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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가문의 천재는 사실 귀환자-42화 (42/141)

42화

“아휴, 그래 주시면 저야 너무 감사하죠.”

사장은 가죽을 적당한 가격이라면 얼른 팔아버리고 싶었다.

이거 때문에 불면증에 탈모까지 오고 있었으니까.

구매자가 흑룡검가의 후계자라면 적호검가도 함부로 나서지 못할 테고.

서진은 예일 공방의 사장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구매자가 정해졌으니 가죽을 숨겨놓은 곳으로 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사장은 운전대를 잡으며 말했다.

“술자리에서도 어디에 있는지 말하지도 않았고 숨겨놓은 당일 이후로 한 번도 간 적 없습니다.”

사장의 차는 도심을 조금 벗어나 인근에 있는 야산으로 향했다.

“이곳에 있습니다.”

사장은 삽을 들고 서진을 안내하며 산 중턱에 도달했다.

그리고 멈춰 서서 아무런 표식도 없는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2미터가량 아래에 돌로 된 보관함이 흙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것을 본 서진은 작은 의문이 들었다.

“이런 곳에 파묻으면 비 올 때 쓸려갈 위험도 있지 않습니까?”

“후후, 이게 그냥 보관함이 아니라 자그마한 효과가 있는 아이템입니다. 산 아무 때나 숨겨도 묻은 곳만 기억하고 있다면 항상 그 자리에 있습니다.”

별것 아닌 효과지만 상황에 맞게 잘 이용만 한다면 가치를 발휘하는 아이템이었다.

뚜껑을 열자 드레이크의 가죽이 고이 들어있었다.

그 순간 서진은 뒤편에서 숨어있는 한 명의 기척을 강하게 느꼈다.

마찬가지로 설하윤도 알아챘지만 서진의 눈짓을 받고 모르는 척했다.

흑룡검가의 한서진이 구매했다는 정보가 그쪽에게 무사히 전해져야 했으니까.

“적호검가 놈들은 여기에 있을지 상상도 못 했겠지요.”

사장은 은근히 뿌듯해하며 말했다.

“그런데 적호검가에게 안 판 이유가 있습니까? 초반엔 그래도 점잖게 접근했을 텐데.”

“말도 마십쇼, 태도만 그렇지 완전 날강도가 따로 없었습니다. 너무 택도 없는 가격을 부르길래 거절했습니다.”

사장은 다시 시달렸던 생각이 나는지 울분을 토했다.

“몇 번 그렇게 거절했더니 괴롭힘이 심해져서 제가 먼저 얘길 꺼내니 그땐 가격을 더 낮게 부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서진은 그게 무슨 심보인지 알 것 같았다.

처음에 거절했으니 괘씸죄를 추가한 거겠지.

물론 사장의 심정도 이해가 갔으나 현실적인 이야기를 안 꺼낼 순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사 간다고 적호검가의 수작이 멈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차라리 공방을 개성으로 옮기는 건 어떻습니까.”

사장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제 가족과 직원들이 이곳에 살고 있어서 힘들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선택은 사장님의 몫이니까요.”

서진이야 아쉬울 건 없으니 거절해도 상관은 없었다.

“다만 제 제안은 언제나 유효하니 생각이 바뀌면 여기로 연락하시면 됩니다.”

서진이 비서 연락처가 있는 명함을 건네주자 사장은 허리를 숙이며 두 손으로 받아 챙겼다.

“어이구, 감사합니다.”

그 후 가죽 거래는 원활히 성사되어 평균 시세보다 낮은 가격으로 살 수 있었다.

거래를 마치고 공방에서 나오는 길에 설하윤은 서진을 바라봤다.

“서진 님은 가문 경영도 잘하실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러고 보니 하윤 씨에게 칭찬 듣는 건 처음인 것 같네요.”

“음, 그러면 앞으로 많이 하겠습니다.”

서진과 설하윤은 동시에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가문의 공방으로 갑시다.”

“예.”

**

‘결국 샀구나.’

미행을 하던 적호검가의 헌터는 무언가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예일 공방의 사장을 2교대로 근무하며 행적을 기록해왔는데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아냐, 차라리 잘 된 일이지.’

비교하자면 허탈함보다 후련한 감정이 더 컸다.

언제까지고 이딴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리고 흑룡검가의 한서진이 구매했으니 뒤탈도 적으리라.

잠시 후, 그는 이번 일을 지시한 적호가주의 둘째 아들에게 보고했다.

“도련님, 드레이크의 가죽이 한서진에게 넘어갔습니다.”

“거기서 한서진이 왜 나와?”

정보팀의 헌터는 오늘 지켜본 모든 과정을 설명해주었다.

가주의 차남인 박연우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 새끼는 왜 갑자기 나타나서 지랄이냐고!”

조금만 더 흔들면 가죽을 뱉어냈을 텐데.

최상급에 해당하는 A급 가죽 갑옷이 물 건너갔다고 생각하니 열불이 치솟았다.

쾅!

박연우는 손에 잡히는 재떨이를 벽에 집어던졌다.

“하, 시발.”

정보팀 헌터는 그게 습관인 걸 알기에 표정 관리를 했다.

그는 박연우의 화가 조금이나마 가라앉은 후에 조심스레 입을 뗐다.

“예일 공방은 어찌할까요?”

“손 떼.”

“...알겠습니다.”

직원은 내심 매우 놀랐다.

저 성질 더러운 개가 웬일일까.

대놓고 사장을 패진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엿을 먹일 줄 알았는데.

하지만 뒤에 이어진 그의 말에 생각이 중단되었다.

“이번에 형이 던전에서 아티팩트 발견해서 재미 좀 봤던데 그런 던전 없는지 한번 찾아봐. 역시 만드는 아이템보다 그게 낫지.”

“예.”

아이템은 사람이 제작하는 것이고 아티팩트는 던전이나 밖에서 자연적으로 물건에 효과가 부여된 귀한 유물이다.

그런 던전 찾는 게 어디 쉽나.

그래도 의미도 없는 괴롭힘보단 훨씬 낫겠지.

그는 안도감과 귀찮음이 뒤섞인 한숨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리고 한서진 그놈에 대해선 주기적으로 동태를 파악하고 보고해.”

“알겠습니다.”

어쩐지 그냥 지나가나 했다.

**

서진은 흑룡가의 공방 내의 8구역에 도착했다.

철을 두드리는 10구역에 비해 무두질하는 8구역은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서진은 강주표 야장이 추천해준 사람을 찾아갔다.

그는 의자에 앉아 차분하게 가죽을 재단 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엇.”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신사의 이미지를 풍기는 그는 서진을 보며 일어났다.

“직계 분이시군요. 도경인입니다.”

서진은 어렵게 구한 A급 재료 두 개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옷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도경인은 드레이크의 가죽을 펼쳐보며 말했다.

“이 정도 양이면 외투는 충분히 가능할 듯 합니다. 그리고 디자인하기 전에 치수를 재야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네.”

도경인은 자신이 직접 하나씩 부위를 재며 치수를 적어갔다.

“명장님은 제자는 안 두십니까?”

“누굴 가르치는데 소질이 없기도 하고 혼자가 편합니다. 그리고 제작 기간은 보름 정도 걸릴 듯합니다.”

“그럼 그때 찾아오겠습니다.”

**

어둠이 내려와 창문을 통해 달빛이 비치는 방 안.

의자에 앉아있는 노인과 젊은 여성이 마주 보고 있었다.

“클레나.”

“예, 스승님.”

게일러는 자신의 방으로 제자를 부른 참이었다.

흑룡가에 갇혀있는 연구원을 탈환하기 위해.

적륜성주에게 나선다고 했지만, 당연히 자신이 직접 할 생각은 없었다.

흑룡가주를 직접 상대하는 일이라면 모를까.

그 아랫것들은 자신이 나서기엔 급이 맞지 않는다.

“너도 다넬이 죽은 건 들었겠지.”

“네.”

“그놈이 일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바람에 상당히 골치 아프게 됐어.”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마나를 못 쓰게 만들어준 영역에서 흑마법사가 죽다니.

한때 제자로 삼았던 과거조차 없던 일로 하고 싶을 정도였다.

“불가피하게 네가 해줘야겠다.”

“어떤 일인지요.”

“네가 할 일은 연구소장 하나만 빼내면 된다. 괜히 욕심내서 인원 늘릴 생각하지 마라. 그러다 실패하면 너도 다넬을 따라가게 될 거다.”

스승의 잔혹한 경고에도 그녀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명심하겠습니다.”

**

다음날, 서진은 감찰각으로 향하고 있었다.

현재 연구소 직원들은 전부 감찰각의 뇌옥에 가두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뇌옥에서 일주일 정도 심문을 하고 나면 마관청으로 옮기게 된다.

오늘로 5일 차기에 이제 이틀이 남았다.

사실 흑룡가의 가풍상, 키메라에 대한 관심도 적고 이미지도 좋진 않지만 서진이 밀어붙인 결과였다.

가문에 쌓이는 정보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또 그만큼 이번 일에 대한 서진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감찰각주. 심문은 어디까지 진행됐지?”

“자료에 나와 있는 내용의 80%까지 확인했습니다. 계속 교차 검증을 하고 있지만 특이점은 없습니다.”

“그 정도 속도면 마관청에 넘기기 전까지 끝낼 수 있겠네.”

감찰각주는 목을 한번 다듬고 말했다.

“큼, 그래서 말인데 연구에 대한 심문은 빠르게 끝내고 적륜성 쪽으로 진행해볼까 하는데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해.”

“알겠습니다.”

서진은 뇌옥에 있는 직원들을 한번 훑어보고 밖으로 나왔다.

뇌옥의 입구에는 감찰각의 헌터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서진은 그들을 유심히 보다가 누군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서진 님!”

홍세인이 넥타이를 휘날리며 다가와 멈춰 섰다.

“오후 2시에 저희 청장님하고 약속 있던 거 잊지는 않으셨죠?”

실은 완전히 잊었지만 서진은 아무렇지 않게 시계를 보며 말했다.

“10분 남았으니 딱 맞네. 지금 가지.”

접빈실에 가니 마관청장이 일어나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 한 팀장님. 정말 반갑습니다.”

한국에서 마력과 관련한 일은 모두 주관하는 수장치곤 굉장히 허리가 유연했다.

물론 서진이 이룬 성과에 대한 존중이 담겼기에 나오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선물입니다.”

마관청장은 천으로 정성스럽게 포장한 상자를 내밀었다.

헌터의 마나 증진에 도움이 되는 물약이 들어있었다.

“감사합니다.”

선물을 옆에 놓은 서진은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여기까지 어쩐 일로 직접 오신 겁니까.”

마관청장이 단순히 얼굴 보러 왔을 리 없으니까.

“얼굴 보고 선물도 드릴 겸 해서 왔습니다. 그간 신세를 많이 졌는데 한 번이라도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아서 말이죠.”

마관청장은 앞에 서론을 깔고 본론을 꺼냈다.

“그리고 실은 요즘 유니온의 체이서와 같이 다니던 멤버의 행적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어서 그걸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행적이라면 어느 정도로?”

“아직은 힘겹게 뒤를 쫓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현지 과장의 능력이 더 오르거나, 그 멤버의 상태가 안 좋아지는 일이라도 발생하면 그림자 정도는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

감찰각의 뇌옥 앞을 지키고 있는 헌터 두 명은 졸음을 참고 있었다.

왼쪽에 선 짧은 머리의 남자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하암. 잠 엄청나게 오네. 비가 와서 그런가?”

“원래 비 오는 소리가 은근히 수면 유도제야. 그런 영상들도 많잖아.”

“진짜 당장 여기 누우면 잘 수 있을 것 같아.”

“비 오는 땅바닥인데? 그건 좀.”

짝.

오른쪽에 선 헌터는 뺨을 치며 정신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런 고전적인 방법으로 마기가 깃든 수면 마법을 버텨낼 순 없었다.

우측에 선 헌터는 이윽고 깊은 잠에 빠져 눈을 감았다.

하지만 좌측에 섰던 헌터는 멀쩡한 상태였다.

그뿐만 아니라 친근한 인상을 보여줬던 그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있었다.

그리고 그는 언락 마법으로 뇌옥의 문을 열었다.

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사일런스 마법을 펼친 상태였다.

탈환은 이번 한 번만으로 끝내야 한다.

마관청으로 넘어가게 되면 조용히 꺼낼 기회는 없을 테니까.

클레어는 주변을 다시 확인하고 환영계 마법인 일루전을 발동했다.

입구엔 아까처럼 두 명이 멀쩡하게 서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1단계는 클리어.’

그녀는 연구소장을 꺼내 주기 위해 뇌옥으로 들어갔다.

뇌옥의 내부에도 경비를 서는 헌터가 있기에 그녀는 긴장감을 놓지 않았다.

‘슬립.’

소리 소문 없이 데리고 가려면 헌터 먼저 잠재워야 한다.

툭.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의식이 끊어진 헌터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마나보다 음습하고 은밀한 마기는 이런 마법에 특화되어 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거기다 전부 클레어보다 레벨이 낮은 헌터였으니.

이윽고 내부의 모든 헌터와 인질들이 잠에 들었을 때, 그녀는 발걸음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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