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주목을 받은 직원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한서진을 시험해본 거 아니겠어?”
“시험?”
“응, 가주님이야 키메라가 탐탁치 않을 테니 연구소장을 놓쳐도 별 상관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이해를 못 한 직원들도 있었다.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흑룡대는 철저히 가주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곳이잖아. 흑룡대장이 사전에 알아차리고 보고했을 때 가주님이 놔두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지.”
“아하, 일리가 있네.”
“아니면 흑룡대장도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에이, 설마.”
“아냐, 난 그럴 수도 있다고 보는데? 흑룡대장이라 해도 그날 뇌옥 근처도 안 갔으면 모를 수 있지 않을까.”
그 말에 일부는 납득했다.
“그래서 범인은 누구인 거야?”
“우리야 모르지, 자세한 정보는 안 알려졌으니까.”
**
다음날 오전, 서진도 비슷한 질문을 감찰각주에게 던졌다.
“뭐 나온 거 있어?”
이번 사건의 시작점이었던 뇌옥의 주변에는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연구원들은 이미 마관청에 넘겼기 때문에 흑룡가 헌터들만이 조사를 위해 텅 빈 뇌옥을 오가고 있었다.
“잔여 마기나 건물 내부에 흑마법을 새기고 가진 않았는지 꼼꼼히 확인하고 있습니다만 아직까진 없습니다.”
“그럴 거야.”
서진도 어제 뇌옥을 둘러봤지만 마기에 관련한 이상 징후는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저 그런데 서진 님.”
“왜.”
“혹시 이번에 침입한 흑마법사의 정체에 대해 짐작하시는 것이 있습니까?”
“각주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적륜성과 연결돼있긴 할 텐데 그 이상은 잘 모르겠습니다.”
감찰각주가 연구소장과 선임연구원을 집중적으로 심문했지만 유의미한 정보를 얻진 못했다.
연구소의 직원들이 접했던 흑마법사는 다넬 한 명뿐이었고 그마저도 자세히는 모르고 있었다.
확실한 건 키메라 연구에 있어서 서로 협력관계였다는 것뿐.
정말 철저하게 정보가 차단되어 있었다.
어쨌든 적륜성과 흑마법사 사이에 연결점이 있는 건 확실하다.
그러니 더 위를 파보면 깊은 관계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서진은 이 부분에 대해 감찰각주에게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감찰각은 가문 내 단체와 구성원에 대해 감찰을 하는 곳이지 외부의 정보를 얻어오는 조직이 아니었기에.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조직의 성격과 어긋나는 지시는 자제해야 했다.
그리고 이 경우엔 은월각이 훨씬 적합했다.
서진은 생각난 김에 가볍게 물어봤다.
“감찰각주, 새로 임명된 은월각주는 어떤 사람이지?”
“아, 조심스럽고 신중한 성격입니다. 특히나 전임자가 그 사건으로 나가서 그런지 요즘 더욱더 그렇구요.”
“그리고 가주님의 눈치를 많이 살피고 있는 친구라 이번 사건에 대한 정보를 깊게 확보할 마음도 없을 겁니다.”
“그렇군.”
그 후에 서진은 구현수 비서와 정보건에게도 은월각주에 대해 물어봤지만 비슷한 대답을 들었다.
그렇다면 일단 놔둬야겠지.
은월각의 도움을 받기엔 시기상조인 것 같으니.
어차피 연구소는 마관청에서 추가적으로 조사를 해나갈 테니까.
당장은 은월각의 도움이 없어도 괜찮다.
물론 언젠간 필요할 때가 오겠지만.
**
흑룡가에서 서진의 활약상이 퍼져나갈 때, 어느 곳에선 그의 이름만 듣고도 이를 가는 사람이 존재했다.
바로 한재열의 어머니인 이혜린이었다.
“한서진...”
그놈 때문에 후계 자리에서 밀려난 아들은 거의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태평한 남편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남편은 아들을 종종 위로할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다.
누군가는 방목이라 할지 몰라도 이혜린이 보기엔 방치나 다름없었다.
가문의 후계 다툼에 관심이 없는 자녀라면 저런 방식이 좋겠지만 적어도 한재열에겐 아니었다.
아들이 소가주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는 남편 때문에 그녀의 가슴만 터질 뿐이었다.
남편은 한서진이 가주가 되어도 지금과 같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걸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이혜린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가주인 시아버지와 항상 가까이 있는 사람.
그녀는 김형석 비서에게 연락했다.
**
“실장님, 재열이 이대로 계속 놔둘 건가요.”
김형석 비서와 마주 앉은 이혜린은 참았던 말을 토해냈다.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가주님이 한번 내린 결정은 번복 안 하시는 거.”
“그렇지만 고작 무구예식 한번 졌다고 이러는 건 심하죠. 실장님도 그리 생각하지 않으세요?”
“단순히 패배해서 그런 게 아니라 가주님의 심기를 건드리는 바람에 그리 된 거라 말씀드렸을 텐데요.”
이혜린은 그 점이 납득하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홧김에 그랬다는 건데, 이제 시간도 지났으니 다시 후계자로 올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결정권이 있는 건 아니지만 가주님의 성정을 고려하면 힘들 것 같습니다.”
계속되는 부정적인 답변에 이혜린의 눈빛엔 독기가 서렸다.
“실장님이 그리 말할 정도면 아버님에겐 물어볼 필요가 없겠네요.”
드륵.
이혜린은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는 아들에게 향했다.
**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고.
한동안 술에 취해 살았던 한재열은 오랜만에 말끔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어머니 말대로 언제까지나 폐인처럼 지낼 수는 없다.
희망이 없으면 강제로라도 만들면 된다.
후계자에서 박탈당했으면 자신 외에 후계자가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둘째 형은 해외에 있으니 보류하고 우선은 한서진이다.
자신이 넋 놓고 지내는 동안 한서진이 많은 일을 해냈다는 걸 들었다.
이대로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다면 나중엔 닿을 수 없을 만큼 격차가 벌어지겠지.
그렇기에 한시라도 빨리 한서진을 잘라내야 한다.
달칵.
한재열은 누군가 문을 여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오랜만입니다.”
한재열이 부른 자호대의 부대장, 함가원이었다.
“무슨 일로 부르신 겁니까.”
함가원은 이미 망해버린 한재열의 호출이 너무 거북했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가 쥐고 있는 자신의 약점이 있기 때문에.
그렇기에 용건을 바로 말하길 재촉했다.
반면 한재열은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입을 열었다.
“부대장이 불안해하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이번이 마지막일 테니까요.”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함가원은 눈매를 좁혔다.
“무슨 말입니까.”
“이번 부탁만 들어주면 녹취본을 없애 드리죠.”
함가원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한재열이 가지고 있는 그의 약점.
그것은 과거에 어떤 자호대원의 유언이 담긴 녹취본이었다.
함가원은 겨우 잊었던 과거가 다시 떠올랐다.
자호대의 부대장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동료를 던전에서 죽였던 그 날.
절묘한 상황에 몬스터의 도구로 찔렀기 때문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목숨을 완벽히 끊지 못한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순간의 망설임 때문인지 녀석은 미약하게 숨이 붙은 채로 병원에 실려 갔다.
그렇게 의식을 잃은 채 누워있다가 죽기 직전 잠시 정신이 돌아왔을 때, 당시 옆에 있던 한재열에게 유언이 전달된 것이다.
그 후로 한재열은 필요할 때마다 자호부대장을 적당히 이용해왔다.
그러다가 한재열이 후계자의 위치를 박탈당했다고 들었을 땐, 함가원은 불안감을 느꼈다.
궁지에 몰린 한재열이 녹취를 공개하진 않을지.
찾아가면 괜히 한재열을 자극할까 봐 근처에도 가지 않았는데 결국 이렇게 된 것이다.
“그걸 없앤다는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자호부대장의 걱정은 너무도 당연했다.
다른 곳에 저장된 곳이 없을 거라 확신할 수 없으니까.
“저는 진심이지만 자호부대장의 지적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걸 받으세요.”
한재열은 소형 녹음기를 켜서 함가원에게 던졌다.
“자호부대장, 나는 한서진을 죽일 겁니다.”
“네?”
“지금부터 한서진을 죽일 계획에 대해 설명할 거고 조만간 실행할 겁니다.”
“그게 무슨.”
“이러면 부대장의 걱정을 조금 덜어낼 수 있겠죠?”
약점에는 약점으로.
녹취본이 사라진다는 확신은 절대 줄 수 없다.
그러니 한재열은 자호부대장에게도 비슷한 약점을 쥐여주었다.
그만큼 이번에 자호부대장에게 맡기는 임무가 한재열에겐 굉장히 중요하단 의미였다.
함가원은 손에 들린 녹음기가 무척이나 무겁게 느껴졌다.
마치 혹을 떼고 싶었는데 혹이 하나 더 붙은 기분.
아무리 후계 다툼이 권장되는 흑룡검가라도 이건 명백히 범죄에 해당한다.
“만약 거부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그런 선택지는 없어요. 함가원 부대장.”
함가원은 마치 상쾌하게 대답하는 한재열의 얼굴이 너무나 싫었다.
그리고 한재열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듣기로 2주 후에 자호대장으로 진급한다고 하던데. 녹취본 퍼지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하아아...”
그의 말처럼 함가원은 결국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계획이 뭡니까.”
함가원은 녹음기를 만지며 의자에 앉았다.
**
❴한서진❵
【레벨】6
【특성】투신전[1]
【스텟】근력292 체력289 민첩295
마력309 지력293
【스킬】흑룡검술(6성) 투신공(6성) 점멸(5성) 용체화(해츨링)
【상태】마광병 6.3% 진행
한동안 바빠서 잘 열어보지 않았던 상태창은 여러 가지가 달라져 있었다.
우선 서진에게 제일 먼저 보이는 건 마광병의 진행 상태.
대환단의 약발이 잘 받은 건지 침식 속도는 이전보다 느린 편이다.
다만 최근에 외부 일 때문에 던전을 많이 돌지 못했다는 걸 생각하면 마냥 좋아할 순 없다.
‘이전처럼 던전에서 매일 같이 사냥하면 어떨지 모르겠군.’
그래도 진행이 빠르다 싶으면 영약을 구해서 낮추면 되지 않을까.
두 번째부턴 내성이 생겨 하락 폭이 낮을 수 있지만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할 일.
서진은 시선을 조금 위로 올려서 스킬란을 봤다.
이미 끝을 봤던 흑룡검술과 투신공은 자동으로 6성이 되었지만 나머지 두 개는 아니었다.
특히 용체화의 숙련도를 올리려면 평소에도 마나를 움직여야 하지만 항마제를 달고 사는 서진에겐 무리였다.
그리고 제일 위에 있는 반가운 알림.
레벨이 하나 올라가서 투신전에 가신을 한 명 더 추가할 수 있게 된 것.
투신공의 성취에 따라 흡수되는 스텟량이 늘어나긴 하지만 가신의 추가에 따른 상승량엔 못 미친다.
그러니 늦게 추가할수록 손해를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
서진은 지금 당장 철혈백가에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다만 그 전에 백화연이 어디에 있는지는 확인해야겠지.
서진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두세번 울렸을 때 백화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서진 맞아? 왠일이야. 한번도 전화 안 하더니.
“궁금한게 있어서. 지금 어디 있어?”
-지금? 우리 가문에.
“그리고 전에 약속 했던 조건 말인데.”
-갑자기 그건 왜?
백화연은 괜히 불안한 듯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지금 그거 때문에 가려고 하거든.”
-뭐?
백화연의 위치를 확인한 서진은 전화를 끊고 철혈백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