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주양헌 실장은 곧장 흑룡가에 연락해 서진과 전화를 연결했다.
“안녕하세요. 비서실장인 주양헌입니다.”
-예. 무슨 일로 전화하신 겁니까. 잠시 후에 던전에 들어가야 해서 길게 못 합니다.
서진의 말에 주양헌은 인사치레를 건너뛰고 본론을 꺼냈다.
“이번 마인 사건을 보고 협회장님이 한서진 헌터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음, 글쎄요. 저는 협회장님을 뵐 이유가 없습니다. 만나서 할 얘기도 없구요.
“실은 전화로는 드리기 힘든 내용이라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협회장님에겐 다음에 기회가 되면 뵙자고 전해주세요. 시간이 없는 관계로 이만 전화를 먼저 끊겠습니다.
뚝.
“이런.”
주실장은 거절당할 거라곤 생각 못 했기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봤지만 던전에 들어갔는지 받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협회장님께 그대로 보고 드렸다.
“허, 뭐라고?”
“죄송합니다, 회장님.”
“됐어. 싫다는데 뭐 어쩌겠나.”
“허락하신다면 직접 찾아가 설득해보겠습니다.”
“아니, 그냥 내가 가지.”
“예?”
“원래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고 하지 않나. 생각해보니 내가 가는 게 낫겠어.”
협회장님이 저렇게 말할 땐 이미 마음을 굳히신 것이다.
주 실장은 뜻에 따르며 말했다.
“그럼 흑룡검가에 언제 가실 생각이십니까?”
협회장급의 인물이 흑룡검가라는 대가문에 가려면 사전협의는 필수였다.
“오늘 되나? 안되면 내일로 해보고, 하여튼 제일 빠르게 준비해.”
“예.”
**
던전 사냥을 마치고 가문으로 돌아가는 길.
설하윤은 잠시 멈춰 서서 서진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서진 님.”
“갑자기 왜요?”
“얼마 전 미래보육원에 후원해주신 것과 가신이 되며 추가된 투신의 가호 효과도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가신이 되며 추가된 효과는 설하윤의 갈증을 해소해주었다.
우선 스킬의 유지 시간과 스텟 증폭 비율이 늘어났으며 끝날 때마다 발생했던 페널티는 아예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독특한 점은 선택지가 나뉜다는 점이다.
설하윤은 전투라는 키워드를 얻은 능력이며 다른 선택지의 가능성은 아직 모른다.
가신이 늘어나서 다른 키워드를 고르면 알게 되겠지만
어쨌든 설하윤에겐 부작용 없는 사기 버프 하나가 만들어진 것이다.
“저야말로 다행입니다. 추가된 효과가 그저 그랬으면 민망했을 테니까.”
“그런 생각은 전혀 할 일 없을 겁니다.”
“참, 그리고 며칠 내로 백야에 갈 예정입니다. 꽤 많이 샀는데 금세 떨어지네요.”
서진은 약통을 만지작거리며 쓰게 웃었다.
“서진 님. 혹시 최근에 있었던 일, 신경 쓰시는 겁니까?”
“네? 아 그 사건이요?”
얼마 전의 마인 사건 때문에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은 서진도 알고 있었다,
“크게 신경 쓰진 않아요.”
서진의 관심사는 마인의 시체였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했다면 누구인지, 폭주가 된 장소가 흑룡검가의 영역인 것과 연관성이 있는지.
오늘 부검 결과가 나온다고 했으니 가문으로 돌아가면 알 수 있겠지.
**
서진은 곧장 약제원으로 향했다.
“아저씨.”
“어, 여기 앉아라.”
약제 부원주 정선이 서진을 맞이했다.
“분석해보니 어때요?”
“네 예상이 맞더구나.”
일반적으로 헌터는 죽은 뒤에 몸속의 마나가 바로 사라지진 않는다.
그것은 마인도 마찬가지였다.
“시체에 남아있는 잔여 마나를 뽑아서 분석해 봤는데 너무나 불안정하더구나. 마약류를 투여했을 때 나타나는 마나 패턴과 많이 유사했다. 이건 육체 내부에서 자연적으로 폭주한 게 아니야.”
“역시 그렇군요.”
“누군가 강제로 폭주시켰거나 혹은 아이템 때문일지도 모르지. 영약으로 알려진 것이 잘못 섭취했을 때 독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럼 어떤 구체적인 이유로 폭주한 건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은 거군요.”
“그런 거지.”
하지만 서진은 내심 강제일 거라 확신했다.
흑룡가 근처에서 벌어졌다는 점과 그 후 마광병에 대한 여론까지.
이것이 모두 우연일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 누군가 부검실에 들어왔다.
“첫째 도련님, 오랜만이에요.”
돌아보니 약제원주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예. 약제원주는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저야 당연히 잘 지내고 있죠.”
약제원주 이성경은 이전부터 한정후 측 인물이었기에 서진과의 사이는 썩 좋지 않았다.
“그나저나 대단하시네요 도련님. 부검으로 어렵사리 밝혀낸 걸 현장에서 바로 직감하시다니.”
이성경은 언제나 미소 뒤에 속마음을 숨기고 다니는 인물이었기에 서진은 아무렇게나 대꾸했다.
“약제원주에 비해선 한참 부족하죠.”
“어머, 그렇게 안 띄워주셔도 돼요.”
그녀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약제원에서 추가 분석까지 최대한 빠르게 마쳐서 알려드릴게요.”
“그럴 필요까진 없습니다.”
폭주 원인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엔 이미 충분했다.
그리고 어차피 일하는 건 약제원주가 아니라 부원주 정선과 아랫 직원들이니까.
“역시 첫째 도련님은 배려심도 넘치시네요. 그래서 괜히 걱정이 되는데 마광병은 요즘 어떠세요?”
“그냥 견딜만합니다.”
“그러시구나. 사실 제가 그동안 약제원주로서 가문의 장손께 너무 소홀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선물을 가져왔어요.”
약제원주는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금색 천으로 포장된 얇은 상자를 서진에게 내밀었다.
“항마제예요. RS4라서 효과는 보장해요. 부디 유용하게 쓰셨으면 좋겠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이네요. 고맙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갈게요. 다음에 봬요 도련님.”
약제원장은 살포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나갔다.
정선은 닫힌 문을 바라보며 신기한 듯 말했다.
“저 인간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저러지.”
“뭐, 신선하긴 하네요.”
약제원주가 항상 웃는 낯이긴 해도 오늘은 조금 더 살가운 느낌이었다.
정선은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간 보는 거 아니야? 넌 알지 모르겠는데 가문 내에서 너를 언급하는 사람도 굉장히 많아졌거든.”
“고작 그 정도로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네 인지도가 높아진 건 사실인데 약제원주가 선물을 주는 건 리스크를 감수하는 짓이거든.”
약제원주로서 흑룡가의 직계를 챙겨준다는 명분은 그럴듯하다.
하지만 한정후와 한서진의 차가운 관계를 생각한다면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줄 순 없었다.
정선은 가문 내 정치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둘 사이가 틀어졌나?”
“그럴 리가 있겠어요. 별다른 소식도 없었는데.”
그간 약제원주에 대해선 비교적 관심이 소홀했지만 한정후와 이성경 사이에 틈이 생겼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물론 둘 다 축출하고 정선 아저씨를 약제원주에 앉히는 게 제일 깔끔하겠지만.
“서진아, 선물 그거 어서 뜯어봐라.”
정선은 그새 궁금함을 못 참고 재촉했다.
포장을 벗겨내자 RS4라는 글자가 보였다.
“정말 비싼 거 맞네.”
“제가 지금 먹고 있는 게 RS3인데 숫자가 더 높군요.”
“그거 한 통에 1억짜리야.”
“그래요?”
“서진아, 근데 그 약 먹을 거냐.”
“글쎄요. 고민이 되네요.”
“아무래도 그렇긴 하지.”
약을 준 사람이 한정후 라인이라서 꺼림칙할 수밖에 없다.
대놓고 이런 수작을 부리리라 생각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믿고 복용하기엔 망설여진다.
“내가 한번 성분 분석해 볼까.”
“됐어요. 약제원장이 이런 저급한 수를 쓰는 성격은 아니니까.”
“약제원장은 그렇다고 쳐도 중간에 다른 놈이 수작질해놨을지도 모르는 거 아니냐.”
정선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이래서 약은 믿을만한 사람에게 사는 것이 중요했다.
버리자니 아깝고 먹자니 불안하고.
정선은 그런 서진의 망설임에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며칠 전에 새로 들여온 기계가 하나 있는데 그걸로 분석하면 약 부술 필요도 없어.”
“그걸 진작 말해야죠.”
서진은 허탈하게 웃으며 약을 넘겼다.
**
다음 날, 서진은 황당한 얼굴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제 거절했더니 하루 지나서 바로 협회장 본인이 올 줄이야.
“반갑네, 한서진 팀장. 뭐라 불러야 할지 몰라서 흑룡가 내원당에 물어봤더니 일단 팀이 창설된 상태라더군.”
“그렇긴 합니다.”
직계가 후계자로 인정받게 되면 세력 형성을 원활히 하기 위해 특수 목적의 팀이 창설된다.
물론 형식상의 팀이기에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많이 없지만.
“일단 앉아서 얘기하시죠.”
“그러지.”
협회장은 앞에 있는 커피잔을 들며 얘기를 꺼냈다.
“얼마 전에 한 팀장이 6레벨급의 마인을 처치한 일,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네. 나는 그 나이 때 상상만 하던 일이었거든.”
“감사합니다.”
“문제는 그 사건의 불씨가 엄한 곳에서 커져서 난리였지. 한 팀장은 어떻게 생각하나.”
“그 사람들의 주장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쉽지만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
“너무나 태평하군. 그러다 헌터를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면 어쩌려고 그러나.”
“그건 10레벨인 협회장님이 더 잘 아실 겁니다.”
아무리 지엄한 법이라 해도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는 의미가 없어진다.
특히 10레벨 헌터는 존재만으로 억지력을 갖게 하는 국가의 상징이다.
협회장도 체면을 위해 불법화되는 걸 막고 있을 뿐.
법안이 통과되어도 마음만 먹으면 손녀를 던전에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야 그렇다 쳐도 자네는 아직 5레벨이지 않나.”
“제 걱정은 안 해주셔도 됩니다.”
“후우.”
협회장은 오랜만에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 앞에서 이렇게 받아치는 젊은 놈을 처음 봐서 그런 걸까.
하지만 아직 화를 내기는 이르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한 팀장은 어떻게 그리 성장이 빠른가.”
“그걸 제가 순순히 답하리라 생각하신 건 아닐 거라 믿겠습니다.”
순간 화가 날 뻔했지만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럼 이번엔 터놓고 묻지. 한 팀장은 마광병이 아무렇지 않은가? 능력에 관해 묻는 게 아니니 대답하기 어려우면 안 해도 괜찮네.”
“당연히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마광병의 주요 증상이 마력과 연관된 만큼 그것을 잘 제어하면 조금 나을 뿐이죠.”
“재능이 대단하군.”
협회장은 눈앞의 청년이 누구보다 압도적인 재능을 지녔다는 걸 깨달았다.
스킬 하나 운 좋게 얻어서 강해진 속 빈 강정 같은 헌터가 아니었다.
그 지독한 마광병의 마력 침식을 개인 역량으로 제어하면서 이렇게 성장했다니.
같은 헌터로서 재능에 대한 질투심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손녀에 대한 걱정 앞에선 모두 자질구레한 감정일 뿐이다.
“혹시, 그 제어법을 약간이라도 알려줄 수 있겠는가? 같은 헌터로서 실례되는 질문이란 건 알고 있지만 알려준다면 그에 대한 대가는 얼마든지 지불하겠네. 돈뿐이 아니라 그 어떤 것으로도.”
협회장의 호소에 서진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보상은 매력이 있지만 문제는 가능성이었다.
자신이 도와준다고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지 확신할 수 없다.
‘용체화가 있으니 시도해볼만 하긴 한데.’
숙고를 거듭한 서진은 협회장을 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