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성주님. 연구실이 파괴되었습니다.”
“뭐?”
적륜성주는 난데없는 소식에 고개를 들었다.
총관은 보고를 이어갔다.
“한국의 흑룡검가에서 나선 것 같습니다.”
“혹시 그거 저번에 3팀 죽여서 그런 건가?”
“예, 마력관리청의 협조 요청이 있었다고 합니다. 자료는 대부분 넘어갔으며 연구소 직원들도 사로잡힌 상황입니다.”
적륜성주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대체 대처를 어떻게 했길래 그따위 결과가 나오는 건가!”
“죄송합니다. 성주님.”
쾅!
적륜성주는 노기를 참을 수 없어 책상을 내려쳤다.
길어봤자 한 달이면 1단계 실험이 성공적으로 종료됐을 텐데.
그걸 방해하다니.
적륜성주는 당장이라도 흑룡검가로 쳐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치솟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점이 떠올랐다.
“잠시만. 연구소에 흑마법사 한 명 있지 않았나?”
“확인 결과 죽어있었습니다.”
“도대체 누가 죽였지? 그 결계 속에서 5레벨 흑마법사를 죽인 놈이 있단 말인가? 흑룡가주가 나서진 않았을 터.”
“예, 그것이.”
총관도 보고만 받고 정보를 취합해서 말하는 위치인지라 이게 진짜인지 긴가민가했다.
“흑룡가 후계자가 혼자서 한 일이라고 합니다.”
“뭐라고?”
적륜성주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 둘째 손자인가, 그놈 말하는 건가.”
“아니요. 장손인 한서진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죄송합니다. 그것은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적륜성주의 노성이 성주실을 가득 채웠다.
“총관, 지금 그런 것도 모르면서 보고하는 건가!”
“죄송합니다.”
평소라면 짧은 시간 내에 그것까지 밝혀내기란 상당히 힘들다는 걸 적륜성주도 감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긴시간 공들인 실험이 물거품이 된 지라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성의 총력을 써서라도 반드시 알아내!”
“알겠습니다.”
“그리고 잡힌 연구원들은 못 빼내겠나?”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지시였다.
한국의 3대 가문 중 하나.
그것도 무력만으로 놓고 본다면 정점이라고 평가받는 가문에 갇힌 인원을 어떻게 빼낸단 말인가.
총관은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그것은...”
다른 건 노력해보겠다는 말이라도 해보겠지만 이건 안된다.
전쟁이라도 각오하면 모를까.
적륜성주는 의자에 깊이 등을 눕히며 한숨 쉬었다.
“후우.”
잠시 분노를 쏟아냈던 그는 머리를 식혔다.
“전부 빼내라는 말이 아냐. 한 명이라도. 기왕이면 연구소장으로 말이야. 안 되겠나?”
“...한번 해보겠습니다.”
총관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한 명이라면 은밀히 접촉해서 시도하는 시늉이라도 보일 수 있다.
물론 될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말이다.
“보고 다 했으면 나가봐.”
이 상황에서 너무 좋은 말이지만 총관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보고해야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정보는 차라리 묻을까 생각했지만 그러다 들키면 반신불수가 될지도 모른다.
총관은 결국 눈을 딱 감고 입을 열었다.
“성주님, 장민 도련님도 흑룡검가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방금 뭐라고 했지.”
무의식적으로 퍼진 성주의 기세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장민이 후계 순위에서 배제되었다고 해도 성주에겐 아끼는 아들 중 하나였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라는 의미로 보냈는데 죽었다니?
“그것이. 윽.”
성주의 의문에 답해줄 총관은 몸에 전해지는 압박에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성주는 기세를 거뒀다.
“어서 대답해보게.”
“장민 도련님이 유니온 멤버로 활동하던 중에 한서진과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한서진이 도련님을 흑룡가로 데려가서 가둔 다음 죽였다고 합니다.”
총관은 자세한 사건 경과를 적어놓은 서류를 내밀었다.
그것은 철저히 장민 입장에서 유리하게 서술된 자료였는데, 분노의 화살을 밖으로 돌리기 위한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련님도 잘못이 있다는 식으로 썼다간 좋지 않을 게 뻔하니까.
“알았으니 나가봐.”
의외로 적륜성주는 아까보다 화를 내지 않고 총관을 내보냈다.
하지만 겉모습만 그럴 뿐이지 속마음은 이미 폭풍전야와 같은 상태였다.
총관이 나가자 모습을 숨기고 있던 게일러가 나타나 말했다.
“이제 어쩔 생각이지.”
연구소와 아들 둘 다 한사람에게 잃은 적륜성주가 가만히 참고만 있을 리 없으니.
“글쎄.”
적륜성주는 가까스로 이성을 붙들고 있었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면 당장 한서진을 찾아가 죽일 것 같으니까.
“생각보다 신중하군. 아니면 겁이 나나.”
“게일러.”
적륜성주는 차갑게 깔린 목소리로 경고했다.
키메라 연구로 인해 도움을 받고 있긴 하지만 선을 넘는다면 참을 생각은 없었다.
“알았네. 얼굴이 참 무섭군.”
게일러는 뒤로 물러나며 말을 덧붙였다.
“성주가 나서지 않는다면 내가 나서지.”
“어떤 식으로?”
“그렇게 묻는 걸 보니 정말 나설 생각이 없나 보군.”
“당장은 말이야.”
적륜성과 흑룡검가 사이는 마경이 있어 헌터들을 끌고 갈 수도 없다.
거기다 다른 가문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있기 때문에 무턱대고 성을 비울 수도 없는 노릇.
일단 엎어진 키메라 연구를 계속 진행하기 위해 연구원을 빼내는 게 우선이다.
아버지가 아닌 성주로서의 결정이었다.
“그리고 게일러, 자네 제자도 죽었는데 아무렇지 않나?”
“별 필요 없는 놈이라 괜찮아. 다만 연구소가 그리 된 건 귀찮긴 하단 말이야. 아까 연구소장 빼돌린다고 했지? 내가 도와주지.”
게일러는 입꼬리를 올리며 안광을 번뜩였다.
**
철을 두드리는 망치 소리와 열기로 가득한 흑룡가의 공방.
서진은 검의 손질을 맡기기 위해 강주표를 찾았다.
“에잉, 쯧. 이번에도 험하게 썼구나.”
강주표는 서진의 검을 보며 인상을 썼다.
“그럴만한 곳이었으니까요.”
“마나를 못 썼다니 뭐 어쩔 수 없군. 잠시만 기다리게.”
검을 손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 여기. 뇌광석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크게 상하진 않았네. 근데 무기 말고 갑옷도 챙겨야 되는 거 아닌가?”
“안 그래도 갑옷까진 아니고 옷을 좋은 거로 만들려고 합니다.”
강주표는 서진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거면 8구역에 가면 잘하는 놈 하나 있네. 재료는 뭐 쓸 건가.”
“타란툴라의 실타래와 드레이크의 가죽을 쓰려고 합니다.”
“실타래는 얼마 전에 가문 비고에서 얻었다는 말 들었네만, 가죽은?”
“이제 구해야죠.”
“가죽이 더 귀할 텐데 고생하겠구먼.”
드레이크의 던전 자체가 귀한 건 아니었다.
다만 죽고 나서 급속도로 바스러지는 특징 때문에 온전한 가죽 구하기가 어려울 뿐.
목숨이 오가는 A급 던전에서 산 채로 느긋하게 가죽을 벗길 수도 없었으니까.
자연스레 가죽이 희소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얻기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고 비싼 건 아니었다.
물리 공격과 마법에 대한 내성이 있다는 게 제일 큰 요인이다.
일단 서진은 구현수 비서에게 매물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말은 해놓은 상태였다.
경매장을 포함해서 전부.
**
그로부터 나흘이 지나, 구현수 비서는 흥미 있는 정보를 가져왔다.
“서진 님. 드레이크 가죽을 갖고 있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정말요? 누굽니까.”
“예일 공방이란 곳인데 그곳의 사장이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현재 공방의 상황이 좀 복잡합니다.”
“무슨 일이길래?”
“예일 공방이 있는 지역이 적호검가의 영역입니다. 그쪽은 몇 주 전에 이미 정보를 알았는지 계속 접촉을 했다고 합니다.”
서진은 가문의 이름을 듣자마자 백화연이 해줬던 얘기가 떠올랐다.
대한가문회에서 열린 회담에서 서진에게 반대표를 던진 곳 중에 하나.
듣고 흘려넘겼는데 이런 식으로 다시 듣게 될 줄이야.
서진은 고개만 끄덕이며 구현수가 말을 계속하게 했다.
“그리고 최근 공방에 악재가 겹치면서 흔들리는 듯합니다.”
“악재?”
“예, 제작 설비가 부서지거나 인원이 빠져서 납품 기한을 몇 번 어기는 바람에 재정이 위험한 상태입니다.”
“답답하겠군.”
예일 공방 측도 누가 방해하는지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니.
적호검가의 위명을 아는 중소가문이나 길드는 끼어들지도 못했을 테고.
“거기 주소 좀 알려줘요. 찾아가서 이야기 한번 들어보게.”
서진은 위치를 확인하고 설하윤과 함께 바로 예일 공방으로 출발했다.
**
서진이 예일 공방에 발을 들이자 안에 있던 사람들의 경계 어린 시선이 꽂혔다.
“누구시오?”
“흑룡검가의 한서진입니다.”
“예?”
직원은 잘못 들었나 싶은 얼굴로 되물었다.
흑룡검가도 알고 최근 유명해진 한서진도 알지만 얼굴이 익숙지 않은 데다 그가 이곳에 방문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누구요?”
그때 어수선한 분위기를 느낀 사장이 작업을 그만두고 나왔다.
평소라면 집중해서 신경 쓰지도 않겠지만 최근 분위기가 뒤숭숭해서 작은 일에도 예민해진 탓이었다.
사장은 직원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입을 벌렸다.
“허억.”
사장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직원과 서진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한서진을 바로 알아본 사장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적호검가에 시달리는 것만 해도 미치겠는데 흑룡검가라니.
사장은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제발 별 시답잖은 일이길. 아니면 제작 의뢰거나.’
그는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그에 비해 서진은 아무렇지 않게 툭 뱉었다.
“드레이크 가죽 말인데.”
“어억.”
사장은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
1시간이 지나, 서진과 설하윤 그리고 사장은 작은 휴게실에 마주 앉아있었다.
사장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레짐작하는 바람에...”
서진이 찾아온 이유는 사장이 걱정했던 일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드레이크 가죽을 원하는 건 맞지만 제안을 듣고 판단해달라 했으니까.
이는 적호검가에서 보였던 태도와 많이 달랐기에 사장은 마음을 진정했다.
그리고 흑룡검가가 무서운 이미지긴 해도 양아치 짓을 했단 얘기는 못 들어 봤다.
사장은 물을 한잔 마시고 입을 열었다.
“저도 가죽을 아예 팔아버리고 싶지만 이제 힘들어졌습니다.”
사장은 책상 아래에 있는 계약서를 꺼내 보여주었다.
적호검가와 예일 공방이 맺은 납품 계약서였다.
“우연히 드레이크의 가죽을 얻은 후로 문제가 시작됐습니다.”
연고가 없었던 오랜 친구가 죽기 전에 집을 넘겨주었는데 거기에 가죽이 있었던 것이다.
“적당한 곳에 쓰라며 쪽지가 있더군요.”
그리고 실수로 술자리에서 이 얘길 흘려버린 것이 문제였다.
“그때부터 공방에 온갖 방해가 들어오더군요. 그 때문에 몇 건의 납품이 지연되거나 끊기면서 힘든 상황입니다.”
대놓고 사장을 건들면 대한가문회에서 개입할 테니 이렇게 우회해서 공방을 흔드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계약을 끊자니 내야 하는 위약금이 상당합니다.”
“그러면 가죽을 팔면 되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보름 전부터 그런 결심을 했는데 누가 미행하는 기분이 들더군요.”
서진은 대충 짐작이 갔다.
적호검가는 사장이 가죽을 어디에 숨겼는지 모르기에 그런 식으로 알아내려 한 거겠지.
그리고 사장이 가죽을 되찾는 순간, 괴한의 짓으로 꾸며 뺏는 거야 일도 아닐 테니.
어떻게든 일반인 살해는 피하려는 꼼수라고 할 수 있다.
‘가지가지 하는군.’
서진은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제가 도와드리죠. 대신 가죽은 제게 파는걸로.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