 제일 떨어져있던 부하의 오른팔이 날아가는 게 보였다.
이제 부하의 숫자가 줄어들면 자신이 불리하다.
이찬민은 부하의 목을 마저 치려는 설하윤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한서진에게 비웃음이 들려왔다.
“흑룡가의 장손님. 멍청하게 남의 전투나 보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요?”
그 말과 함께 투척 무기가 날아왔다.
팔과 다리 하나에 한 개씩.
한서진은 그것들을 몸을 비트는 것만으로 전부 피했다.
“큽, 프흐흐...”
그리고 갑자기 터진 한서진의 웃음.
아이언의 길드원들은 그를 미친놈 보듯 쳐다봤다.
동시에 한서진의 묘한 분위기는 공격을 망설이게 만들고 있었다.
웃음을 삼킨 한서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아니 생각해보니 이런 몸으로 싸우는 게 진짜 오랜만이다 싶어서. 그리고 고맙다는 말을 전할게.”
아이언 길드원들의 투기는 투신공에 의해 전부 스텟으로 변환되기 시작했다.
[근력이 8 상승합니다.]
[민첩이 7 상승합니다.]
[체력이 7 상승합니다.]
[지력이 5 상승합니다.]
[마력이 8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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