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서진은 설하윤과 함께 차를 타고 철혈백가에 도착했다.
전화로 말을 해놓은 덕분에 서진은 가주실까지 안내를 받으며 통과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달하고 문이 열리자 곧바로 가주가 머무는 곳이 나타났다.
높게 솟은 철혈백가의 건물은 옆으로 길게 뻗은 흑룡검가와 꽤나 대조적이다.
지극히 현대적인 감각으로 이루어진 실내 디자인 또한 서진에겐 오히려 신선했다.
여태 본 가주실이라곤 흑룡검가뿐이었으니.
“빨리 왔네.”
서진은 주변을 보느라 놓쳤던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무언가 못마땅한지 아니면 긴장이 되는지 백화연은 팔짱을 끼고 앉아 서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빨리할수록 좋은 거라서.”
서진의 말에 옆에 있던 민나희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휴우, 그래 뭔지 들어보자. 궁금하네. 그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다는 게.”
“여기서 바로 말하긴 좀 그런데.”
“뭐가?”
“중요한 얘기라서 둘만 있어야 하거든.”
자연스레 민나희는 경계심을 담은 눈빛을 쏘아 보냈다.
너무나 수상하지만 저번 창피한 일 때문에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리고 미심쩍은 건 백화연도 마찬가지였다.
“꼭 둘만 있어야 해?”
“어.”
대답하는 서진의 모습은 더없이 진지했다.
헌터의 능력 중에 공개될 수밖에 없는 게 있는가 하면 숨겨야 좋은 것도 있기 때문이다.
투신전과 연관된 능력은 무조건 후자에 해당한다.
백화연은 처음에 서진이 농담하는 줄 알았지만 분위기를 보니 그건 아니었다.
‘애초에 이런 걸로 장난칠 녀석이...’
그녀는 순간 느껴진 괴리감이 멈칫했다.
스무 살 이전에 사고를 당하기 이전의 한서진이라면 그럴수도 있었으니까.
최근의 한서진이야 많이 달라졌지만.
“좋아. 저기에 따로 방이 있으니까 저 방에서 얘기해.”
백화연은 지문으로 방문을 열고 서진을 들어오게 했다.
“이제 말해봐.”
이제 둘만 있게 된 상황에서 백화연은 궁금증에 재촉했다.
서진은 어디서부터 얘기할지 고민이 되었다.
스텟이 오르는 것까지?
‘그건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투신전이라는 스킬이 있고 이것은 가신이 늘수록 좋다는 정도까지.
물론 가신에 대해선 상세히 설명.
‘이게 낫겠네.’
서진은 대략적인 기준을 정하고 투신전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말을 듣는 동안 백화연의 표정을 딱히 변함이 없었다.
가만히 듣던 그녀는 설명이 끝나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흐음. 투신전이 정확히 너에게 어떤 식으로 좋은지는 불명확한 것 같은데.”
백화연은 단번에 서진이 적당히 설명한 지점의 부실함을 지적했다.
서진은 굳이 부정하지 않고 선선하게 인정했다.
어렸을 때를 생각해도 말재간으로 서진이 백화연을 이긴 적은 없었으니까.
“뭐, 그렇지. 근데 너한테 크게 중요한 건 아니야.”
너무나 시원한 대답에 백화연은 순간 말이 막혔다.
“...이전보다 달라졌다고는 생각했는데. 많이 뻔뻔해졌네.”
그녀는 황당한 듯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나빠졌다는 의미로 말한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마. 그래서 가신 제안을 받으면 나도 스킬이 생긴다는 말?”
“그렇지.”
백화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투신의 가호라는 스킬은 설명만 들으면 안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서진이 자신을 이용해 무언가 이상한 짓을 꾸미진 않겠지만 낯선 가신의 제안은 갖가지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약속했는데 거절하기도 힘들고.
고민에 빠진 백화연은 곧 서진과 같이 온 그녀가 떠올랐다.
“아, 너랑 같이 온 분도 가신이라고 했었지?”
“그랬지.”
“그럼 그분이랑 둘이서 잠깐 얘기 좀 나누고 싶은데, 괜찮을까?”
“그러던가.”
서진은 밖에 있던 설하윤을 방으로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철혈가주가 하윤 씨랑 그 스킬 관련해서 얘기하고 싶다네요.”
“네?”
서진은 당황해하는 설하윤의 등을 떠밀며 방에 들여보냈다.
그리고 5분 정도가 지났을 때, 다시 방문이 열렸다.
“끝났어?”
둘이 무슨 얘기를 했는진 모르지만 백화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할게.”
서진은 상태창을 열어 투신전 창에서 백화연의 이름을 눌렀다.
이미 결정한 백화연은 망설임 없이 승낙했고 서진에게 확인 창이 나타났다.
[‘백화연’이 가신으로 들어왔습니다]
드디어 두 번째 가신이 추가되었다.
서진은 던전에 가고 싶은 생각에 마음은 이미 철혈백가를 떠난 상태였다.
“이제 됐지?”
“응. 근데 벌써 가려고? 곧 점심인데 같이 먹지?”
“할 일이 생겨서.”
그렇게 서진과 설하윤이 떠나고 난 뒤 백화연도 새로 생긴 스킬을 보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
서진이 탄 차가 철혈백가 정문을 통과했을 때 전화가 울렸다.
발신인을 보니 구현수 비서였다.
“예, 무슨 일입니까.”
-저번에 서진 님이 의뢰했던 옷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요? 하윤 씨 일단 옷 찾으러 갑시다.”
“예.”
던전으로 가던 차는 방향을 틀어 흑룡가의 공방으로 향했다.
잠시 후 서진이 공방에 도착해서 8구역에 가니 도경인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가왔다.
“생각보다 빠르게 만들어졌습니다. 한번 입어보시죠.”
서진은 옷을 입으며 아이템 창을 띄웠다.
[반룡포(半龍袍)]
-등급 : 영웅
-내구도 : 3200/3200
-효과
1. 착용자의 의지에 따라 최대 500% 팽창.
2. 마법 피격 시 20% 흡수.
3. 전체 물리 공격에 대해 30% 내성.
옷이 맞는 걸 확인한 도경인은 짧게 덧붙였다.
“옷에 한 번 마나를 넣어보시겠습니까.”
그의 말대로 마나를 넣으니 옷이 늘어났다.
“옷의 면적이 넓어진다고 효과가 감소하거나 그러진 않습니다.”
타란툴라의 실타래와 드레이크의 가죽이 만나니 마음에 드는 장비가 탄생했다.
방어력이 쓸만한데 딱딱한 갑옷이 아니라서 움직임도 전혀 방해되지 않았다.
“좋네요.”
“저야 만족해주시니 기쁠 따름입니다.”
이제 좋은 물건을 얻었으니 테스트를 해보러 가야겠지.
효과가 올라간 투신공도 확인할 겸.
서진은 바로 던전으로 향했다.
**
“걸렸다.”
한서진과 설하윤이 던전에 들어갈 때, 그것을 망원경으로 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여기 B2. 목표물 입장했습니다.”
정보는 다른 던전 근처에서 잠복 중이던 헌터들에게 전파되었다.
그리고 하나둘씩 서진이 들어간 던전 앞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중엔 흑룡가에서 연락을 받고 도착한 자호부대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짜 그때 말했던 방법으로 잡아냈군.’
함가원은 한재열과 나눴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어떻게 죽인다는 겁니까. 결코 쉽진 않을 텐데.
-실행 장소는 던전입니다.
-던전이라면 뒤처리야 깔끔하겠지만 한서진이 어떤 던전에 들어갈지 모르잖습니까.
서진의 공략 던전은 정보건 1팀장이 관리하기 때문에 예전처럼 맘대로 엿볼 수가 없다.
-그거야 직접 보면 되는 일이죠. 어디 갈지 모른다 해도 각 던전에 한 사람씩 배치하면 걸려들게 돼 있어요.
-계획에 참가한 인원이 많으면 안 좋을 텐데요.
-걱정 마세요. 던전을 추려서 배치할거고, 좋은 약도 있으니까. 부대장은 그들을 잘 이끌며 확실하게 한서진을 죽이기만 하면 됩니다.
함가원은 사실 지금도 자신이 잘하고 있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전에 한서진의 눈빛을 봤을 때를 생각하면 불안감이 조금씩 생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한서진에게 사실을 밝히고 도움을 요청하기엔 자신이 과거에 건넜던 강은 돌아오지 못할 수준이니까.
차라리 이번에 한서진을 죽여서 불안감을 해소하는 계기로 삼는 편이 나으리라.
함가원이 마음을 다잡는 사이 던전관리자는 다른 헌터가 이미 처리한 상태였다.
던전 입구 앞에 모은 스무 명의 헌터는 한재열이 말했던 의문의 약을 삼키고 있었다.
함가원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후계자에서 밀려났어도 이 정도의 외부 헌터를 동원할 힘이 남아있다는 것이.
역시나 흑룡가의 직계 혈손이라는 걸까.
함가원은 허리춤에 차고 있는 마력탄과 가스탄을 만지작거렸다.
온갖 무기가 오가는 헌터 시장에서도 금기로 취급받는 아이템.
한서진 옆에 설하윤까지 있음에도 작전의 성공을 믿게 만드는 물건이었다.
거기다 찜찜하지만 한재열이 자신했던 약을 먹은 20명의 헌터까지.
이 정도면 불안감을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함가원은 준비를 마친 그들에게 말했다.
“이제 들어갑시다.”
**
콰앙.
이번에 서진과 설하윤이 들어온 던전은 골렘이 있는 곳이었다.
“우어어어!”
위압감을 자아내는 크기의 골렘이지만 서진에겐 다소 아쉬웠다.
속도가 느려 전투의 재미는 그다지 없었기 때문.
물론 즐기자고 들어온 것은 아니기에.
퍼억!
새로 얻은 반룡포의 성능 실험이 한창이었다.
마나만 넣으면 한계까지 늘어나는 옷을 실험하기에 골렘은 딱 적당했다.
공격력에 비해 속도가 느린 만큼 옷의 방어력을 세세하게 체크할 수 있었으니까.
콰르르.
눈앞의 골렘을 무너트리고 나서 설하윤이 다가왔다.
“서진 님, 옷은 어떻습니까?”
“쓸만합니다. 늘렸다 줄였다 하는 소소한 재미도 있고.”
서진은 던전 앞을 응시하며 말했다.
“이제 조만간 더 가면 끝이죠?”
“예, 끝에 제일 큰 문을 열면 나오는 녀석만 처리하면 됩니다.”
“빨리 끝나서 조금 애매하네요.”
“그럼 다른 던전 한 번 더 가시죠. 저는 괜찮습니다.”
서진이 아쉬워한 이유는 투신공 때문이었다.
투신공은 강한 몬스터 혹은 사람일 경우에 스텟 상승 폭이 높은데 이 던전에선 둘 다 없으니까.
최근 크라켄 같은 A급 보스 몬스터나 헌터를 상대로 투신공을 쓰다 보니 상대적으로 부족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주변에 죽이려고 덤벼드는 헌터가 있는 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이 당분간은 적당한 던전으로 스텟을 올려야겠지만 말이다.
‘음?’
하지만 서진의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진의 등 뒤에서 여러 기척이 느껴졌기에.
그 말은 입구에서 누군가가 들어왔다는 뜻이다.
물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던전의 특성상 숨어있던 몬스터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서진이 감지한 기척은 확실히 사람이었다.
그것도 마력이 있는 헌터.
“서진 님.”
설하윤도 안색을 굳히고 검을 고쳐 잡았다.
어떤 놈들인지도 모르기에 그녀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너무 긴장하진 마세요.”
그녀와 반대로 서진은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골렘만으론 부족하다고 느낀 순간에 제 발로 스텟 먹잇감이 나타나다니.
이계에서 괜히 투신이라고 부른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서진에겐 이 상황이 즐거웠다.
부디 잘못 들어온 공략팀 같은 게 아니길.
서진이 바라고 나서, 마침내 던전 안쪽까지 들어온 놈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자호부대장?”
설하윤은 믿기지 않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적의를 드러냈다.
“여기엔 무슨 일로 온 겁니까.”
“걱정되어서 왔다고 하면 믿을 건가요.”
“그럴리가요.”
설하윤의 검신엔 보이지 않는 검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함가원은 마력탄과 가스탄을 꺼내 들며 말했다.
“저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만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에 서진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답답하니까 던질 거 있으면 빨리 던지고 시작하지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