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서진은 집을 향해 천천히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인원은 총 3명. 나랑 설하윤을 넣고 나면 1명이 남는데.’
누구를 데려가야 할지 고민이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 4레벨로는 부족해’
서진은 상태창을 열었다.
❴한서진❵
【레벨】4
【특성】투신전[잠금]
【스텟】근력64 체력60 민첩62
마력70 지력59
【스킬】흑룡검술(4성) 투신공(4성) 용체화(해츨링)
【상태】마광병 27.2% 진행
5레벨 달성 조건의 스텟 수치는 120.
던전을 돌면 일주일 안에 올릴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5레벨이 되면 여태껏 궁금했던 투신전이 열릴 텐데.
“빨리 던전을 가야겠어.”
서진은 구현수에게 전화했다.
“지금부터 들어갈 수 있는 E급 던전 잡아서 주소 보내주세요.”
스텟을 조금이라도 빨리 올리기 위해선 등급이 낮아도 홀로 사냥하는 편이 낫다.
서진은 저녁부터 던전에 진입했다.
**
사람들에게 세계적으로 규모가 크고 강한 단체를 꼽으라고 하면 보통 세 곳을 입에 담는다.
미국이 주축이 되어 세계 질서를 선도하는 국제헌터연합.
진리를 탐구하는 마법사들의 집단인 마탑.
마지막으로 마광병에 대한 혐오감으로 뭉친 유니온.
앞선 두 집단과 유니온의 차이점은 조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무력과 능력의 가치에 따라 개별 등급은 존재했지만 그뿐이었다.
점조직처럼 이곳저곳 퍼져있기에 통제력이 약했다.
유니온 상부층에서 지침이 내려와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경우가 제법 많다.
현재 유니온의 한국 지부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한서진, 저대로 놔둘 거야?”
던전 브레이크 사건의 실패 때문에 심통이 나있는 케린이었다.
명색이 유니온의 골드 등급에 속하는 자신이 나섰음에도 한서진을 처리하지 못했다.
치욕감과 분노는 물론이요, 초조함마저 들었다.
“일 벌린 지 아직 한 달도 안 지났다. 진정 좀 해.”
당시 케린의 옆에 있던 체이서가 그녀를 달랬다.
물론 그녀에게 그런 달래기가 통할리 없었다.
“너무 태평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걔 성장 속도는 비정상이야.”
그녀의 말에 회의에 참여한 인원 모두가 공감했다.
실버 등급의 지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케린 님 말대로 한서진의 현재 성장세를 꺾을 필요가 있긴 합니다.”
“그렇다잖아 체이서.”
“그래서 뭐 어쩌자고. 이번엔 흑룡가 상공에서 던전을 터트리게?”
“으으음, 끌리긴 한데 지금은 못 하지. 가주가 살아있잖아. 체이서는 나를 너무 단순하게 보는 면이 있어.”
그는 입술을 달싹거리다 대꾸를 포기했다.
이 이상의 쓸데없는 입씨름은 사양이었다.
그리고 중단된 대화의 공백에 지부장이 끼어들었다.
“크흠, 사실 한서진 건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좌중의 눈길이 전부 지부장에게 향했다.
케린은 흥미 있는 냄새를 맡고 눈을 빛내며 말했다.
“좋은 정보 있어?”
“아쉽게도 그게 아니라 마스터께서 케린 님보고 당분간 자중하시랍니다. 연락이 안 닿아서 제가 대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으웩.”
지부장의 말을 듣자마자 케린은 인상을 찌푸렸다.
마스터는 유니온의 정점에 위치한 존재이며 창립자이기도 하다.
아무리 유니온의 위계질서가 약하다 해도 마스터의 명을 거스를 순 없다.
“잔소리할 것 같아서 일부러 연락 끊었는데, 지부장이 할 말 있다고 해서 왔더니 이 얘기 하려고 부른 거였어.”
뾰로퉁해진 케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부장, 더 이상 할 말 없지?”
그는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후에 지부 운영에 관한 논의를 할 예정입니다만.”
“필요 없어.”
케린은 회의실을 나갔고 체이싱도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
촤아악.
던전 속, 서진은 레드독 한 마리를 죽이고 나서 상태창을 켰다.
현재 5레벨 조건에 근접한 스텟은 역시나 마력.
[마력 : 75]
물론 4레벨부터 스텟 흡수가 더뎌지기에 아직 한참 남았다.
솔로 헌팅을 하면 나을지 알았는데 오판한 것 같기도 하다.
차라리 설하윤과 더 높은 던전을 가는 게 나을지도.
이대로면 일주일 안에 5레벨 달성하기란 불투명하다.
‘내일부턴 던전 등급을 올려야겠어.’
서진이 생각에 잠긴 사이를 노리고 붉은 개 같은 레드독이 덤벼들었다.
“크왕!”
서진은 발차기로 레드독의 턱을 후려친 후 대가리에 검을 꽂아 넣었다.
‘이만하고 갈까.’
내일을 위해 체력 안배를 고려해야 하니까.
서진은 레드독의 대가리에서 검을 뽑았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얇은 여성의 목소리.
4레벨이 되어 확장된 시력 덕분에 비명의 장본인이 바로 보였다.
그녀는 레드독 세 마리에 둘러싸여 검을 애처롭게 휘두르고 있었다.
서진은 그 모습을 잠시 감상하다 고개를 돌렸다.
‘웃기지도 않는군.’
서진은 여전히 낮은 체력 스텟 때문에 빨리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서진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저기요, 도와주세요!”
서진은 잠깐 고민하다 여자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기어코 먹어달라고 하니 받아주는 수밖에.
서진은 싸늘한 미소를 감추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캉!”
서진이 접근하자 레드독 세 마리의 시선이 분산되었다.
레드독이 잠깐 멈칫한 틈에 자줏빛 번개가 세 마리를 동시에 덮쳤다.
투둑.
‘역시 여긴 별로야.’
레드독 세 마리가 몸이 양분된 채 죽을 때까지 투기가 전혀 없었다.
그 와중에 넘어졌던 헌터는 바지를 털고 일어나 서진에게 인사했다.
“도와주셔서 감사드려요. 보답을 드려야 하는데 제가 가진 게...”
그녀는 허리춤에 있는 작은 가방에 손을 넣었다.
동시에 그녀 몸에서 투기가 넘실거리는 게 보였다.
[근력이 1 상승합니다]
그녀가 가방에서 무언갈 꺼내려는 순간, 번개를 두른 서진의 검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츠즈즈.
비명조차 내지 못한 채 그녀는 단숨에 절명했다.
그러자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투기가 또 감지되었다.
[근력이 1 상승합니다]
“죽어!”
눈에 핏발이 선 거구의 남성이 조잡한 은신을 깨고 나와 대검을 휘둘렀다.
기합은 좋지만 너무 일직선이다.
저번에 태산도법으로 설쳤던 녀석에 비하면 너무나 부족했다.
서진은 뇌검을 들고 맞받아쳤다.
서걱.
자줏빛의 뇌기는 하급 헌터가 들법한 무기를 쉽게 절단했다.
쿵.
잘려나간 윗부분의 검날은 허망하게 땅바닥을 뒹굴었다.
실전에서 무기를 잃은 헌터의 결말은 뻔하다.
서진의 검이 무방비하게 드러난 남자의 목을 갈랐다.
‘이제 두 놈 남았네.’
아직 은신 중이지만 위치는 대강 짐작된다.
하지만 서진이 나서서 찾을 필요 없이 그들이 먼저 은신을 치우고 모습을 드러냈다.
[민첩이 1 상승합니다]
[마력이 2 상승합니다]
확실한 살의와 함께.
‘역시 몬스터보다 사람의 투기가 더 좋네.’
아마 혼자서 사냥하는 헌터를 등쳐먹는 파티 같은데.
서진은 왠지 자신을 노리는 놈들이 스텟 셔틀로 보였다.
연기까지 하면서 꼬시길래 왔는데 낚여주길 잘한 것 같다.
레드독 몇십 마리 죽이는 것보다 사람 몇 명 죽이는 편이 더 좋을 줄이야.
건너편에 있는 사내가 무어라 중얼거리자 서진의 발밑에서 나무뿌리가 솟구쳤다.
‘마법사인가.’
서진은 땅에 검을 박고 번개를 퍼트렸다.
치직!
서진의 다리를 묶으려던 나무 뿌리는 새까맣게 타버리며 힘을 잃고 바스라졌다.
‘기껏해야 2레벨 수준의 속박마법.’
서진은 땅을 박차며 마법사에게 향했다.
하지만 마법사가 순순히 검사의 접근을 허용할 리가 없다.
“그라운드 월.”
쿠구궁.
땅에서 솟구친 단단한 흙벽이 서진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화살이 벽의 위쪽과 양옆에서 날아왔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어볼 셈인가 본데.’
일반적인 하급 헌터에겐 통했겠지만.
상대방은 한서진이었다.
서진은 날아드는 화살을 쳐내며 검으로 벽을 겨눴다.
흑룡검술 제3식 뇌격포.
검에서 방출된 폭발적인 번개가 벽을 박살 내며 호쾌하게 뻗어 나갔다.
“뭣?”
다음 마법을 준비 중이던 그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몸이 굳어버렸다.
당황한 마법사는 뇌격포에 그대로 직격당했다.
치지직.
뇌격포의 잔여 전류까지 흩어지고 남은 건 마법사의 다리뿐이었다.
“미친.”
굵은 번개 기둥을 목격한 활을 든 헌터는 좆됐음을 직감했다.
그는 뒤늦게 등을 돌리며 도주 스킬을 발동했다.
‘윙 스텝.’
무력으론 밀릴지라도 달리기엔 자신 있다.
그는 땅을 박차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젠장, 대체 저 새낀 뭐야.’
레드독 사냥하는 걸 지켜봤을 땐 솔로 헌팅하는 만만한 놈인 줄 알았다.
번개를 다루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고, 검기만 발현하길래 타겟으로 삼은 것이었는데.
혹시 우리를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약한 척을 한 건가.
아니면 기척을 감지하고 경계심이 들어 실력을 숨겼을 수도 있고.
‘시발,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자.’
뉴비 사냥도 꼬리가 길면 헌터협회나 마력관리청에 잡히기 마련이다.
‘목숨값 교훈 얻었다고 생각하고 이젠 번듯한 길드에 들어가서 살아야겠어.’
돈이 좋긴 하지만 계속 그 꺼림직한 놈들과 장기 거래하는 것도 찝찝했던 터였다.
‘아니면 헌터 그만두고 지방에 내려가서 편하게 살까.’
그러나 그의 고민은 길게 이어가지 못했다.
발목에서 느껴진 화끈한 통증에 균형을 잃고 넘어져 나뒹굴었다.
“끄악!”
다리를 쳐다보니 오른쪽 발목 아래에 있어야 할 발이 보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빠르네.”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서진이었다.
그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떨며 간신히 말했다.
“사, 살려...”
“싫어.”
서진은 그의 목을 향해 검을 내리찍었다.
“후우.”
이놈이 스킬을 쓰자마자 멀리 튀어 나가는 바람에 점멸을 쓰고도 놓칠뻔했다.
“그런데 얘네들 어떡하지.”
살인에 대한 후폭풍이 걱정되는 건 아니다.
죽일만한 놈 죽인 거라 헌터 협회나 마력관리청에선 환영할 테니까.
다만 이대로 놔둔 채로 신고를 하면 시체수거반이 투입되는데 그 과정에서 동행을 해야 했다.
“어쩔수 없지.”
서진은 그를 엎어 매고 원래 장소까지 걸어갔다.
**
“하압!”
설하윤은 수련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빳빳했던 도복은 어느새 땀에 흠뻑 젖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가 정신없이 수련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은월검류(隱月劍流) 때문이다.
원래 익혀왔던 수월검류보다 윗급이라 평가되는 스킬.
그래서인지 체득하기가 쉽지 않다.
‘서진 님은 조바심내지 말라고 하셨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게 마음처럼 제어되지 않는다.
설하윤은 잠시 검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정좌와 함께 눈을 감으며 휴식을 취했다.
‘빨리 다 익혀야 서진 님에게 더 큰 도움이 될 텐데.’
은월검류는 총 6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여러 특징이 있지만 그 중 하나는 갈수록 검기를 숨기는 범위가 늘어난다는 점이다.
전해 내려오는 말로는 최종 단계에선 집채만한 검강마저 보이지 않는다고 할 정도.
공격의 규모와 간격을 상대방이 모른다는 건 전투에 있어서 압도적인 이점이다.
‘그리고 유사시에 서진 님을 호위하기에도 적합한 기술이야.’
어느덧 설하윤의 머릿속은 서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
탁.
그때 누군가 그녀의 상념을 깨고 수련장에 발을 들였다.
눈을 뜬 설하윤은 검을 쥐며 차분히 고개를 돌렸다.
“이거 제가 수련을 방해했나요?”
한재열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