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잠시 고민하던 서진은 거절할 필요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간다고 전해드려.”
“네!”
그로부터 1시간 후, 식탁에는 식후 디저트가 나오고 있었다.
식기 소리만 나던 자리에서 드디어 기갑성가의 가주가 입을 열었다.
“입맛에 맞았는지 모르겠어.”
“물론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가주님.”
“얼마전에 일어났다고 들었는데 건강해보여서 다행이야. 흑룡가주께선 여전히 정정하신가?”
“네. 여전하십니다.”
“그러고보니 자네를 마지막으로 봤던 때가 몇 년전 내가 흑룡가에 갔을 때였지 아마?”
“예, 8년 전 제가 17살이었을겁니다.”
“그후로도 얘기는 듣곤했는데 오늘 보니 많이 달라진 것 같아서 보기가 좋아.”
가주는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서진을 쳐다봤다.
“감사합니다.”
“그래 지내면서 불편한 거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주고,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그리고 가주는 아직 일이 남아있는지 자리를 떴다.
서진이 판단한 이들 가족의 분위기는 조금 묘했다.
전반적으로 단란하고 화목한 편이지만 이따금 어색한 기류가 느껴졌다.
원인이 무엇인지 서진은 궁금해졌다.
그리고 의문을 해소할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서진은 식사를 마치고 성주원, 성가을과 함께 밖으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정원에서 잡담을 나누며 거닐고 있을 때, 누군가 나타났다.
“가을아! 아, 주원이 형도 있었네요.”
서글서글한 인상을 한 남자의 눈길은 성가을을 훑다가 서진을 향했다.
그에 성주원이 입을 열어 서로 소개했다.
“흑룡검가의 한서진이다. 이쪽은 정인호 기갑부단장.”
정인호는 서진의 이름을 듣고 눈을 빛냈다.
“아! 그 소문의... 그런데 우리 기갑성가에는 무슨 일로 온 거죠?”
“그냥 소회합 끝나면서 못한 대화 좀 하려고 데려왔다.”
성주원이 서진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아하. 주원이 형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남나 보네요.”
“정인호.”
“농담이죠, 농담. 그럼 한서진 씨, 잘 지내다 가세요.”
정인호는 입꼬리를 올리며 스쳐 지나갔다.
서진은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성주원에게 말했다.
“기갑 부단장이면 핵심보직 중 하나 아니야?”
“맞다.”
“어린 나이에 대단하군.”
“삼촌이 외부에서 데려온 천재야. 첫 가동을 19회 만에 성공했거든.”
“19회?”
“그래, 너보단 한참 못 미치겠지만.”
서진은 대략적인 상황을 눈치챘다.
정인호라는 녀석이 차기 가주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직계 혈손은 아니잖아. 외부인이 될 수가 있나?”
“가문 사람하고 혼인하면 된다는 게 일부 어른들의 생각이야.”
“그렇군.”
성가을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은 이유였다.
다 내팽개치고 가출하면 강제할 수 없겠지만 아직 그런 단계까지는 아닌 데다 여러 현실적인 이유도 발목을 잡고 있었다.
성주원은 손목시계를 보며 서진에게 말했다.
“이제 밤인데 갈 거냐? 아니면 자고 가던가.”
“당분간 머무를 생각인데.”
“그러던가. 잘 곳은 따로 알려줄게.”
잠시 후 서진은 손님을 위한 호텔 같은 방으로 안내받았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기갑성가의 상황이 생각보다 안 좋군.’
그렇다면 서진이 가진 패는 더욱더 가치가 올라간다.
일반적인 지지세력을 넘어서 기갑성가와 서진 개인의 동맹 조건이 가능해 보인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압박은 더 심해지겠지.’
사회는 마광병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으니까.
유니온, 헌터협회, 던전관리국 등의 견제를 버티기 위해선 서진에겐 보다 많은 세력이 필요하다.
누워서 한참 생각을 이어가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벨이 울렸다.
서진은 인터폰을 누르고 말했다.
“누구세요?”
-저예요 오빠.
문을 열자 성가을이 서 있었다.
성가을은 쭈뼛거리며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저 들어가도 될까요?”
“어 들어와.”
그녀는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했다.
“이렇게 생겼구나.”
“여기 안 와봤어?”
“여기 건물이 신축이고 손님들을 위한 곳이다 보니 전 올 일이 없어서요.”
서진은 성가을과 함께 거실로 향했다.
“어디서 얘기하지? 아, 여기 앉으면 되겠네.”
“네.”
성가을은 살포시 소파에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으음, 이런 부탁하기가 조금 망설여지는데요.”
“상관없어, 아무렇게나 말해도 돼.”
“후우, 오빠가 제 마나 컨트롤 능력을 좋게 만들어주겠다고 하셨는데 그걸 취소하고 싶어서요.”
“왜?”
“대신 저희 오빠에게 기회를 주면 안 될까요?”
“성주원 말하는 거야?”
“네.”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
성가을은 작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아까 정인호 부단장을 보고 아셨듯이 부끄럽지만 조금 밀리고 있거든요.”
“정인호의 재능이 뛰어나니 성주원이 압박을 느끼고 있겠지.”
“네, 삼촌을 등에 업고 가문이 거의 반으로 갈라지고 있어서...”
“그래서 너 대신 오빠를 더 강하게 해달라고 말하는구나.”
“네, 솔직히 저는 가주하고 싶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거든요.”
그녀 입장에선 둘 중에 한 명이 가주가 돼야 한다면 무조건 친오빠였다.
“그런데 상황이 그렇게 안 좋아? 아버지가 가주인데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거 아닐까.”
서진의 말에 성가을은 고개를 저었다.
“기갑성가는 흑룡검가와 달라서 그래요. 저희는 가문 회의에서 과반수의 지지를 확보해야 소가주가 될 수 있어요.”
“확실히 다르네.”
흑룡검가도 회의는 있지만 가주에게 힘이 집중되어 있다.
가주의 결정이나 방치, 암묵적인 허락 아래 모든 일이 진행될 정도니까.
“그 회의에는 몇 명이 참석하는데?”
“9명이요.”
“현재 상황은?”
“4대4에 한 분은 중립이에요.”
“성주원이 지금보다 강해지면 정통성과 힘을 확보하게 되니 무게 추는 기울겠네.”
“맞아요.”
“어떤 사정인지는 알았어. 그러면 네 오빠하고도 얘기해야 하니까 오늘은 이만 가봐.”
“네, 밤늦게 죄송해요 오빠.”
“아냐. 내일 보자.”
성가을은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갔다.
서진은 혼자 소파에 앉은 채 창문 밖을 바라봤다.
“일이 조금 편하게 풀렸네.”
성가을이 먼저 다가와 준 덕분에 말을 꺼내기가 쉬워졌다.
“다른 건 내일 생각하자.”
서진은 곧바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
며칠 전 인터넷에 이런 제목의 영상이 하나 올라왔다.
[던전 브레이크를 홀로 막은 헌터]
대전에서 트롤이 나온 사건은 굉장히 이슈였기에 조회수는 삽시간에 늘어났다.
반응 또한 폭발적이었다.
-무친 저 사람 뭐냐.
-트롤 B급 몹인데 쓸어버리네.
-검에 대해 뭣도 모르지만 지렸다.
-다른 헌터는 어디 가고 쟤만 싸우고 있음?
└인근에 길드가 있는데 던전 공략 갔었다고 함.
└아니 대기 인원은 남겨놔야지 맨날 거들먹거리면서 필요할 때 쓸모없네.
-분명 검사인데 마법사 느낌도 있네. 개쩐다.
└ㅇㅈ
└번개 쏘는 게 시원해서 정화되는 기분.
-근데 저런 번개 색깔은 처음 보는데?
-보라색 처음 보긴 해. 영롱하고 고급져 보인다.
-트롤을 저렇게 썰어버리는 거 보면 6,7레벨이겠지? ㅈㄴ 부럽다.
-젊은데 레벨도 높고 인성도 좋고 얼핏 보니 잘생긴 것 같은데 완전 다 가졌어. 지나가다 똥 밟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걸 본 다른 사람이 글을 올렸다.
[현장에 있던 대전 시민입니다]
[저 분 덕분에 목숨 건진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트롤을 굉장히 빠르게 처치해주셔서 피해도 적었습니다. 다 끝나고 뭔가 사례를 드리고 싶어서 성함을 여쭤보니 괜찮다며 사양하시더라구요. 다행히 성함은 들었습니다. 흑룡검가의 한서진 님입니다!]
-오 흑룡검가!
-흑룡검가 소속 헌터들 강하지.
-근데 한서진은 처음 듣는데.
└검색해보니까 예전 기사에서 첫째 손자라고 하네.
-거기 가주가 성격이 뒤틀렸다던데 손자는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다.
이렇게 영상과 함께 인증 글이 퍼지면서 서진에 대한 칭찬이 쌓여갔다.
이윽고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킨 케린도 영상을 접했다.
“짜증 나.”
케린은 영상을 끄고 침대 위로 폰을 던졌다.
“마광병 환자를 뭐가 좋다고 빠는 거야.”
잠시 투덜대던 케린은 눈이 번쩍 뜨였다.
“맞아, 아직 쟤네 모르지?”
한서진에 대한 정보는 가문 내에서만 돌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까지 퍼져있진 않았다.
케린은 다시 폰을 들었다.
[흑룡검가 한서진 그 사람 마광병임]
글을 쓰자 바로 댓글이 달렸다.
-진짜임?
-거짓말이면 고소당할 텐데.
-고소가 아니라 칼침 맞을 듯.
-증거 있냐.
“증거?”
그러고 보니 보여줄 만한 증거가 없었다.
“에이씨. 진짠데.”
케린이 짜증을 낼 때, 흑룡검가에서도 그 글을 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한서진의 비서인 구현수가 모니터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누구지?”
일반인들이 잘 모른다 해도 작성자를 특정하기는 힘들었다.
“일단 보고를 드려야겠어.”
인터넷 특성상 이런 건 초기에 대처해야 한다.
구현수는 시간을 확인한 후 전화를 걸었다.
오전 11시면 깨어나 있을 시간이었으니까.
“서진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구현수는 현재 인터넷 여론과 방금 본 글에 관해 설명했다.
-음, 영상은 꽤 퍼졌다 했죠.
“네. 조회수 합산하면 300만이 넘습니다.”
-그러면 됐습니다. 마광병 글은 당장 지우면 티 나니까 며칠 지나서 슬쩍 없애세요. 영상은 자연스럽게 묻히도록 해주시고요.
“일겠습니다. 서진 님.”
전화를 마친 구현수는 외무각의 홍보실로 향했다.
**
서진은 구현수가 말해준 영상을 틀었다.
“이렇게 찍혔구나. 얼굴은 잘 안 나와서 다행이네.”
달칵.
이때, 공방 휴게실의 문이 열리고 성주원이 들어왔다.
서진은 폰을 덮고 인사했다.
“어서 와.”
“그러니까 마치 네가 공방 주인 같네. 가을이는?”
“잠깐 화장실.”
“사람 불러놓고 뭐 하는 거야.”
서진은 어제 가을이가 말했던 부탁을 얘기하기 위해 남매를 불러 모았다.
혹시나 모를 도청을 대비해 가을이의 공방이 대화 장소였다.
“이제 나왔네.”
화장실에서 나온 성가을이 의자에 앉았다.
“그래서 왜 부른 거야. 나 바빠서 길게 못 얘기해.”
“가주도 아니면서 뭐 그렇게 바쁘냐.”
“한가한 네가 이상한 거야.”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너 지금 상황 안 좋다며.”
“뭐?”
“4대4인데 그마저도 1명 이탈 위험이 있다고 들었다. 너와 정인호의 무장 적합 재능을 생각하면 날이 갈수록 격차가 심해지겠지.”
“그거 누구한테 들었어.”
서진을 노려보던 시선이 성가을에게 옮겨졌다.
“설마 너.”
“미안해. 근데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
“동생한테 화내지 말고 끝까지 들어. 너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다.”
“뭐라고?”
“오빠, 여기서부턴 내가 말할게.”
성가을은 서진이 기갑성가에 온 이유와 그가 했던 제안, 그리고 자신의 결심을 털어놓았다.
그것을 들은 성주원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방금 말한 대로 기갑헌터에게 재능의 격차는 치명적이다.
무조건 선천적으로 타고나야 한다.
노력을 해봤자 이대로 간다면 위험하단 한서진의 말도 팩트였다.
그리고 소가주 결정까지 앞으로 1년이 채 남지 않았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특별한 한 수가 필요한 때였다.
성주원은 마른세수를 하고 입을 열었다.
“결정하기 전에 성가을 너는 정말 괜찮아?”
“응. 나는 결심을 마쳤어.”
그럼에도 성주원은 동생의 절실한 기회를 뺏는 것 같아 마음이 찝찝했다.
그는 서진을 괜히 째려봤다.
“왜 그렇게 보냐.”
“뭔가 얄미워서.”
“어이가 없구만.”
성주원은 자세를 바르게 하고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서진아, 혹시 둘 다는 안 될까.”
“오빠.”
성가을이 놀라며 친오빠를 쳐다봤다.
서진은 내심 웃음을 참았다.
이제 대어를 낚을 시간이 되었다.
“가능해. 내 요구 조건만 수용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