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물론 서진도 무작정 마도현가로 쳐들어갈 생각은 없다.
3대 가문 바로 아래에 있는 곳의 저력이 만만한 것도 아니고.
흑룡대를 끌고 간다면 할 만하겠지만 아직 그럴 단계는 아니었다.
“감찰각주.”
“예.”
“이번에 정두진 장로를 가두면서 각주의 입지도 꽤 위험해졌다는 걸 알고 있나.”
“물론 어느 정도 예상했습니다.”
“알면서도 강행한 건가. 어째서?”
“죄가 있으면 잡아넣는 게 감찰각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감찰각주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설령 이 일로 감찰각주 자리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데?”
“아쉽긴 하겠지만 후회는 안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신념으로 여태 잘도 버텼군.”
서진은 작게 웃었다.
이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똑똑-
“감찰각주님”
“들어와.”
감찰각 소속 헌터는 방 안에 있는 서진을 보고 발걸음이 멈췄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말을 해도 될지 판단이 안 섰기 때문이다.
감찰각주는 서진에게 양해를 구하고 부하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야.”
“정두진 장로의 자택 수색 결과, 뚜렷한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허망한 보고를 들은 감찰각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반면 서진의 표정은 담담했다.
짐작했던 결과였으니까.
너구리 같은 정두진이 자기 목을 조일만한 약점을 뻔한 곳에 숨겨둘 리 없다.
지금부터 범위를 넓혀 수색을 시작하면 발견할지도 모르나 현재 그럴 여유가 없다.
급박한 현 상황에서 수색에만 열중한다면 서진과 감찰각주는 금세 궁지에 몰릴 게 자명했다.
감찰각이 정두진을 억류할 수 있는 시간은 최대 5일.
하지만 기간을 채우기 전에 한정후가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
정두진이 풀려나와 집법회에서 후계자 박탈 안건을 통과시킨다면 게임은 끝나는 것이다.
물론 한정후 측 장로만으론 과반을 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중립파를 끌어들인다면 무조건 통과다.
평소라면 중립 측이 찬성하지 않겠지만, 정두진이 구속된 소식은 그들에게 나름 충격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서로 파벌이 달라도 기저에는 같은 장로라는 인식이 짙게 깔려있으니까.
그렇기에 한정후가 중립파의 동요를 잘 이용한다면 과반이 넘어갈 수 있다.
서진 입장에선 안건이 통과되기 전에 무조건 연결고리가 되는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
감찰각주도 당연히 이런 상황은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부하를 질책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대로 수색해봤어?”
“마당을 비롯해 집을 전부 뒤집어 엎었지만 못 찾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부하 직원은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감찰각주.”
서진은 눈짓으로 그를 적당히 말렸다.
지금 중요한 건 질책이 아니라 타개책에 대한 논의였다.
감찰각주도 알면서 홧김에 내지른 것이겠지만.
“나가서 대기하고 있어.”
부하가 나가자 감찰각주는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일이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그럴 거라 예상했어.”
“네?”
“그전에 뭐 하나 물어보지. 감찰각주에 임명되고 일한 지 얼마나 됐지?”
“5개월 됐습니다.”
역시.
새파란 신입 각주였기에 올곧은 정의가 꺾이지 않은 채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서진에겐 아주 좋은 기회였다.
각주가 된 지 얼마 안 된 그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으니.
“감찰각주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해?”
감찰각주의 자백 스킬은 정신력이 떨어져야 쓸 수 있는데 장로를 상대로 강한 취조를 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는 깊게 고민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서진은 딱히 실망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상대가 집법회와 마도현가인데 고작 감찰각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괴로운 얼굴 할 필요 없어.”
“죄송합니다.”
“혹시 감찰각 내에서 미행, 추적이 특기인 헌터가 있나?”
“예, 은월각 소속이었다가 옮겨온 인원이 2명 있습니다.”
“잘 됐군.”
흑룡검가에서 정보를 취급하는 조직인 은월각 출신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당장 걔네한테 마도현가로 가서 소가주의 동태를 살피라고 해. 가문 밖으로 나오면 경로를 실시간으로 나에게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감찰각주는 서진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방을 나갔다.
**
현재 흑룡검가에선 어딜 가든 한서진과 정두진에 대한 얘기로 떠들썩했다.
“정두진 장로가 오랫동안 한서진을 눈엣가시로 생각했었는데 드디어 터졌네.”
흑룡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후배는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정 장로가 한서진을 싫어하는 이유가 뭐예요?”
“그게 말이야.”
선배인 남성은 주변을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한서진의 아버지가 정두진을 장로에 임명하는 과정에서 심하게 반대했었거든.”
“정말요? 어째서요?”
“과거에 흑룡가에서 개성 인근에 있는 범죄 길드를 없애려고 전쟁했던 건 알아?”
“얼핏 들은 적은 있죠.”
“그때 좀 강한 길드가 있었는데 거길 당시엔 자호대장이었던 정두진이 자호대를 이끌고 갔단 말이야?”
“예.”
“근데 거기서 정두진 빼고 전멸했어.”
“네에?”
후배는 크게 놀라다가 다시 작게 물었다.
“...왜요?”
“뒤늦게 알고 보니 그 범죄 길드에 예상 밖의 고레벨 헌터가 있었던 거지.”
“그럼 어쩔 수 없는 거 아녜요?”
“근데 이게 또 묘해. 현장에서 자호대원의 절반이 등 뒤에 치명상을 입은 채 죽어있었거든.”
“절반이나요?”
“응. 그래서 논란이 컸었지. 그런데 한정후의 최측근이기도 하고, 그 외의 공로들도 많아서 장로가 됐어. 그때부터 서로 자주 부딪혔지. 그거 다 얘기하면 입 아프다.”
후배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정두진 입장에서 원수의 아들이 후계자 신분이니 얼마나 거슬릴까.
자연스레 한서진도 정 장로가 싫을 수밖에 없는 거고.
“그때 가주님은 뭐라 안 했어요?”
“당시의 가주님은 가문 내부 사정에 무관심하셨거든. 그러고 보니 한서진이 깨어나고 나서 조금 변하신 것 같네.”
**
“회주님.”
비서는 한정후에게 정두진 장로에 대한 상황을 보고했다.
한정후는 보고 있던 책을 닫으며 말했다.
“감찰각에 말이지.”
한정후는 안경을 벗으며 한숨을 쉬었다.
‘적당히 하라고 말했거늘.’
이번 스캔들은 한정후라 해도 조금 부담스러웠다.
아직 마도현가와 정두진의 연결점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한정후가 보기엔 결국 시간문제에 불과하다.
‘고작 자택 수색을 넘긴 걸로 안심하는 건 멍청한 생각이지.’
한정후가 지켜본 최근의 한서진은 결코 만만한 녀석이 아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증거를 찾아낼 가능성이 높아.’
그것도 빠른 시간 내에.
‘내부에 있는 폭탄은 이쯤에서 떨어트리고 가는 게 맞겠지.’
아깝다고 데리고 가다간 추후 결정적인 순간에 발목을 잡힐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나서진 않을 것이다.
정두진이 억류된 5일 동안 한서진이 증거를 못 찾으면 그대로 박탈 안건을 올리면 되니까.
반대로 한서진이 찾는다면 한정후는 정두진을 구해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 못하는 거지만.’
어차피 정두진을 억류 기간 동안 방치하는 것만으로 한정후는 명분을 챙길 수 있다.
한정후는 결정을 내리고 안경을 서랍에 넣었다.
그의 사색이 끝났다고 판단한 비서는 입을 열었다.
“회주님. 정 장로에게 뭐라고 말을 전하면 되겠습니까.”
지금쯤 정두진은 한정후의 전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거길 왜 가.”
“예?”
“혐의가 있어서 갇힌 건데, 가서 뭐 하려고.”
“회주님...”
한정후의 생각을 알게 된 비서는 눈을 크게 떴다.
“가만히 지켜보다가 별일 없으면 놔두고. 아니면 가문 규율에 따라 처벌받아야지.”
한정후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을 바라보며 다른 주제를 꺼냈다.
“그리고 치성이 말이야. 지금 해외 간지 얼마나 됐지?”
“올해로 3년 2개월째입니다.”
“성취는?”
“현재 6레벨입니다.”
마법과 검 동시에 익히고 있음에도 빠른 성장 속도다.
하지만 한서진이 거슬린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1레벨이었는데 벌써 5레벨.
정말 무섭도록 치고 올라온다.
“흐음.”
“고민이 있으신 겁니까?”
“아냐.”
한정후는 아들을 가문에 복귀시키려다 말았다.
‘아직은 아니야.’
**
던전은 어디에도 있다.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사막이라도 예외는 없다.
그리고 6명의 헌터가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중 동양인의 얼굴을 한 남자가 귀를 파고 있었다.
“치성! 뭐해.”
“그냥 귀가 간지러워서 말이지.”
“누가 치성 얘길 하는 거 아냐?”
“뭐 아버지가 내 얘기를 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크, 부럽네. 돌아가면 바로 소가주라고 했었지?”
“어. 다른 놈들은 어림도 없으니까 나밖에 없지.”
마법을 제대로 수련하기 위해 해외로 떠나기 전날,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그리고 당시에 아버지의 말이 아니어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한서진은 식물인간이었고 한재열은 나름 애쓰긴 했지만 한치성이 보기에 한참 모자랐다.
경쟁력 있는 후계자가 자신밖에 없었다.
“치성이 소가주 되고 나면 우리 잊을지도 몰라.”
“그럴걸? 치성은 냉정한 녀석이니 기억마저 지울지도 몰라.”
한치성은 동료들의 농담에 웃으며 말했다.
“자꾸 그러면 진짜 잊을지도 몰라.”
“세상에.”
“그런데 치성. 최근에 네 형 일어났다고 했잖아 소가주 자리가 막 위험해지는 거 아냐? 하하하.”
“농담도 잘 골라서 해봐, 한스. 너무 말이 안 되는 건 재미가 없어.”
“그러면서 방금 웃었는데?”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온 거야.”
그때 팀의 리더인 레이나가 대화를 끊었다.
“그만. 이제 던전 들어갈 준비 해.”
“오케이.”
**
도로 위를 달리는 차 안, 현지완 소가주는 잠시 눈을 붙였다.
‘청화 길드 놈들.’
갈수록 던전 공략권을 두고 경쟁이 심해지고 있다.
가문이나 길드가 확보한 사냥형 던전의 개수가 곧 힘이다.
공략형 던전은 가끔 유물이 발견되는 잭팟이 터지기도 하지만 가문의 밥줄은 계속 유지되는 사냥형 던전이다.
‘위에 있는 흑룡검가를 밀어버리면 정말 좋을 텐데.’
어떻게 해도 뚫리지 않는 3대 가문의 벽.
현지완은 그것이 너무나 답답했다.
‘그 노인네는 언제 죽을는지.’
10레벨 가주만 죽는다면 해볼 만할 텐데.
그래도 정두진 장로처럼 흑룡가 내부에서부터 작업을 계속한다면 틈이 생길 것이다.
‘피곤하군.’
누적된 업무에 피로감을 느낀 현지완은 생각을 접어두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에 완전히 빠져들기 직전, 차가 급정거했다.
끼이이익!
“뭐야!”
수면을 방해받은 그는 신경질을 내며 눈을 떴다.
운전기사는 떠듬거리며 손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죄, 죄송합니다. 앞에 사람이 한 명 서 있습니다.”
“도로 한복판에 무슨 사람...”
현지완은 미간을 찌푸리며 앞을 주시했다.
정말 남자 한 명이 서 있다.
“저거 뭐야.”
쿵.
남자는 갑자기 사라졌다가 차 보닛을 밟으며 나타났다.
긴가민가했던 현주완은 그제야 확신했다.
“한서진?”
콰앙!
한서진이 검을 한번 휘두르자 차의 천장이 깔끔하게 날아갔다.
“미친 새끼!”
“반갑군. 마도현가 현지완 소가주.”
한서진의 차가운 눈빛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