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서진은 두 사람의 팔목을 잡고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헬기가 강변을 향해 강 위를 지나가는 이 순간.
서진은 점멸을 사용했다.
팟.
세 사람이 동시에 헬기 아래로 순간이동 되었다.
‘성공이군.’
서진은 두 사람과 함께 강에 떨어졌다.
콰앙!
사람 없이 텅 빈 헬기는 그대로 강변에 처박히며 불이 타올랐다.
잠시 후 강에서 빠져나온 두 사람은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봤다.
“우리가 저기 있었으면...”
“백퍼 뒤졌겠죠.”
그들은 서진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었다.
“정말...감사합니다. 서진 님 아니었으면 지금쯤 저는 황천길 건넜을 겁니다.”
“저도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따지고 보면 서진을 태우고 가다가 당한 일이다.
하지만 그걸 지적하며 대화를 이어나가기엔 지금 상황이 급박했다.
“두 분은 가문으로 조심히 돌아가세요. 여기서부턴 제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서진은 그들을 뒤로하고 트롤이 있는 곳으로 땅을 박찼다.
그렇게 많이 달릴 필요도 없었다.
트롤 2마리는 이미 서진을 향해 오고 있었으니까.
[근력이 1 상승합니다.]
오래 끌 필요 없이 단숨에 죽여야 한다.
서진은 검을 통해 마나를 보내 뇌기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파지직!
뿜어져 나오는 뇌기는 점차 늘어나다가 갑자기 줄어들며 검을 감쌌다.
압축된 번개가 검강처럼 변한 것이다.
그리고 트롤의 얼굴을 향해 검이 휘둘러졌다.
흑룡검술 제 4식 만천뇌우(滿天雷雨)
압축된 자색 뇌기가 수천 조각으로 찢어지며 전방을 향해 터져나갔다.
번개 폭격을 맞은 트롤 두 마리는 머리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건 넝마가 된 트롤의 몸뚱이뿐이었다.
“으아아악!”
비명이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역시 트롤이 있었다.
그리고 엎어진 채 일어나지 못하는 남자.
서진은 바로 뇌격포를 발사했다.
퍼엉!
단숨에 머리가 터져나가고 남자는 가까스로 일어나 도망쳤다.
이렇게 4레벨인 서진의 공격이 통하는 이유는 자색 번개 덕분이다.
색이 변하면 그만큼 파괴력도 올라가니까.
서진은 보랏빛 전류를 발산하며 트롤 사냥을 시작했다.
**
그로부터 20분 정도 지났을 때, 전부 마무리됐다.
트롤 던전은 개체가 적은 던전이고 브레이크가 터지면 안에 있는 숫자의 반 정도만 튀어나오기에 수습이 수월했다.
“헌터님 정말 고맙습니다.”
서진 덕분에 살아남은 사람 중 한 명이 연신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아닙니다. 몬스터가 있으면 당연히 죽여야죠.”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미묘한 감정이 있었다.
이 던전 브레이크는 자신을 겨냥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래서 무작정 감사 인사를 받는 게 꺼림칙했다.
그리고 거슬리는 점 또 하나.
트롤 죽이느라 원흉을 추적조차 못 했다.
설하윤을 데리고 올 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번에는 혼자 다니고 싶어 떼놓고 왔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딴생각에 잠겨있는 서진을 누군가가 깨웠다.
“헌터 님.”
“예?”
“혹시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사례를 하고 싶습니다.”
서진의 주변엔 아직도 감사를 표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굳이 밝힐 필요가 있을까.’
거절하려던 서진은 순간 멈칫했다.
‘사례는 안 받더라도 이름은 밝히는 게 좋겠지.’
원인이야 어찌 됐든 이런 식으로 평판을 얻는다면 가주가 되기 더 수월할 테니.
“흑룡검가의 한서진입니다. 하지만 사례는 괜찮으니 사양하겠습니다. 이만 저는 약속이 있어서 먼저 떠나겠습니다.”
“아, 저희가 괜히 바쁘신 분 붙잡고 있었네요.”
“그래도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작은 선물이라도 드리고 싶은데.”
“그거야 다 같은 마음이지만 저렇게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더 조르는 것도 민폐일 수 있습니다.”
“하아, 그것도 그러네요.”
서진은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조심히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그가 떠난 후 이 도시에는 흑룡검가 한서진의 이름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군가 찍은 한서진의 트롤 사냥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갔다.
**
바다가 훤히 보이는 곳에 위치한 대한가문회의 부산지부.
대한가문회의 저력을 자랑하듯 건물이 하늘 높이 뻗어있었다.
서진이 로비에 발을 들이자 가드가 다가왔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서진은 초대장을 보여주었다.
가드는 바로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가드는 앞서 걸으며 엘리베이터로 안내했고, 1층에서 출발해서 80층에서 멈추었다.
띵-
문이 열리자 복도 끝에 소회합 푯말이 보였다.
‘복도가 참 더럽게 기네.’
서진은 긴 복도를 걸어서 두꺼운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서진에게 집중되었다.
경계심은 애교고 노골적인 적의도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호의 어린 시선도 있었다.
제일 먼저 다가오는 저 남자 한 명뿐이지만 말이다.
“한서진! 오랜만이다.”
누군지 기억이 안 난다.
“죄송합니다. 5년 동안 누워있던 탓에 얼굴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워낙 큰 사고였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이해해. 그래도 금쇄검가의 이천정이라고 하면 기억나려나?”
가문명과 이름을 들으니 알겠다.
어렸을 때 종종 만났던 적이 있었지.
“네, 어렴풋이 나네요.”
“예전에 형이라고 하면서 편하게 불렀으니 말 놔도 괜찮아.”
서진은 짧게 대화를 나누며 그의 눈빛 속 의도를 파악했다. 한서진 개인이 아니라 대가문의 후계자에게 볼일이 있다는 걸.
오늘 회합이 그런 의도로 열린 건 서진도 알지만 이천정에 대한 흥미는 잃었다.
서진은 적당히 대꾸해주며 원탁 위의 명패를 찾아 착석했다.
초대장을 받은 후계자들이 전부 참석하자 본격적으로 회합이 시작되었다.
서진은 처음이기에 나대지 않고 입을 닫고 지켜만 보았다.
주로 어떤 주제가 제시되면 거기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주제는 상당히 다양했다.
경지에 관한 화두나 헌터 관련 법, 가문의 운영, 길드와의 마찰 등.
생각보다 듣는 재미가 있었다.
회합의 분위기는 차분하면서 종종 열정적인 느낌을 풍겼다.
아무래도 가문의 후계자이니 체면을 차리지만 젊고 어린 나이기에 가능한 분위기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다들 어렸을 때부터 친분을 쌓아온 사이라서 거리낌 없이 대화가 오갔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폭탄과도 같은 주제를 누군가 꺼냈다.
“마광병이 있는데도 헌터일을 하는 경우에 대해서도 엄격한 규제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른 후계자가 동조하며 이어받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마침 여기에 당사자가 있는데 그 사람의 의견이 어떤지 무척 궁금하군.”
서진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을 시작했다.
“내 의견을 묻는 거라면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없네. 헌터 일을 계속할 생각이라서.”
방금 전 의견을 물어봤던 기갑성가의 성주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한서진, 네가 레벨을 올려서 강해질수록 마인이 됐을 때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는 것은 알고 하는 말이냐.”
“그래, 근데 그건 나랑 상관이 없어. 난 마인이 될 일이 없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마광병에 걸리면 무조건 마인이 된다는 기초적인 사실도 외면하는 거냐.”
“무조건이라니. 7레벨 헌터 세리아가 있잖아?”
20살 여자가 ‘성역’이라는 스킬을 얻어 자신의 마광병을 없애버린 일화는 굉장히 유명했다.
성주원은 짜증 내듯 뱉었다.
“그건 굉장히 특수한 케이스고. 세리아말고 마광병을 이겨낸 사례는 하나도 없어. 너의 그런 무책임한 태도는 나중에 큰 재앙이 될 거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너무 걱정하면 빨리 늙을 텐데.”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는 서진은 가볍게 받아쳤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일부 후계자들에게 분노를 심어주었다.
탕!
열화권가의 임강우가 탁자를 치며 일어났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내 동생은 폭주한 마인 때문에 죽었다. 아직도 그 슬픔이 남아있어. 시간이 지나면 한서진 당신도 마인이 되어서 괴물처럼 사람을 죽이겠지. 좋은 말로 할 때 헌터를 그만두고 조용히 살아.”
“싫다면?”
“나보다 약해 보이는 주제에 너무 뻗대는 군.”
서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약해 보인다는 건 네 착각이라서 그렇지.”
“그러면 이참에 한판 붙어보자.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맞는 기분이 뭔지 알려주지.”
임강우는 건틀렛을 꺼내 착용했다.
동시에 그에게서 투기가 발산되었다.
[체력이 1 상승합니다.]
서진은 놓치지 않고 투신공으로 흡수했다.
그때,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잠시만요. 이런 식의 싸움은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철혈백가의 백화연이 일어섰다.
“누가 강한지 판가름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강하다고 해서 마광병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럼 어떡하라고요. 누나.”
그녀를 어려워하는 임강우는 눈치 보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 있어.”
“뭔데요.”
“마광병을 억제하는 핵심은 마나 컨트롤 능력이야. 이 자리에서 서진이가 그 능력을 증명해 낸다면 당분간은 믿고 지켜볼 만하다고 생각해.”
이쯤 되니 서진도 궁금증이 생겼다.
예전에 파혼한 사이지만 그녀는 항상 냉철함을 유지하고 합당한 판단을 중시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여전히 그 모습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그걸 어떻게 증명하지?”
서진의 말에 백화연은 기갑성가의 성주원을 불렀다.
“주원 오빠, 여분 장비 좀 빌려줘.”
“뭐?”
“기갑성가의 장비를 서진이가 조종한다면 조금 믿어도 괜찮다고 생각해.”
“그게 말이 돼?”
기갑성가는 독보적인 무장으로 유명하다.
몸에 착용하는 기계무장은 강력한 화력만큼 제약도 크다.
선적적으로 세밀한 마나 조절 재능을 타고나야 운용할 수 있다. 아니면 성가의 핏줄로 태어나거나.
성주원이 보기에 한서진은 절대 불가능하다.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잖아.”
“하아.”
성주원은 마지못해 장비를 꺼냈다.
그녀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가진 그는 이 정도 부탁은 거절하기 힘들었다.
백화연은 앞에 놓인 장비를 보고 서진에게 말했다.
“이제 한번 해볼래?”
성주원이 내려놓은 무장은 네 종류였다.
양팔과 다리, 몸통과 머리 부분.
서진은 바로 앞에 다가섰다.
“이걸 착용하고 가동을 하면 되는 거지?”
“응.”
“그런데 말이야. 조건이 구체적이지가 않아.”
“조건?”
“그래. 내가 가동 시킨다면 너희들은 정확히 뭘 하겠다는 거지? 솔직히 내가 이걸 할 필요는 없는데. 항마제도 안 먹고 시도하는데 그만한 메리트가 있어야 할 거 아냐.”
임강우가 서진을 보며 말했다.
“이제 와서 도망칠 생각은 아니겠지.”
“강우야, 조용히 해봐.”
백화연은 그를 입 다물게 하고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다들 알다시피, 저 무장을 외부인이 첫 시도에 가동 시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점은 이견이 없겠죠. 그러니 한서진이 성공한다면 저는 향후 5년간, 그의 마광병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녀의 선언을 들은 사람들은 귀를 의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