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마치 불꽃처럼 타오르는 투기를 보며 서진은 상념에 잠겼다.
재능이란 무엇일까.
타고나는 것?
그렇다면 투신공이란 스킬은 재능과 노력 어느 쪽에서 비롯된 걸까.
지구에서 깨어난 이후 주변인들이 천재라는 수식을 붙여주지만, 실은 그게 아니라는 걸 서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재능이란 없다.
모든 건 천 년 동안 쌓아 올린 결과물일 뿐.
그렇기에 서진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바닥부터 채워나간 노력의 산물이 서진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었으니까.
옛날에 들었던 무재라는 멸칭은 사라졌지만 투기를 보면 이따금 상기된다.
천년이란 세월로 덮어도 과거는 바뀌지 않는 법이니까.
서진은 검을 타고 날뛰는 붉은 투기를 천천히 다듬었다.
불규칙적으로 넘실거리던 투기는 점차 반듯하게 모습을 갖춰간다.
칠흑의 검신 위에 적색의 투기가 씌워지자 검기는 검붉게 보였다.
그 광경은 다넬에게 이해할 수 없는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저건 뭐지? 마나, 마기 둘 다 아니야.’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을 직면한 다넬의 무의식엔 불안감이 싹을 틔웠다.
다넬이 멈칫한 사이, 서진의 검은 블레이즈 데몬에게 향했다.
서걱.
힘을 되찾은 서진에게 소환수의 움직임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블레이즈 데몬의 오른팔이 떨어지자 다넬은 그제서 정신을 붙들었다.
하지만 소환수를 살리기엔 서진이 너무 빨랐다.
검붉은 검기는 잔상을 그리며 블레이즈 데몬의 몸통을 반으로 갈랐다.
화륵!
결국 다넬의 소환 마법은 서진의 검격에 허무하게 사라졌다.
까득.
다넬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서진을 노려봤다.
저 힘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전투의 흐름이 반전되었다.
다넬은 다시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해 거무튀튀한 마약 한 알을 꺼내 삼켰다.
몸이 망가지는 후유증이 있더라도 저놈 만큼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것조차 해내지 못하면 다넬은 스승님에게 존재가치를 잃게 될까 두려웠다.
“끄으윽.”
제어가 풀린 마기가 몸을 격동시키며 한계점을 넘어섰다.
다넬은 그저 마기가 이끄는 대로 마법을 발동했다.
블레이즈 레일.
땅을 타고 모든 걸 집어삼키는 불길이 서진을 향해 돌진했다.
서진이 점멸로 벗어나자 불길도 방향을 바꿔서 그를 추격했다.
이런 유도형 마법도 신물이 날 정도로 경험했던 서진.
파훼법은 간단했다.
같은 불로 상쇄시키는 것.
서진은 몸을 틀어서 불길이 이미 지나갔던 곳으로 달렸다.
선두의 불길을 유인한 서진은 같은 불꽃끼리 충돌시켰다.
화르륵!
의도대로 불의 추격은 중단되었지만 충돌의 여파가 남아있었다.
사방으로 퍼지는 불꽃은 서진에게 또 다른 공격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서진도 화상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오래간만에 피부가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진다.
‘어쩔 수 없지.’
쓸만한 방어 아이템이 있는 것도 아니니 부상을 감수하는 수밖에.
그리고 서진은 단순히 스킬을 없애기 위해서만 달린 게 아니었다.
한참 떨어져 있던 서진과 다넬의 거리는 어느새 가까워져 있었으니까.
“헛!”
숨을 들이켜는 다넬을 향해 서진이 도약했다.
다넬은 급하게 화염을 쏟아냈다.
하지만 서진은 멈추지 않고 계속 접근했다.
서진이 입고 있는 옷이 불타며 화상을 입은 부위가 늘어나도 다가오는 모습은 마치 지옥귀 같았다.
저 붉은 검기와 무서울 정도의 집념.
다넬은 다리가 살짝 떨렸다.
탁.
드디어 다넬의 지척에 착지한 서진은 입꼬리를 올렸다.
“드디어 만났네. 그리고 이건 선물.”
투기로 만들어진 거대한 참격이 다넬을 덮쳤다.
참격 앞에선 다넬의 화염도 소용이 없었다.
붉은 검기에 직격 당한 다넬의 육신은 세로로 이등분되었다.
서진은 두 갈래로 찢어진 채 허물어지는 다넬을 보며 투기를 거뒀다.
다넬이 품고 있는 정보는 많겠지만 흑마법사는 일반 마법사보다 위험하다.
살려두면 어떤 수작을 부릴지 서진도 짐작하기가 까다로울 정도.
마음 편하게 죽이는 것이 나았다.
“그런데 다른 놈은 없나?”
서진이 다넬을 죽일 때까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뒤로 도망간 걸까.
일단 그건 설하윤에게 맡겼으니 서진은 연구소에 들어갔다.
**
연구소엔 최소 인원만 남겨둔 탓에 적막함이 무겁게 깔렸다.
하지만 침묵을 견디지 못한 연구원이 입을 열었다.
“소장님은 누가 이길 것 같아요?”
“그게 할 말이냐 당연히 다넬이 이겨야지.”
“그렇지만 걔가 싸우는 건 한 번도 못 봤지만 침입자 때문에 실시간으로 구슬이 깨지는 건 봐서 그런지 좀 불안하네요.”
“아무리 그래도 결계 속에서 5레벨 흑마법사가 지겠냐?”
“하긴 그렇죠?”
연구소장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100% 확신은 하지 못했다.
자신이 예상 못 하는 다른 변수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때 건물의 울림이 멎었다.
연구원은 천장을 보며 작게 말했다.
“어, 전투가 끝났나?”
“글쎄다.”
귀를 기울여보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기대감과 긴장감이 뒤섞이며 쌓여가는 순간.
턱.
누군가 연구소에 발을 딛는 소리에 둘의 표정이 일시적으로 굳었다.
‘누구지, 다넬? 아니면 침입자?’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거기서 중단되었다.
빠르게 두 명을 기절시킨 서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여길 버리기로 한 건지 휑한 느낌이 가득했다.
그렇다면 설하윤이 쫓고 있는 놈들이 중요한 정보를 들고 있을 것이다.
서진은 혹시 몰라 두 명을 결박해놓고 설하윤을 찾아 나섰다.
**
연구소를 나선 서진이 설하윤을 찾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이동하면서 표식을 남겨주었기 때문에.
서진이 나타나자 설하윤은 그의 모습을 보고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서진 님, 많이 다치신 겁니까?”
다넬의 화염 마법 때문에 서진의 몰골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군데군데 타버린 옷과 화상 자국까지.
서진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보기보단 괜찮습니다.”
사실 입고 다니는 옷에 신경을 안 쓴 결과이기도 했다.
설하윤은 하고 싶은 걱정과 잔소리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참았다.
서진은 그녀가 쫓고 있던 행렬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보다 길진 않군.’
중간에 키메라가 섞여 있었지만 서진에게는 습격의 걸림돌이 되진 못했다.
한번 심호흡을 한 서진은 검을 뽑고 아래로 내려갔다.
**
서진이 검을 들고 모습을 드러내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키메라였다.
“크르.”
서진은 다섯 마리의 키메라에게 동시에 다섯 갈래의 검기를 날려 보냈다.
촤악!
재밌게도 한 놈 빼고 나머지 키메라는 전부 피했다.
과연 처리반장에게 들은 대로 움직임이 달랐다.
서진이 키메라와 대치하고 있을 때 선임연구원이 직원들에게 지시했다.
“어서 도망가! 달려!”
그에 서진이 설하윤을 부르려고 하니, 이미 그녀는 내려와서 직원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직원들은 그마저도 막히자 아예 자료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하윤 씨!”
서진도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키메라부터 없애야 했다.
“크르르!”
키메라는 웨어울프 특유의 도약 자세로 서진을 둘러쌌다.
그중 한 마리가 튀어 오르는 순간, 서진의 투기는 창이 되어 솟구쳤다.
푸욱.
키메라는 투기에 목을 관통당한 채 매달렸다.
검을 휘둘러 목을 분리하자, 이번엔 동시에 3마리가 덤벼든다.
우웅.
검명이 울리고 붉은 반월 같은 참격이 가로로 뻗어 나갔다.
차악!
한 번에 두 마리가 죽고 이제 남은 건 하나뿐.
“크르..”
마지막 한 마리는 섣불리 덤비기보단 자세를 낮추고 서진을 노려보았다.
키메라 중에 상등품이라 그런지 반응이 제법이다.
하지만 순식간에 다가와 내려친 서진의 일검에 키메라는 반으로 갈라졌다.
**
서진과 설하윤은 살아남은 직원을 전부 굴비 엮듯이 줄줄이 포박했다.
“서진 님, 그런데 이 상태로는 마경을 빠져나가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인원을 세어보니 총 15명이다.
이 많은 인질을 데리고 단 두 명이 마경을 지나 개성까지 내려가는 건 서진이 생각해도 무리였다.
하려면 할 수야 있지만, 굳이 서진이 할 필요는 없었다.
“하윤 씨가 먼저 가문으로 복귀해서 흑룡대를 불러오세요. 저는 얘네들 흑룡대에 인계하고 내려갈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설하윤이 몇 시간 뒤에 흑룡대를 보내주었고 서진은 그들을 떠넘기고 가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쉴 틈 없이 곧장 가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홍세인 과장은 연구소의 목적을 알고 나서 입을 열었다.
“적륜성주가 키메라 군단을 만들려고 했군요.”
원래는 자신의 지역인 랴오닝성에서 실험하다 키메라의 힘이 도저히 통제가 안 되어 마경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몬스터의 수급 문제와 중국 내 다른 세력에게 들키지 않을 만한 지역으로 마경은 적합했을 테니까.
중국의 세력다툼은 한국보다 심각한 상황이니 최대한 들키고 싶지 않았을 거고.
홍세인은 서류를 팔락거리며 말을 이었다.
“키메라 군단을 만들려고 한 동기는 뭐 말할 필요도 없겠죠.”
무조건 충성하며 통제가 가능한 몬스터 군단이라면 어느 지도자든지 탐낼 테니까.
“그런데 그런 대규모 결계는 누가 만든 걸까요.”
홍세인의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은 자료에 없었다.
다만 서진은 짐작이 갔다.
현장에서 흑마법사가 있었음에도 연구 자료에는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일부러 안 적은 것일 터.
다넬이 그 정도의 결계를 설치하진 못할 테니 그와 연결점이 있는 다른 마법사가 한 것이겠지.
만약 이 추측이 맞다면 흑마법사는 어째서 적륜성주를 도와준 걸까.
보상을 약속받은 게 아니라면 적륜성주와는 다른 동기가 있을지도 모른다.
서진이 한창 생각을 이어나갈 때, 흑룡가주는 보던 서류를 툭 내려놓았다.
“고작 이런 거에 의존하다니.”
흑룡가주는 키메라를 통해 세력을 키우려는 방법이 못마땅한 듯 말했다.
“그런데 서진 님, 이걸 어떻게 전부 얻으신 겁니까?”
홍세인은 뒤늦게 이번 일의 난이도를 짐작하며 경악했다.
“마나도 못 쓰는 곳에서 키메라를 상대하고 이런 자료들은 온전히 가져오시다니.”
키메라도 마나가 봉인되어 힘이 약해졌다곤 해도 스킬 없이 싸운다는 게 가능한가?
홍세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제법이긴 하구나.”
어지간하면 칭찬을 하지 않는 흑룡가주마저 서진을 인정했다.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김형석 비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태까지 후계자들에게 한 번도 임무 성과에 대해서 칭찬하신 적 없었는데.’
물론 자신이 보기에도 서진이 해낸 일은 믿기지 않을 만큼 대단했다.
헌터로서 최악의 환경에서 최상의 결과물을 가져온 것이니까.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김형석 비서가 의문을 품는 사이, 서진은 가주에게 말했다.
“그럼 제가 사전에 말했던 보상을 가져갈 수 있겠군요.”
“그래, 뭘 원하느냐.”
“타란툴라 퀸의 실타래를 주십시오. 가문의 비고에 있는 거 알고 있습니다.”
A급 중에서도 굉장히 희귀해서 매물이 잘 나오지 않기로 유명한 재료.
서진이 생각하고 있는 수준의 방어구를 만들려면 반드시 필요했다.
“좋다. 문을 열어줄 테니 가져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