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들어갈수록 망치질 소리가 더욱 크게 귀에 꽂힌다.
공방의 내부는 상당히 커서 1부터 10구역으로 나뉘어 있을 정도.
서진의 목적지는 공방의 최고 책임자, 강주표 명장이 있는 10구역이다.
낮은 번호대 구역을 지나쳐 10구역에 도달하자 마침 한 명이 장갑을 벗고 쉬고 있었다.
서진은 그 젊어 보이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어, 아!”
남자는 서진을 보고 의아해하다가 확신으로 바뀌며 인사했다.
“누구신가 했더니, 한서진 후계자님 맞으시죠?”
“네.”
“반갑습니다. 저는 강주표 야장의 제자인 이태현이라고 합니다. 오늘 무구예식 때문에 온다는 말 들었어요. 이쪽으로 오시죠!”
이태현은 활발한 몸짓으로 서진을 안내했다.
10구역 내의 소규모 작업장들을 지나치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거의 끝에 닿았을 때 이태현이 누군가에게 다가가며 외쳤다.
“스승님!”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고개를 들어 이태현과 서진을 쳐다봤다.
“아, 김비서가 말했던 도련님이구만.”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서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손을 줘보시오.”
서진은 선뜻 손을 내밀었다.
그는 손을 보며 이리저리 살펴보다 시선을 거뒀다.
“검을 다시 잡은 지 얼마 안 된 손이군.”
그 말에 이태현이 강주표에게 작게 말했다.
“스승님 이분이 그 얼마 전에 깨어난...”
“아아, 그렇구만. 미안하네. 늙으니 기억이 오락가락해서.”
“아닙니다.”
“어쨌거나 검을 잘 쓰진 못할 것 같은데 혹시 좀 보여줄 수 있나?”
이태현은 서진의 눈치를 살피며 스승님에게 말했다.
“스승님! 저분 엄청 실력이 좋습니다. 어제는 A급 던전에서 스컬 아나콘다를 잡았다고 했어요.”
“으잉? 레벨이 몇인가?”
서진은 차분히 답했다.
“이제 5레벨입니다.”
“허어, 스컬 아나콘다 뼈는 엄청 단단한데 잘도 죽였구만.”
“의심은 안 하시는 겁니까.”
“여까지 와서 거짓말이나 할 놈으론 안 보이니까.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강주표는 이태현에게 검 받침대를 가져오라 말했다.
“검을 만들어주기로 한 이상 개인적으로 한번 봐야겠네. 검을 여기 놓을 테니 한 번에 잘라보시게.”
서진은 항상 써오던 검을 뽑았다.
“잠깐만!”
검기를 불어넣으려는 순간, 강주표가 소리쳤다.
“검 상태가 그게 뭔가.”
“스컬 아나콘다 공격을 몇 번 막고 독에 좀 노출돼서 그럴 겁니다.”
강주표가 보기엔 서진의 검은 몽둥이 수준이었다.
“허 참, 그런 검으로 여태껏 잘도 살아남았군. 혹시 그거 소중한 검인가?”
종종 그런 헌터들이 있다.
무기에 상당한 애착을 갖고 쓰는 경우.
하지만 그런 헌터는 관리를 광적으로 잘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역시나 한서진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닙니다.”
“그럼 이리 주게.”
강주표는 검을 받고 구석에 있는 폐기함에 던졌다.
그리고 어딘가로 향한 강주표는 검 한 자루를 들고 와 서진에게 주었다.
“그냥 주는 거니 마음껏 쓰게.”
서진은 검을 받고 설명 창을 확인했다.
[이름 없는 검]
-등급 : 고급
-내구도 : 160/160
-마나 전달률 : 76%
-효과 : -
*제작자 : 강주표 명장
그냥 받기엔 품질이 꽤 좋은 검이었다.
서진이 썼던 일반 검보다 한 등급 높다.
하지만 강주표는 서진의 생각과 반대의 말을 덧붙였다.
“별로긴 해도 어차피 이번에 희귀급 검을 받을 테니 잠시만 쓰고 있게.”
“예, 잘 쓰겠습니다.”
“준비됐으니 이제 검을 잘라보지.”
서진은 매끈한 검면에 검기를 흘려보냈다.
검이 천천히 위로 들리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검 끝이 아래로 향해있었다.
받침대에 놓인 검은 절삭음조차 없이 두 동강이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서진의 세로베기는 두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다.
특히 강주표는 서진에게 눈이 고정되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대단하군. 여태까지 봐왔던 베기와는 차원이 달라.”
가뿐하게 자르는 헌터들이야 많다.
하지만 절제된듯한 아름다움은 본 적이 없었다.
살(殺)을 위한 검술이라 해도 경지에 오르면 이렇게 경외감을 주기도 한다.
‘이제 2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저런 경지가 말이 되는가.’
강주표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나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이런 헌터에게 맞는 명검을 만들어 주는 것이 대장장이로서 할 일이다.
그래도 강주표는 여전히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내가 뭐라 말할 자격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검술이군.”
“그럼 이제 통과입니까?”
“미안하지만 아직 하나 더 남았네. 이건 내 개인적인 시험이 아니라 흑룡가의 번개를 다루는 헌터라면 무조건 해야 되는 걸세.”
그러면서 강주표는 칠흑의 돌을 가져왔다.
“이건?”
서진은 이계에서 종종 봤던 거라 흠칫 놀랐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반응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이태현이 스승님을 대신해 설명을 시작했다.
“이게 뇌정석(雷晶石)이라고 하는데요. 돌처럼 보이지만 성질은 금속과 유사해요. 검은 돌에 뇌기를 넣으면 밝은 빛이 나는 신기한 녀석이죠.”
그리고 강주표가 이어받아 말했다.
“자네가 할 일은 간단해. 뇌기를 여기에 흘려보내서 뇌정석을 빛내게 하는 거야. 다만 명심할 것은 어설픈 뇌기는 뇌정석이 삼켜버린다네.”
역시나 특징도 서진이 알던 것과 같았다.
하지만 혹시나 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다른 특징도 있습니까?”
“빛이 많이 나올수록 검을 제작할 때 들어가는 뇌정석의 비율이 높아지네. 이게 뇌기 사용자에게 좋긴 한데 역량에 맞지 않게 비율이 과해버리면 오히려 안 좋은 물질이지.”
“그렇군요.”
서진도 이계에서 뇌정석으로 만든 검을 쓴 적은 없었기에 호기심이 돋았다.
“약을 먹고 해도 됩니까.”
“음? 무슨 약? 강제로 펌핑해봤자 이 테스트는 재능의 영역이라 크게 효과는 없을 텐데.”
서진이 설명을 하려는 순간, 이태현이 먼저 나섰다.
이태현은 강주표에게 속삭이며 마광병에 대해 알려주었다.
“내가 실례했군.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그럼 상관은 없네만 무리하진 말게.”
서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약을 하나 입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약이 어느새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조만간 다시 사야겠군.’
서진은 약효가 퍼지는 걸 느끼며 뇌정석에 손을 얹었다.
이미 알고 있는 돌이라 구조 파악은 필요 없었다.
서진은 바로 뇌기를 집어넣었다.
파직!
손이 닿은 부분부터 강렬한 빛이 뇌정석에서 터져 나왔다.
옆에 지켜보던 이태현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경탄했다.
“이런 거 처음 봐요.”
아직 놀라긴 이르다.
서진의 손에서 흘러나온 뇌기는 칠흑의 영역을 점점 지워나갔다.
이윽고 뇌기가 뇌정석을 가득 채우자 찬란한 빛을 사방으로 내뿜었다.
파지지직!
주변의 야장들도 작업을 멈추고 그 광경을 지켜보러 올 정도였다.
“우리가 알던 뇌정석이 맞는가?”
“살아생전 저렇게 빛나는 건 처음 봤어.”
“듣기론 현 가주도 4분의 3 정도만 빛났다고 그랬는데.”
“보면서도 믿기지 않구만.”
홀로 덤덤한 표정을 한 서진은 강주표에게 물었다.
“이 정도면 됩니까?”
“어, 어 충분하네.”
강주표는 혼이 빠질 정도로 쳐다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서진이 손을 떼자 뇌정석은 순식간에 빛을 잃고 칠흑을 되찾았다.
강주표는 상기된 낯빛으로 서진을 올려봤다.
“자네 정체가 뭔가. 뇌정석이 이리 빛날 수 있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네.”
“통과란 말씀이군요. 그럼 검은 언제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아니 지금 당장 시작할 걸세. 아마 길면 보름 안에 될 것 같아. 완성되면 제자 놈 시켜서 알려줄 테니.”
“알겠습니다.”
서진이 공방을 떠나고 강주표는 뇌정석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다음 가주는 둘째가 될 줄 알았는데 모르게 되어버렸어.”
이태현은 스승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방금 이 정도면 한서진 님이 무조건 가주가 될 것 같은데요.”
“뇌정석으로 그게 판단이 되면 싸울 필요가 있겠냐. 죄다 모여서 뇌정석 만지고 가주 결정해버리지.”
“하긴 그렇네요. 근데 그래도 흑룡가 최초 아니, 세계 최초 수준 아니에요?”
“맞아. 그래서 모르겠다고 한 거다. 둘째 놈도 만만치 않거든.”
“전에 왔을 때 뇌정석 별로 안 빛났었는데요. 50%였나.”
강주표는 제자의 머리를 툭 쳤다.
“이놈아 그것도 못한 건 아니다. 그리고 둘째는 검술뿐만 아니라 마법도 쓰니 쉽진 않을 거다.”
이태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스승을 흘겨봤다.
“스승님. 혹시 둘째 도련님 지지하세요? 은근히 두둔하는 것 같은...”
“공방에서 야금질 하는 놈이 줄 타봤자 뭐 한다고. 이놈아 헛소리할 시간 있으면 얼른 검 만들 준비해!”
“예에.”
**
우우웅.
호텔 침대에서 잠을 자던 8레벨 헌터 이차경.
그는 아침부터 걸려온 전화에 짜증이 치밀었다.
“씹, 누구야.”
힘겹게 눈을 뜨고 발신자를 보니 흑룡가 애송이의 비서였다.
이차경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돈은 안 주고 아침부터 전화질이야.”
어제 공략이 끝나고 오후에 입금될 줄 알았던 성공보수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 타이밍에 전화라. 무슨 말하는지 들어보지.”
전화를 수락하자 한재열 비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이차경 헌터님. 비서 김규일입니다.
“그래, 성공 보수는 언제 들어오냐.”
-예, 안 그래도 그걸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던전 경쟁에서 저희가 졌기 때문에 성공보수는 못 드리게 되었습니다.
“뭐? 지다니?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거 맞냐?”
-예, 맞습니다.
“지랄, B급 던전을 12분으로 클리어했는데 지는 게 말이 되냐.”
-한서진 측이 A급 던전을 9분으로 끝내서 지게 됐습니다.
이차경은 다시 한번 귀를 의심했다.
“만약 내가 따로 확인했는데 구라치는 거면 직접 가서 뒤엎어 버린다.”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고 폰을 던졌다.
냉수를 벌컥 마시고 다시 폰을 들어 연락처를 뒤졌다.
이차경은 정보가 빠른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야 한서진이 던전 경쟁에서 이겼다는데 진짜냐.]
[맞아, 그거 때문에 한재열 라인 난리 났다.]
“허, 어이가 없네.”
이차경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허망한 눈으로 천장을 응시했다.
“시발, 내 돈...”
**
서진은 공방에서 나와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한재열은 아웃됐고 동생은 있지만, 경쟁력이 너무 약해서 의미가 없다.
대전 사건은 실마리가 더 잡혀야 하는 단계.
그리고 둘째 손자, 그러니까 사촌 동생은 현재 해외에서 마법을 수련하는 중이라 들었다.
아버지 한정후가 가문에 있으니 안심하고 성장에 몰두하는 것이다.
‘마법이라.’
마법을 익히는 건 자신이 없지만 상대하는 건 이골이 났다.
이계에서 에이션트급 드래곤과 싸운 횟수는 셀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 도마뱀 아직도 잘 지내겠지?”
협곡으로 몸을 던지게 만든 에스카네.
결과적으로 귀환했지만 맞았던 분노가 사라지진 않았다.
그때 서진의 폰으로 정보건에게 연락이 왔다.
“어, 형.”
-서진아, 지금 시간 되냐.
“되지.”
-그럼 지금 당장 내가 문자로 보내준 주소로 가주라.
“무슨 일인데.”
-폭주한 헌터 한 놈이 사람 죽이면서 미쳐 날뛰고 있다. 흑룡대하고 자호대는 타 지역에 가있고 백랑대로는 상대가 안돼. 간략하게 보고 들어 보니 아마도 그게.
“마인이구나?”
-...그런 것 같아.
마인은 마광병에 걸린 헌터들의 최종 목적지였다.
“알았어. 바로 갈게.”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피해가 적어진다.
서진은 설하윤에게 연락해서 불러냈다.
어제 가신으로 삼아서 추가된 투신의 가호 효과도 확인할 겸.
서진은 땅을 힘껏 박차며 현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