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불과 몇 시간 전.
“허억, 허억.”
양복을 입고 있는 현지완의 운전기사는 숨이 벅찰 정도로 뛰고 있었다.
‘어서 알려야 해.’
소가주님이 습격당했다는 사실을 어서 가문에 전달해야 한다.
한서진이 차량의 보닛 위에 있을 때, 그는 백미러를 통해 소가주의 눈짓을 받고 도망쳤다.
다행히 한서진은 자신을 순순히 보내주었다.
볼일은 소가주에게만 있다는 듯이.
하지만 그는 얼마 안 가 소름이 돋았다.
바지의 주머니 부분이 잘려서 휴대폰이 없었던 것이다.
분명 한서진이 한 짓일 텐데 어느 틈에 자른 걸까.
워낙 경황없이 전투 현장을 벗어나느라 잘린지도 몰랐다.
“돌아가면 찾을 수 있을까?”
무리다.
어디에 떨어져 있는지도 모르니까.
게다가 바지 상태로 봤을 때, 휴대폰도 같이 잘렸을 것 같다.
“하아...”
좌절하던 그는 도로엔 긴급 전화가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안도했다.
“맞아. 그걸로 연락하면 되겠다.”
하지만 그때, 서진이 숨겨놓은 감찰각주가 나타났다.
“엇!”
감찰각주는 기겁하며 도망치려던 그를 단번에 기절시켰다.
“이래서 서진 님이 나보고 여기에 숨으라고 하신 건가.”
감찰각주는 대자로 쓰러진 운전기사를 보며 중얼거렸다.
**
유일한 목격자가 쓰러졌기에 마도가주는 뒤늦게 충격적인 소식을 전달받았다.
다름 아닌 흑룡검가의 감찰각으로부터.
“지완이가 죽었다고?”
“한서진이 먼저 습격을 했고 전투 끝에 전사..했다고 합니다.”
비서는 애써 말을 돌려서 표현했지만 결국 한서진이 아들을 죽였다는 말이었다.
“죽었다고? 그게 말이 되느냐.”
마도가주는 보고를 믿지 못하고 부정했다.
곧이어 피가 잔뜩 묻은 아들의 옷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현실감을 느꼈다.
하지만 가주는 눈물을 보이거나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을 유지할 뿐이었다.
그렇게 10여 분간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마도가주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문의 헌터들을 전부 소집해라. 흑룡검가로 쳐들어간다.”
가주의 명령이 하달된 지 얼마 안 지나 그의 딸이 달려왔다.
“아빠!”
“소예야. 넌 같이 안 가도 된다.”
“그게 아니라 전 반대를 하러 온 거예요. 아빠.”
“뭐라? 지금 네 오빠가 죽었는데 무슨 헛소리냐. 그딴 소리할 거면 물러가거라.”
“싫어요.”
그녀는 아버지의 기세에도 꿋꿋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제가 그 이유를 두 가지 말씀드릴게요. 듣고도 하겠다고 하면 물러갈게요.”
결국 아버지는 딸의 눈빛을 보고 한풀 굽힐 수밖에 없었다.
“말해 보거라.”
“첫 번째, 현재 마도현가의 전력으론 절대 흑룡검가를 못 이기기 때문이에요.”
마도가주의 눈썹이 치솟았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한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그간 쌓아온 가문을 전부 무너트릴 생각이 아니라면 전쟁은 금물이에요.”
현소예는 아버지의 눈을 계속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명분이 흑룡검가에게 있기 때문이에요. 감찰각에서 함께 보내준 증거들이 정말이라면 오빠는 정말 큰 잘못을 저지른 거예요. 가문을 위한 일이라 해도 수단이 더럽혀진다면 의미가 없잖아요. 아빠.”
딸의 절절한 주장에 마도가주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도 마법사이기에 분노라는 감정을 밀어내고 이성을 위에 올렸다.
하지만 말 몇 마디로 어찌 자식 잃은 슬픔이 가시겠는가.
가주의 분노는 이성이란 뚜껑으로 간신히 덮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소예, 네 말은 그냥 참자는 말이냐.”
“아니요. 오빠가 큰 죄를 저지르긴 했지만 멋대로 죽여버린 한서진도 과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흑룡검가 전체가 아니라 한서진 한 명에게 한정해서 문제를 제기해야 돼요.”
“한서진이 흑룡가의 후계자인데 한정한다고 되겠느냐.”
“안되면 물러나야죠. 잘못은 오빠가 먼저 한 건 사실이니까요.”
마도가주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에겐 답답한 대답이었다.
마법사에겐 냉정함이 중요한 덕목이지만 소예는 어릴 때부터 그게 과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마법 재능은 오빠를 뛰어넘었다.
“아빠,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했어요. 가문이 힘을 꾸준히 쌓고 현 흑룡가주가 없어진다면 넘어설 수 있어요.”
마도가주는 그 말을 듣고서야 한숨을 쉬며 결국 소집을 취소했다.
어쨌든 살면서 딸의 조언을 들었을 때, 큰 실패나 손해를 본 적이 없었으니까.
현소예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속으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아버지.’
군자의 복수 얘기는 그냥 설득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
가문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오빠의 복수에 매몰되어선 안 되니까.
그러나 마도가주는 완전히 물러난 게 아니었다.
“그럼 나 혼자 가마.”
“네? 안 돼요 아빠!”
“말로만 할 테니 걱정마라.”
마도가주는 결국 가문을 나섰고 현소예는 차마 그것까지 말릴 순 없었다.
**
정문을 돌파해 흑룡가주실로 향하던 마도가주는 얼마 안 가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어디까지 들어가시려는 겁니까. 마도가주님.”
용 문양이 새겨진 흑의와 황금색 견갑이 눈에 띄는 남자가 앞길을 가로막았다.
“흑룡대장이군.”
“알아보시니 영광입니다.”
“지금은 너와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다. 급한 일이 있으니 비켜.”
마도가주는 살기를 풍기며 압박했지만 흑룡대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안됩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가주실에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막아보겠다는 거냐.”
“남의 가문에서 억지를 부리고 있는 분은 마도가주님입니다.”
“한서진이 내 아들을 습격해 죽인 것만 할까.”
흑룡대장은 더 이상의 대꾸 없이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흑룡대장도 자식을 잃으면 나를 이해하게 될 거야.”
마도가주의 발아래에서 뼈가 시릴 정도의 냉기가 발산되었다.
흑룡가로 향하면서 딸에게 한 말은 진작에 잊어버린 그였다.
쩌저적!
냉기는 바닥을 얼리며 빠른 속도로 범위를 넓혀갔다.
결국 흑룡대장이 검을 뽑으려 할 때, 흑룡가주가 나타났다.
“그쯤 하지. 마도가주.”
쾅!
동시에 마도가주의 바로 앞에 꽂힌 검 한 자루.
검의 주인은 흑룡대장이었으나 던진 이는 한벽호였다.
흑룡대장은 바닥에 꽂히기 전까지 검이 없어졌다는 걸 자각도 못 했다.
“후우.”
마도가주는 마나를 거두며 안광을 번뜩였다.
가주회의를 방해받은 한벽호는 권태로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일로 왔는가.”
“몰라서 물으십니까. 한서진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게. 흑룡대장이 대신 전해줄 테니.”
“즉시 답장을 들을 수 없다면 여기서 발을 떼지 않겠습니다.”
지켜보던 흑룡대장은 마도가주가 불퇴의 각오를 다졌음을 느꼈다.
“그러면 발을 떼게 만들어줘야겠군.”
한벽호는 한 발짝 내딛으며 검을 회수해 손에 쥐었다.
하지만 그때 서진이 나타났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등장에 한벽호는 서진을 꾸짖었다.
“내가 나오라고 허락한 적이 없는데 왜 왔느냐.”
“제 일인데 숨는 건 성미에 안 맞으니까요.”
“한서진!”
다시 눈이 돌아간 마도가주는 마나를 폭발시켰다.
8레벨의 빙결 마법이 펼쳐지기 직전, 무형의 압박이 그를 옭아맸다.
“마도가주. 봐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네. 한 번만 더 내 집에서 그런 짓거리를 시도한다면 사양 않고 목을 베어주지.”
마도가주가 강자라곤 해도 10레벨인 한벽호를 넘어서긴 아직 한참 모자랐다.
강제로 그를 진정시킨 한벽호는 느긋하게 말했다.
“한서진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으니 해보게.”
마도가주는 아직 분노가 식지 않았지만 여기서 흑룡가주와 싸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한서진, 꼭 아들을 죽였어야 했나.”
“소가주가 먼저 저를 죽이려는 계획에 동참했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마도가주님이야 말로 소가주가 한 짓을 전부 알고 계십니까?”
“잘못한 점은 알고 있다. 하지만 목숨은 살려둘 수 있는 거 아닌가?”
“마도가주님은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을 때 너그럽게 보낼 수 있습니까.”
서진의 반문에 마도가주는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한벽호는 그런 그를 보며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
“마도가주, 예전에 다른 가문에서 먼저 마도현가를 공격했을 때, 자네가 직접 가주를 죽였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 말이 마도가주에게 송곳처럼 다가왔다.
“아들의 죽음에 슬퍼하는 건 이해하지만 자네가 이럴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참고 있는 건 흑룡가도 마찬가지라는 걸 일러두지.”
소가주가 정두진을 이용해 정보를 빼낸 것을 넘어가 주겠다는 말이었다.
물론 사실상 소가주를 죽임으로써 보복을 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한벽호의 말을 마지막으로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대화가 중단되었어도 여전히 팽배한 긴장감이 유지되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흑룡가주가 했던 말은 사실이지만 사람의 감정은 이성을 덮을 때가 있으니까.
만약 마도가주가 죽기를 각오하고 본 실력을 드러낸다면 흑룡가는 큰 피해를 보게 된다.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흑룡대원들은 전부 발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검이 뽑힐 일은 없었다.
마도가주는 한서진의 얼굴을 기억하려는 듯 잠시 노려보다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저게 텔레포트인가.”
7레벨급 마법을 처음 본 신입 흑룡대원이 중얼거렸다.
**
하루가 지나고 사태는 빠르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어제 중단된 가주회의는 재개되지 않았다.
다만 생각을 정리한 흑룡가주의 일방적인 통보가 있었을 뿐.
한정후는 집법회주에서 물러나고 은월각주도 경질되었다.
그리고 정두진의 처분 권한은 서진에게 위임되었다.
“그래서, 어떡할 거냐? 정 장로.”
같이 점심을 먹고 있는 정보건이 내용물을 삼키고 질문했다.
“마관청에 넘기려고.”
“하긴 그게 제일 깔끔하지.”
“홍세인 과장이 말하길, 특별법으로 회색 섬에 보내버릴 수 있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체이서인가 장민인가 걔는 어떡할 거야.”
“이미 죽였지. 딴 나라 와서 개판 친 외국인 헌터를 살려둘 필요가 없으니까.”
정보건은 괜히 목소리를 낮추며 걱정스레 말했다.
“적륜성주 아들이라며, 서자긴 해도 괜찮을까.”
“그딴 이유 때문에 겁먹고 살려두는 게 더 웃긴 거야.”
“하긴 그래, 잘했다. 그나저나 이거 다 계획한 거냐?”
“뭐가.”
정보건은 아예 밥을 푸던 숟가락을 놓으며 말했다.
“봐봐. 결과적으로 한정후는 밀려났고 적대하던 정두진은 아웃, 은근히 둘째 라인 타던 은월각주도 날아갔잖아.”
“의도한 건 아니야.”
“아니, 그게 더 무서운데?”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형.”
그렇게 점심을 다 먹어 갈 때쯤.
조용히 옆에서 함께 먹고 있던 설하윤이 입을 열었다.
“서진 님.”
“네.”
“오후에 스케줄이 비어있던데 혹시 다른 일정이 있습니까?”
“아뇨, 없어요.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집에 있으려고 하는데. 왜요?”
“오후에 어디 갔다 오려고 하는데 혹시나 해서 여쭤봤습니다.”
정보건은 가볍게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오 설하윤 헌터가 웬일로 사적인 외출을.”
“형 그거 실례야.”
“아, 그렇지. 흔치 않은 일인 것 같아서 그만. 죄송합니다, 설하윤 씨.”
“아닙니다.”
그렇게 점심이 끝나고 정보건은 던전기획실로 돌아갔다.
설하윤은 서진과 같이 집으로 걸어가다 조심스레 말했다.
“서진 님.”
“네.”
“아까는 말씀 못 드렸지만 사실 그곳을 오랜만에 갈 예정입니다. 호위로서 행선지는 밝혀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서진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저도 같이 가죠. 궁금했거든요, 하윤 씨가 자란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