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서진은 생포한 체이서를 가문의 감찰각으로 넘겼다.
“감찰각주. 이놈이 알고 있는 정보를 듣고 싶은데 가능하죠?”
“물론입니다. 그리고 말씀은 낮춰주십쇼.”
감찰각은 기본적으로 엄격한 상명하복을 원칙으로 움직이는 조직이다.
그러니 가문의 후계자가 말을 놓는 편이 감찰각주 입장에서 훨씬 마음이 편했다.
“그러지.”
서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려다 다시 등을 돌리며 말했다.
“던전 브레이크 때 같이 있던 동료, 팀의 정체, 그리고 다른 놈들도 있는지, 추가로 마인 건과의 관계성 등을 중점으로 파악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날 헬기에 내가 있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도 반드시 알아내고.”
“예.”
감찰각을 나오자 설하윤이 서진을 찾아왔다.
“서진 님. 다녀왔습니다.”
“수고했어요.”
서진은 습격자들을 제압하고 나서 설하윤을 한약방으로 보냈다.
자신이 가문에 가는 대신 한약방에 일이 끝났다는 보고와 함께 보상을 수령해야 하니까.
“그리고 여기 받아온 대환단입니다.”
설하윤은 서진에게 목함을 내밀며 말했다.
“지금 드실겁니까?”
“그래야죠. 옆에서 호위 좀 서줄래요?”
“물론입니다.”
서진은 설하윤과 함께 자택에 들어가 2층의 방으로 향했다.
“후우.”
처음 영약을 먹으려니 묘한 긴장감이 올라온다.
바닥에 가부좌하고 앉아 목함을 열자 기분 좋은 향내가 방안에 퍼져나간다.
누런색 종이 위에 올려진 대환단이 서진의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간 구매했던 항마제 가격을 전부 합쳐도 이걸 살 수 있을지 없을지 미지수다.
심지어 돈만 있다고 될 게 아니라 운과 인연이 겹쳐야 구할 수 있는 영약.
서진은 마음을 차분히 다스리고 영약을 감싸여 있는 종이 채로 목함에서 꺼냈다.
현재 서진의 마광병 진행도는 34.4%.
어느새 1/3을 넘어서 있었다.
아직 5레벨이고 갈 길이 더 멀다는 것을 고려하면 빠른 속도였다.
‘역시 만만치 않군.’
하지만 눈앞에 있는 대환단이라면 속도를 훨씬 늦출 수 있을 것이다.
관건은 얼마나 효과를 볼 수 있을지.
서진은 크게 심호흡하고 보석 다루듯 약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에 넣고 눈을 감았다.
‘으음.’
입속에서 대환단이 으깨지며 훨씬 강렬한 향이 터져 나왔다.
거친 입자까지 씹어 삼키자 신체가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심장이 급격히 박동하는 것이 느껴진다.
“흐읍.”
입에서 바스러져 내려간 대환단이 마나 경로를 가장 먼저 건드렸다.
영약의 약효가 본격적으로 서진의 몸속을 휘젓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서진은 용체화를 발동해 체내 마나를 빠르게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약효는 몸속 구석구석 뻗어 나가 마력에 침식된 육체를 정화해 나갔다.
청량한 감각이 전신을 가득 채우며 몸을 가볍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마나를 움직이는 힘인 마력은 마나의 그릇 역할도 하고 있는데 그릇은 단전 아니면 심장에 위치한다.
단전에 그릇을 두고 있는 서진은 순환 중인 마나를 단전으로 모았다.
현재 가장 많이 침식이 진행된 곳.
마나를 타고 약효가 단전으로 집중되었다.
“쿨럭.”
정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입에서 탁한 피가 울컥 나왔다.
한번 피를 쏟으니 혼미했던 정신이 맑아진다.
“후우.”
서진은 단전까지 안정화를 마치고 눈을 뜨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신체가 정화되었습니다]
[마광병 진행도가 1.5%로 낮아졌습니다]
됐다.
무려 30%를 초과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서진 님.”
옆에서 설하윤이 조심스레 서진을 바라봤다.
“잘 되신 겁니까?”
“네. 1.5%라네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설하윤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영약을 얻을 기회가 있다면 무조건 얻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그로부터 닷새가 지나고, 감찰각주가 서진을 찾아왔다.
“말씀하셨던 정보를 전부 알아냈습니다.”
서진은 얼른 말하라는 듯이 고개만 끄덕였다.
“본명은 장민. 34살의 중국인입니다. 유니온 소속의 골드급 멤버이며 체이서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국 적륜성(赤崙城) 성주의 세 번째 서자입니다.”
“적륜성이면.”
“예, 중국에서 10대 헌터 가문 중 하나로 인정받는 곳입니다.”
“적륜성주의 아들이 왜 한국에 있지?”
“알아본 결과, 후계 순위에서 밀려 아예 중국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 후에 유니온에 들어간 건가?”
“그렇습니다.”
감찰각주는 손에 든 서류를 한 장 넘기며 말을 이었다.
“함께 활동하는 동료는 케린이라는 여자인데 장민도 그녀에 대해 자세한 정보는 모른다고 합니다.”
“던전 브레이크 건은?”
“주동자는 카렌이며 오로지 한서진 도련님을 노리고 벌인 일이라고 합니다. 마인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정도면 다른 의미로 참 지극정성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되기도 했다.
자신의 성장은 그들에게 돌연변이로 보였을 테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충격적인 정보를 얻었습니다.”
감찰각주가 충격적이라 할 정도라니.
“뭡니까.”
“서진 님이 소회합에 참가하기 위해 탑승했던 헬기 정보와 경로를 제공했던 사람은 집법회의 정두진 장로입니다.”
“하.”
서진은 이름을 듣자마자 헛웃음을 냈다.
집법회는 가문의 원로들이 규율과 대소사를 논하는 곳이다.
헌터로서 역할은 끝났지만, 과거의 공을 인정받은 공신만이 들어갈 수 있는 모임.
그렇기에 누구보다 파벌에 민감한 곳이기도 하다.
후계자 줄을 잘못 서면 장로의 자리에서 내려와 흑룡가를 떠나야 하니까.
특히 정두진 장로는 과거부터 한서진을 싫어하며 둘째에게 충성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확실한 건가?”
잘못된 정보로 섣불리 집법회의 장로를 건드렸다간 역풍이 만만치 않다.
서로 결집력도 강한 데다 가문의 공신이라 가주도 함부로 대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제 스킬로 직접 확인한 정보입니다.”
“그럼 확실하겠군.”
감찰각주의 스킬은 취조에 특화되어 있다.
정신력이 일정 수치 이하로 내려간 대상에게 진실만을 토해내게 하는 능력.
“현재 그는 어디에 있지?”
“지금쯤 정두진 장로는 감찰각 조사실에 끌려갔을 겁니다.”
**
즉시 감찰각으로 향한 서진은 조사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서진!”
아직 조사가 시작되지 않아 정두진은 기운이 퍽 살아있었다.
그는 책상을 거칠게 내려치며 서진을 노려보았다.
“여기서 보니 반갑군.”
정두진은 건방진 한서진의 태도에 눈썹이 꿈틀거렸다.
“감히 장로에게 반말을 하는 것이냐.”
“장로고 나발이고 간자에게 존댓말 할 생각은 없는데.”
“뚫린 입이라고 말을 막 하는구나. 내가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줄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라 말해주마.”
정두진은 눈을 부릅뜨며 서진을 노려봤다.
“감찰각주가 밝힌 정보인데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허, 감찰각주의 능력이라 해도 결국 조작의 여지가 있는 것 아니냐. 거짓 자백을 하게 만드는 거야 감찰각에선 식은 죽 먹기일 테니.”
정두산은 조사실에 있으면서도 전혀 위축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자신감을 표출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감찰각주가 스킬을 발동하면 상대의 눈이 붉어지는 반응을 보이지만 그것마저 조작의 여지가 있으니까.
억지긴 해도 세력을 등에 업고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면 안 될 것도 없다.
“내가 여기서 나가는 순간, 한서진 너는 각오해야 할 거다.”
정두진은 한서진의 후계자 자격 박탈에 대한 안건을 집법회에서 꺼낼 생각이었다.
회의에서 찬성이 과반을 넘어 통과된다면 규율에 따라 가주와 협의를 시작한다.
‘이 기회에 한서진을 쳐내야겠어.’
그동안은 반대파 때문에 타이밍을 살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밀고 나가야 한다.
협의 내용을 한서진에게 통보하고 내용에 적힌 기간 내에 이행하지 못하면 후계자 박탈이 된다.
흑룡검가가 세워진 이후 후계자를 집법회가 박탈시킨 전례가 두 번 있었다.
‘아마 기억하기론.’
특정 상위 던전을 혼자 공략해야 하거나 세계적인 블랙 헌터를 잡는 것이 조건이었다.
‘둘 다 상당히 어려운 것이지.’
어떤 조건을 한서진에게 주어야 할까.
박탈되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는 걸 생각하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두진은 혐의를 못 벗을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증거는 자백 하나뿐이고 앞서 말했듯 조작으로 몰고 갈 힘도 있다.
그리고 자택을 수색해봤자 증거물은 찾지 못할 것이다.
‘지금쯤 한정후 집법회주에게 소식이 전해졌겠지.’
정두진은 회주 다음으로 영향력이 큰 자신을 이깟 일로 포기하지 않으리라 믿었다.
서진은 호언장담하는 그를 보며 말했다.
“어떻게 될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얌전히 물러나는 듯한 서진의 뉘앙스에 정두진은 크게 웃었다.
“하하, 서진아 네가 최근에 조금 강해졌다곤 하지만 가문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나이를 먹고 연륜이 쌓이면 알게 될 거다. 세상은 힘만으론 되지 않는다는 걸.”
“아니지.”
“뭐?”
서진은 방금의 저 말만큼은 동의할 수 없었다.
“힘만으론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결국 힘이 약하기 때문이야.”
자신이 결국 소멸의 협곡에서 떨어진 이유도 약했기 때문이다.
7성주를 동시에 상대하고도 남을 만큼 강했다면 벼랑까지 몰릴 일도 없었다.
지구로 돌아와 다시 기회를 얻은 이상 전보다 더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아직 어딘가에 살아있을 놈들을 찾아서 갚아 줘야겠지.
일순 달라진 서진의 분위기에 정두진은 기세에 눌려서 뒤로 물러났다.
정두진은 떨리는 손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지, 지금 뭐 하는 거냐. 설마 집법회의 장로에게 손을 댈 생각은 아니겠지?”
“하면 안 되나?”
서진의 반문에 정두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농담이야. 쫄지는 마시고.”
한서진은 능청스레 웃으며 조사실을 나갔다.
털썩.
정두진은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앉았다.
**
서진은 감찰각주를 다시 불렀다.
“각주, 정두진 장로와 장민이 어떤 이유로 알게 됐는지는 밝혀냈나?”
“예, 한 사람이 다리를 놔준 것 같습니다.”
“그게 누구지?”
그러자 감찰각주는 드물게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뜸 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
“죄송합니다. 그... 마도현가의 현지완 소가주입니다.”
서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개성 아래의 경기 북부에 위치한 마도현가.
한국의 3대 명가 바로 아래에 있다고 평가받는 가문이다.
그런만큼 동기야 쉽게 짐작이 되지만 덜컥 믿을 정도로 사인이 가볍지 않았다.
서진의 차갑게 내려앉은 눈빛이 감찰각주를 직시했다.
“지금 거짓말하는 건 아니겠지.”
“결코 아닙니다. 원하신다면 당시 취조 영상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영상 말고 지금 감찰각주 능력으로 다시 내 앞에서 장민 입으로 말하는 걸 듣고 싶군.”
“알겠습니다.”
서진은 감찰각주와 함께 장민이 갇혀있는 곳으로 향했다.
철컥.
철창을 열고 들어가자 장민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으어어.”
“상태가 안 좋은데 대답은 할 수 있나?”
“문제없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감찰각주는 스킬을 발동해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여 서진에게 진실을 증명했다.
비로소 서진은 확신을 가졌다.
용체화를 해서 지켜보니 이계에서 서큐버스가 원하는 대상에게 대답을 빼낼 때와 아주 흡사했다.
마치 서큐버스가 가진 능력 중 하나가 스킬이 되어 지구에 떨어진 것처럼.
“수고했어. 말이 맞았네.”
감찰각주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 소가주를 찾아가서 으슥한 곳에 데려가 패면 정두진과의 연결고리를 뱉어내겠지.”
“예? 농담이시죠?”
“글쎄.”
“도련님, 현지완 소가주는 6레벨의 전격 마법사입니다. 상당한 실력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더욱 잘 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