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협회장님.”
서진이 말을 하려는 순간, 뒤에 서 있던 주양헌 실장이 대화를 끊었다.
“지금 뭐 하는 건가. 주 실장.”
협회장은 중요한 대목에서 방해한 그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주 실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가 허리를 숙이며 협회장에게 작게 말했다.
“샘플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협회장의 동공이 확대됐다.
“거짓은 아니겠지.”
“예.”
협회장은 무심코 일어서려다 서진을 보며 멈칫하고 말했다.
“이거 미안하게 됐네. 굉장히 중요한 일이 생겨서 그러니 오늘 자리는 여기서 파하는 게 어떤가.”
“상관없습니다.”
서진으로선 나쁠 것이 없었다.
승낙할 생각이었지만 기껏해야 본전이고 실패하면 손해인 제안이었으니까.
다만 주 실장이 말한 샘플이 뭐길래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손녀에 대한 대화 중에 일어난 걸 보면 아마 치료제 샘플로 예상된다.
그렇지만 서진은 회의적이었다.
현대 마력의학 수준으로 치료가 되기엔 아직 이르다.
서진도 이계에서 고룡의 은혜를 받아서 없앨 수 있었으니까.
투신으로 불리기 전 유일하게 친했던 드래곤이기도 했다.
서진은 짧았던 상념에서 벗어나 미지근하게 식은 찻잔을 들어마셨다.
‘물론 잘 되면 좋겠지만.’
**
응접실에서 나온 서진은 구현수 비서에게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바로 검이 완성되었다는 것.
마침 오늘 백야로 외출하려 했기에 가는 김에 공방에 들르기로 했다.
잠시 후, 공방 입구에 도착하자 이태현이 천으로 감싼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아! 오셨군요. 여기 완성된 검입니다.”
서진은 그 자리에서 천을 풀고 검을 뽑아 들었다.
칠흑의 검신이 드러나며 아이템 창이 나타났다.
[천검]
-등급 : 영웅
-내구도 : 1600/1600
-마나 전달율 : 200%
-효과 : 전격 마법에 대한 절대 내성.
“영웅 등급이군요.”
일반, 고급, 희귀, 영웅, 전설로 나누어져 있으니 상당히 높은 등급이었다.
위에 신화라는 게 있다는 말은 있지만 확인된 바가 없으니 사실상 두 번째 등급이다.
마나를 가볍게 흘리자 주입량보다 2배 많은 마나가 검을 채웠다.
“좋은 검이네요. 그런데 강주표 명장님은?”
“아, 피곤하다며 자고 계세요.”
“그럼 잘 쓰겠다고 대신 전해주세요.”
서진은 새로 받은 검을 허리에 착용하고 공방을 나왔다.
정문 앞에는 설하윤이 차에서 대기 중이었다.
서진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그녀의 옆좌석에 앉았다.
조수석에 앉으니 새삼 그녀의 마스크가 부각되어 보였다.
‘저 화상 문제도 언젠가 해결해야 하는데.’
서진의 시선에 설하윤이 고개를 틀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뇨, 출발합시다.”
부드럽게 나아간 차는 1시간 후 백야의 초입에 들어섰다.
“여긴 언제나 사람이 많군요.”
바깥 사회보다 가능한 것들이 많은 백야라는 대도시에 사람이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
한약방에 도착한 서진은 늘 그랬듯 슬라임의 안내를 받아 엘리베이터에 탔다.
하지만 오늘은 도착 층수가 달라졌다.
평소엔 지하 3층이었는데 안내판에 나타난 숫자는 지하 5층.
한약방에 처음 왔을 때 한번 갔던 곳이었다.
‘그렇다는 건.’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나 최이린 약화련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
“예, 오랜만에 직접 뵙네요.”
“오늘은 할 말이 있거든.”
최이린은 탁자 앞에 항마제 2통을 올려놓았다.
“약을 사러 온 거겠지만 지금 이것밖에 없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최이린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말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항마제는 외국에서 생산된 걸 국내에 밀반입해서 팔고 있어.”
“그렇죠.”
여기서 재밌는 건 밀반입과 판매 행위는 불법이지만 복용하는 건 불법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지만 한약방은 백야에 있기에 공권력이 건들지 못할 뿐이다.
즉 어떻게든 밀반입만 성공하면 되는 것이다.
최이린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약화련은 각지에 약제창고가 있고 거길 거쳐서 한약방으로 오는 거야.”
“그럼 운반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겁니까.”
“아니, 창고가 습격당했어. 안에 있던 재료와 약들이 전부 날아갔지.”
“경비는 없었습니까.”
“날 뭘로 보고. 당연히 있었지. 다만 습격한 놈들이 강했을 뿐이야.”
“누군지도 아직 모르겠군요.”
“정보원은 풀어봤지만 놈들이 은폐가 특기인지 쉽지가 않네.”
“경비 헌터들의 레벨은요?”
“평균 4레벨.”
서진은 작게 한숨 쉬었다.
최이린은 한숨에 담긴 뜻을 눈치채고 말했다.
“경비는 말 그대로 경비일 뿐이야. 결계 마법으로 은폐하는 것이 메인이지.”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상시 경비 인원을 고레벨 헌터로 편성하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니까.
거기다 약화련은 무력 집단도 아니었으니 4레벨 정도면 최선이라 봐야 했다.
“그래서 현재 수급량에 치명적인 피해를 본 상황이야.”
“남은 물량은 없습니까.”
“아직 창고 하나 남아있어. 그래서 말인데 물건을 운반할 때 네가 같이 가줄 수 있겠니?”
“약화련에도 헌터가 있을 텐데요.”
“말했잖아. 약화련 애들로는 무리였다고. 현재 상황에 용병을 고용하자니 믿을 수가 없고.”
“그렇군요.”
그동안 멀쩡하던 창고가 털렸으니 내부자도 의심스러울 텐데 외인을 끌어들이기 꺼림칙할 만했다.
“그러니 내 입장에선 너희 둘이 제일 좋은 거지. 그쪽 아가씨는 6레벨이고, 너도 실제론 그 이상은 되는 것 같으니까. 믿을만한 6레벨 급 헌터 두 명이니 다른 선택지보다 훨씬 낫지. 안 그래?”
“사정은 알겠습니다. 그럼.”
“보상 말이지? 기다려봐 미리 보여줄게.”
최이린은 뒤편에 있는 방에 들어가 작은 목함 하나를 갖고 나왔다.
“한번 볼래?”
뚜껑을 열자 청량한 향이 퍼져 나와 서진의 코를 자극했다.
설하윤은 보자마자 약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대환단이군요.”
“어, 바로 알아보네. 본 적 있니?”
“아니요, 숱하게 들었던 특징과 똑같아서 그렇습니다.”
“맞아, 대환단이야.”
소림사만의 절세의 영약이었지만 최근 들어서 그 위용이 조금 떨어진 상황이었다.
효능이 이전보다 계속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영약 컬렉터들이 항상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계속 아껴왔던 건데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네.”
“아까우신가요?”
“조금? 그래도 나에겐 당장 필요도 없는 영약보다 약제 창고 재구축이 훨씬 중요하고 시급해.”
최이린은 목함을 닫으며 서진을 바라봤다.
“이걸 먹으면 네 병의 진행도도 큰 폭으로 낮아질 거야. 그쪽으로 유명한 영약이니까.”
“서진 님.”
설하윤은 꼭 해야 된다는 눈빛을 보냈다.
“이 정도면 괜찮은 보상이겠지?”
“충분합니다.”
“좋아. 그럼 잘 부탁할게. 그리고 이건 서비스.”
최이린은 탁자에 놓은 약을 서진에게 건넸다.
**
서진은 약화련의 운반팀을 따라서 창고로 향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나무와 풀이 가득한 산속이었다.
하지만 직원이 열쇠를 꺼내 허공에 찔러넣고 돌리자 풍경이 달라지며 창고가 드러났다.
설하윤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과연 이런 식으로 결계를 관리하는군요.”
결계를 만든 당사자가 아닌 타인이 여닫을 수 있게 만들다니.
약화련주의 결계 마법이 상당한 수준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인원이 모두 결계의 경계선 안에 들어가자 다시 풍경이 바뀌며 닫혔다.
운반팀은 창고에 있는 물품들을 차에 싣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가 뉘엿 저물어갈 때쯤,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다시 결계를 나가기 위해 직원이 열쇠로 해제를 한 순간, 비명이 들렸다.
“으아악!”
그리고 개방된 입구를 통해 복면인들이 이제 막 출발하려는 차를 향해 공격했다.
근처에 있던 설하윤은 총 7명의 공격을 전부 막아냈다.
그것을 본 서진도 차량 쪽으로 가려다 발걸음을 멈췄다.
뒤늦게 나타난 이질적인 기운의 남자.
서진은 그와 대치하며 거리를 유지했다.
“이렇게 마주칠 줄이야.”
거칠고 쉰 목소리의 남성은 서진을 보고 웃음을 흘렸다.
그에 서진의 입가가 비틀렸다.
“너구나, 던전을 터트렸던 2명 중의 1명이.”
“이미 알고 있었나.”
“실루엣만 본 게 전부지만. 방금 네가 자백한 거나 마찬가지였어.”
“그 편이 죽이기 전에 더 재밌을 테니까.”
“나야 고맙지. 이제 지긋지긋하니까 좀 끝내자.”
흑룡검술 제1식 섬아.
서진이 만들어낸 늑대 형상의 번개가 체이서를 덮쳤다.
콰악!
하지만 체이서가 있던 자리엔 흙먼지만 가득 피어 올라왔다.
소리 없이 피한 체이서에게 두 번째 번개가 엄습했다.
‘어떤 공격을 해올까.’
서진은 검을 휘두르면서도 체이서의 작은 움직임 하나 놓치지 않았다.
연이어 전격을 피하던 체이서의 검에서 흑색 연기가 흘러나왔다.
‘저건 뭐지. 낌새가 안 좋아.’
서진은 생각과 동시에 점멸을 사용했다.
파박!
그러자 서진이 있던 바닥에 단검 세 자루가 깊게 박혔다.
‘위험할 뻔했지만.’
재밌다.
서진은 오랜만에 느끼는 전투의 스릴에 피가 끓었다.
[근력이 5 상승합니다]
[마력이 4 상승합니다]
[지력이 5 상승합니다]
스텟이 올라가는 것은 부수적인 즐거움이었다.
쐐액.
체이서는 조금 전 움직임은 맛보기라는 듯 태세가 변했다.
흑색 연기가 몸을 휘감자 공격이 한층 더 빨라진다.
체이서는 서진의 번개 폭격을 뚫고 지근거리까지 접근했다.
서진은 옆구리를 노리는 단검을 정면으로 쳐냈다.
그러자 검신을 타고 둔중한 감각이 손에 전해진다.
‘생각보다 힘이 강하군.’
더욱 상대할 재미가 있는 녀석이다.
좁은 길목을 통과하는 물살과 같은 검격이 체이서에게 쏟아졌다.
카앙! 캉!
처음엔 호기롭게 받아쳤으나 이내 무언가 잘못됨을 느꼈다.
서진은 멀쩡한 반면 체이서의 몸에는 얕은 상처들이 점점 쌓이고 있었다.
‘검술로는 안돼.’
단검술에 상당한 자신이 있었던 체이서는 자존심을 접고 스킬을 꺼냈다.
‘블랙 아웃.’
전장이라는 무대에서 암전 되듯 체이서의 모습이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대상을 잃고 허공을 베는 서진의 검.
체이서는 뒤로 돌아가 그의 목을 노렸다.
쐐액!
단검이 목을 향해 쇄도하는 순간, 서진의 전광검이 펼쳐졌다.
느려진 시간의 흐름 속을 유영하던 뇌검은 일직선으로 체이서를 베었다.
촤아악!
하지만 찰나의 순간, 체이서는 상체를 틀어 급소를 피해냈다.
대신 어깻죽지가 깊숙이 베였지만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아깝네.”
서진은 웃으며 검을 늘어트렸다가 고개를 휙휙 저었다.
죽이지 말고 생포해야 한다.
전투의 흥분에 매몰되어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다.
‘큭.’
체이서는 현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분명 목을 공격하던 건 자신이었는데 어느 순간 상황이 역전되어 역으로 죽을뻔했다.
“안 와? 그럼 내가 가지.”
서진은 점멸로 체이서의 후방을 점했다.
파지지직!
자줏빛 검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다리를 베기 직전, 체이서는 한 끗 차이로 피하고 모습을 숨겼다.
서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우측 하단을 향해 번개를 방출했다.
“크악!”
미처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체이서는 고통을 토해냈다.
어떻게 알아챈 거지.
아까 한서진의 이상한 기술과 다르게 이번엔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냈다.
서진은 그에 대한 답을 해주었다.
“피 냄새가 나거든.”
이계에서 마법 때문에 시각이 차단당하면 다른 감각으로 싸웠던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때 제일 도움 되는 것이 청각과 후각.
그리고 후각 중에서는 피 냄새가 제일이었다.
서진은 기동성을 상실한 체이서에게 다가가 발목을 절단했다.
“아악!”
체이서는 바로 입을 벌렸다.
차라리 혀를 깨물 속셈이었다.
서진은 즉시 뒤통수를 쳐서 그를 기절시켰다.
“어딜 멋대로 죽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