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서진이 승낙의 말을 뱉는 순간, 함가원의 태도가 돌변했다.
“생각해보니 제 몸 상태가 안 좋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아쉽지만 못할 것 같습니다.”
“지금 장난하십니까?”
옆에 있던 설하윤이 어이가 없어 그를 째려보았다.
함가원은 짧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의 말을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들렸어도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만, 장난은 아니었습니다.”
제법 진지한 그의 표정에 서진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서진이 기억하는 함가원은 태세전환이 빠르며 결정을 뒤엎는 경우가 잦은 사내였다.
그래도 아쉽긴 했다.
제대로 붙으면 투신공으로 짭짤하게 스텟을 얻었을 텐데.
“그럼 어쩔 수 없지.”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요하고 날카로운 서진의 눈빛을 마주한 함가원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말을 바꾸길 잘했어.’
다시 생각해보니 어제 한재열의 비서에게 확답을 주지 않은 건 잘한 일이었다.
대련을 빙자해서 한서진을 손봐달라는 제안.
그걸 상황 보고 결정하겠다는 말은 정답이었다.
한재열이 보기에 외상이 아닌 내상에 특화된 자신의 기술은 이번 일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받아들이는 뉘앙스를 흘렸던 거고.
약점을 잡고 있는 한재열이 은근한 협박을 하는 게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녀석도 협박만으론 관계가 오래가기 힘들다는 걸 아는 건지 보상을 내걸며 자신을 움직이려 했다.
‘실행하면 B급 마력석을 주겠다곤 하지만.’
상대는 직계 혈손이 아닌가.
내상이라 티가 안 나며 한재열이 뒤를 봐준다고 해도 부담감이 있었다.
그래서 나름 선을 정했다.
6일 후에 있을 던전 공략에 약간 지장이 있을 정도로만.
하지만 5년 만에 직접 마주한 한서진은 몰라볼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만약 얼굴을 가렸다면 한서진일 거라 상상도 못 했을 수준이었다.
저번 백랑대원과의 대련을 할 땐 지방에 내려가 있었기에 직접 보진 못했다.
결과만 나중에 듣고 도련님 띄워주기 이벤트겠거니 했었는데.
‘착각으로 일을 그르칠 뻔했지만 늦진 않았어.’
한서진에게 살기를 슬쩍 흘렸을 때 반응을 보고 판단이 섰다.
이건 해볼 만하다고.
이런 한서진이라면 한재열과 붙어도 승산이 있다.
‘이번 경쟁에서 이기는 후계자에게 가문 내 시선이 쏠리면서 힘이 실린다.’
여기서 자신은 두 후계자 사이에서 선을 타야 한다.
한재열 그 새끼가 계속 잘 나가는 것도 좋진 않으니까.
토사구팽 당하는 건 절대 사양이다.
그러니 한서진과 한재열이 서로를 견제하는 상황이 지속되는 편이 낫다.
한재열이 이번 경쟁에서 패배한다고 완전히 밀리는 건 아니니까.
‘거기다가.’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백랑대장의 시선.
‘적당한 핑곗거리도 있으니 물러나는 척해야지.’
함가원은 짧게 인사하고 연무장을 벗어났다.
검 손잡이를 매만지는 모습을 보니 자칫 지체하다간 대련하자고 달려들 것 같았기에.
‘유약했던 도련님이 5년 만에 일어나고 작은 괴물이 되었군.’
함가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
설하윤은 마치 도망치는 것 같은 함가원을 보며 입을 열었다.
“서진 님, 저 인간은 조심하세요.”
“음? 하윤 씨가 누군가를 그렇게 지칭하는 건 처음 보네요.”
“가까이해서 득이 될 인물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서진 또한 방금 경험은 신선했다.
살기를 흘리는 걸 받아주니 꼬리를 말고 물러나는 상황이라니.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 친해질 일은 없을 겁니다.”
19살 때, 약했던 자신을 멸시하는 시선을 보냈던 놈 중 하나였으니까.
천 년을 보내며 다 잊었는데 굳이 얼굴을 들이밀며 도발을 해대는 덕분에 사라졌던 감정이 살아났다.
“그런데 저 인간은 왜 왔다 간 걸까요.”
“갑자기 나타나서 저 지랄한 거 보면 누가 사주했을 수도 있죠. 아니면 그냥 시비 걸러 왔거나.”
도중에 돌변해서 도망친 건 이해가 안 가지만 말이다.
서진은 함가원이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던지 간에 그를 쳐낼 생각이었다.
“하윤 씨는 먼저 돌아가서 쉬어요. 저는 연락할 곳이 있어서. 끝나면 시간 맞춰서 던전에 들어가죠.”
“알겠습니다.”
**
서진은 집에 들어와 성주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웬일이야.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어.”
-근데 너 나보다 한 살 어린 건 알지? 말투가 아주 형이야 형.
“그래서 안 할 거야?”
-에휴, 뭔데 말해봐.
서진은 정보건과 대화를 나누었을 때 정해진 계획을 설명해주었다.
-으음, 크게 어렵진 않네. 요약하면 내가 이름만 빌려주면 된다는 거잖아.
“그렇지.”
만약에 한재열이 이걸 눈치챈다 해도 건드리지 못한다.
-흑룡가도 본격적으로 경쟁의 막이 올랐군.
“그쪽만 하겠어.”
-그런데 A급 던전이면 성가을이 도움이 되겠냐.
“안 위험할 테니까 걱정마라.”
-걱정은 무슨! 어쨌든 알겠어, 동생한테 내가 말해놓을게.
“그래, 부탁한다.”
서진은 전화를 끊고 던전에 갈 준비를 했다.
**
정보건이 던전 조사에 착수하고 이틀이 지났을 때, 적당한 던전을 찾아냈다.
“서진아, 주인 없는 A급 던전 하나 찾았다.”
“위치는?”
“태국 북부에 있는 람푼이란 주에 있어. 몬스터는 스컬 아나콘다. 보스급인데 괜찮아?”
정보건은 몬스터 사진 도감을 열어서 생김새를 보여주었다.
역시나 이계에서 수도 없이 죽였던 괴물 중에 하나였다.
“어, 계속 말해줘.”
“네가 개체 수 적은 걸 원했는데 그런 던전이 은근히 인기가 많고 소유권 없는 걸 찾기가 힘들더라. 내가 볼 때 이거 좀 애매하긴 해.”
“어떤 점이?”
“현지 선발대 말로는 보스 몬스터 주위에 E급의 스컬 스네이크가 많다고 하더라.”
“아, 어떤 느낌인지 알겠네.”
“네가 생각하기엔 어때. 별로면 아직 시간 남았으니 다른 던전 찾아볼게.”
“아냐, 이 던전으로 하자.”
“정말? 그럼 이걸로 잡는다?”
“응. 그리고 성주원 연락처 알려줄 테니 걔 이름으로 던전 예약해.”
“알았어. 이만 가볼게.”
**
시간은 금세 흘러 약속했던 그날이 되었다.
가문에서 던전으로 출발하기 전에 각자 입회자가 붙으며 서로의 던전 정보는 공략이 끝난 후에 공개된다.
서진과 설하윤, 성가을은 새벽 비행기를 타고 태국으로 날아갔다.
태국 정부 측에서 한서진 일행을 위해 보내준 비행기였다.
그로부터 대략 6시간이 지난 뒤 태국에 도착했다.
착륙하고 내리니 총리가 직접 나와 서진 일행을 맞이해주었다.
서진은 같이 따라온 정보건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 사람들 반응이 왜 이리 극진한 거야?”
“그게 이번 A급 던전이 얘네 입장에서 골치 아프거든.”
“왜?”
“다른 고레벨 헌터들이 공략하겠다고 들어갔다가 보스한테 상처하나 못 입히고 나왔어. 이대로 가면 며칠 후에 터져서 그놈이 밖으로 나오게 생겼으니 안달이 난거지.”
“그렇구나.”
“혹시 지금이라도 무를래?”
“아니, 이 좋은 걸 왜 취소해.”
서진은 귀찮은 환영 인사를 뒤로하고 곧장 던전으로 출발했다.
던전이 있는 장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성가을이 입을 열었다.
“오빠, 정말 혼자 상대해도 괜찮겠어요? 위험하지 않을까요.”
서진이 비행기에서 말해준 공략 작전은 매우 심플했다.
서진이 스컬 아나콘다를 상대하고 주변의 스컬 스네이크는 설하윤과 성가을이 처리하는 것.
서진은 그녀의 긴장을 풀어줄 겸 가볍게 말을 던졌다.
“나 못 믿어?”
“...물론 그건 아니지만요. 휴우, 알겠어요. 그래도 만약에 혹시나 위험하다 싶으면 도망쳐요.”
“그래.”
서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A급 던전 공략을 받아들인 것도 이번 던전의 특성 때문이다.
공략형 던전도 폐쇄되는 타입과 문이 개방된 타입으로 나뉜다.
스컬 아나콘다의 던전은 후자였기에 큰 부담을 덜 수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태국의 운전기사는 서진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한국말로 유창하게 인사했다.
“타국인데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다치지 말고 돌아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예, 안 다치고 없애고 올게요.”
한서진 일행은 차에서 내려 장비를 점검했다.
서진의 검날을 본 설하윤은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서진 님, 검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이거요?”
병원에서 깨어난 다음 날 가문의 무기고에서 꺼내온 보급형 검이었다.
여태껏 관리를 대충 하며 쓰다 보니 검날이 살짝 무뎌져 있었다.
설하윤은 허리에 묶여있던 검집을 풀어 서진에게 내밀었다.
“이번 던전에서만 제 검이랑 바꾸시죠.”
“아뇨. 됐습니다. 어차피 항상 검에 뇌기를 두르고 사용하니까.”
사실 서진의 강력한 뇌기도 검날 손상에 한몫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조만간 무구예식 때 검을 받을 테니 쓰다 버릴 검입니다.”
철컥!
한쪽에선 성가을이 전용 무장을 착용하고 있었다.
기동성에 중점을 둔 날렵한 디자인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번 던전에서 성가을이 맡을 역할과 어울리는 무장이다.
서진은 준비가 끝난 둘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가자.”
“예.”
“응.”
**
던전에 들어가니 자갈과 뼈 무더기가 뒤섞인 채로 바닥에 깔려있었다.
“키이익!”
멀지 않은 곳에서 A급 보스 몬스터의 포효가 들려왔다.
사사사삭!
그리고 침입자를 감지한 스컬 스네이크가 벽면과 바닥을 타고 물밀 듯이 밀려온다.
“맡길게.”
서진은 땅을 박차고 잔챙이들을 패스하며 지나갔다.
지금부터 서진을 방해하는 스컬 스네이크들은 설하윤과 성가을의 몫이다.
그래도 워낙 수가 많아 서진에게 날아드는 놈들이 존재했다.
퍼석!
서진은 가볍게 검을 휘둘러 처리하고 빠르게 나아갔다.
던전이 생각보다 짧아서 몇 번의 도약 끝에 금세 스컬 아나콘다에게 닿을 수 있었다.
[근력이 2 상승합니다]
[민첩이 3 상승합니다]
[체력이 1 상승합니다]
[마력이 3 상승합니다]
A급 보스몬스터답게 진한 투기를 잔뜩 발산하고 있었다.
쿠구구구.
굵직한 뼈마디가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나며 놈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키이이익!”
소름 돋는 소리와 함께 스컬 아나콘다의 입에서 보라색 독이 쏘아졌다.
치익.
지면에 닿자마자 움푹 팰 정도의 극독.
하지만 행동 패턴을 훤히 꿰고 있던 서진은 반대 방향으로 피했다.
‘이계에서 활동하던 놈들보다 좀 느린 것 같은데.’
물론 독은 조심해야겠지만.
헌터용 방독면을 착용했어도 A급 몬스터의 독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옳다.
스컬 아나콘다는 이번에 가스 형태의 독을 뿜어냈다.
탁!
독가스는 빠르게 서진을 덮쳐왔다.
‘점멸.’
서진은 옆 방향으로 탈출한 뒤에 꼬리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날카로운 꼬리 칼날이 서진을 내려쳤다.
콰앙!
한 뼘 차이로 피해낸 서진은 몸통으로 파고들었다.
스컬 아나콘다의 약점은 머리뼈부터 세어서 일곱 번째에 있는 척추다.
수만 개의 굵직하고 단단한 뼈로 이어져 있지만 정확하게 약점을 타격하면 비교적 빠르게 숨통을 끊을 수 있다.
문제는 스컬 아나콘다는 시도 때도 없이 극독을 내뿜기에 접근이 쉽지 않다.
원거리로 공격하려 해도 움직임이 잽싸기에 조준도 어렵다.
이것도 약점을 안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다.
만약 모른다면 공략하는 팀 전체가 사망할 정도로 까다로운 녀석이다.
‘그래도 이 정도로 정확하게 알면 해내야지.’
서진은 찰나의 순간, 약점인 척추를 포착하고 뇌격포를 방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