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람을 바라봐도 개인마다 천차만별의 생각을 품게 되기 마련이다.
현재 자호부대장과 그 외 스무 명의 헌터도 마찬가지였다.
그중 헌터들의 리더, 레이븐 길드장 장두일은 특히나 남다른 감상을 느꼈다.
물론 길드의 실질적 주인은 한재열이었지만.
‘저놈이 한서진이군.’
장두일은 팔짱을 끼고 서진을 훑어봤다.
‘6레벨이라.’
만만치 않은 수준인 건 사실이다.
명문가의 자제가 나이에 비해 레벨이 높은 게 놀랄 일은 아니지만 한서진의 경우는 많이 특별했다.
거의 넉 달만에 쌓아 올린 경지였으니.
마흔 가까이 되는 나이에 5레벨에서 머물러 있는 자신과 더욱 비교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레벨이 전부는 아니지.’
일종의 자기 위안이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레벨을 올리는 방식에 따라 같은 레벨이라도 실질 무력의 편차가 크기도 했다.
실전에서 구른 3레벨 헌터가 곱게 성장한 5레벨 도련님을 이기는 사례도 있을 정도니까.
다만 언론에 공개된 한서진의 행보를 보면 도련님 케이스와 거리가 멀었다.
일반적인 헌터 상식과 언론에서 떠드는 얘기가 상충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일지.’
장두일은 마음을 무겁게 먹고 도끼를 강하게 쥐었다.
두근.
던전 입장 전에 삼킨 약 때문인지 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빨라진다.
체내의 마나 순환도 점점 가속화되고 있었다.
‘조금 이상한데.’
한재열이 주는 약을 먹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전에도 필요할 때마다 먹어왔지만 오늘은 유독 거친 느낌.
‘한서진과 저 호위가 강하니 그만큼 약발이 강한 걸 준 건가.’
하지만 약에 대해 길게 생각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자호부대장과 설하윤의 짧은 대화가 끝나고 두 개의 폭탄이 전투의 시작을 알렸기 때문에.
**
서진은 폭탄의 체공 시간마저 지루했기에 땅을 박차며 놈들에게 접근했다.
저마다의 몸에 미세하게 둘러싸고 있는 막은 저 폭탄에 대비한 보호 마법이겠지.
이윽고 낙하한 두 종류의 폭탄이 터지며 자욱한 연기를 자아냈다.
‘독하고 마나 장애 종류인가.’
헌터에게 치명적인 디버프지만 서진은 개의치 않고 검을 크게 휘둘렀다.
흑룡검술 제4식 만천뇌우.
수천 가닥의 번개 바늘이 서진의 검에서 터져나갔다.
“아아악!”
범위를 넓게 퍼트리면 화력이 분산되지만 그마저도 못 막는 헌터도 존재했다.
“수준이 높진 않군.”
서진은 다소 실망했지만 본인을 과소평가했기에 나온 평가였다.
아무리 분산되었다 하더라도 3레벨급에선 반응조차 하기 힘든 기술이었기에.
하지만 마약의 효과가 제대로 들어간 헌터들은 가벼운 상처에서 그쳤다.
“흔들리지 말고 진형을 유지해!”
장두일은 서진의 공격 한 번에 흔들리는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으아아!”
길드장의 지시에도 무언가 본능을 참지 못한 길드원 몇이 튀어 나갔다.
노골적이며 원초적인 살의는 서진에게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근력이 10 상승합니다]
[민첩이 11 상승합니다]
느껴지는 마력 수준으로 볼 때 3레벨인데도 흡수되는 스텟이 적지 않다.
이전에 A급 크라켄을 상대할 때 스텟 하나당 [7] 정도 올랐던 걸 생각하면 준수한 상승 폭이었다.
“완전히 스텟 밭이네.”
다만 한번 강하게 투기를 발산하고 나면 두 번은 없는 게 아쉽다.
그렇기에 서진은 미련 없이 베어 넘겼다.
파지직!
마나 장애를 일으키는 옅은 안개가 펼쳐져 있지만 용체화 발동으로 해결이 되었다.
마경에서 겪은 결계에 비하면 버틸만한 수준.
사실 마나 대신 투기를 꺼내면 마나 장애에 얽매이지 않음에도 쓰지 않는 이유는 하나.
스킬은 마나를 통해 발동할 수 있기 때문에.
현 상황은 서진이라 해도 스킬 없이 싸우는 여유까진 보일 수 없었다.
마력탄으로 인한 마나 장애는 용체화로 이겨내도 은근하게 몸을 갉아먹고 있는 독과,
본래 무력보다 훨씬 펌핑된 채로 달려드는 다수의 헌터.
설하윤은 서진보다 마나 장애가 더 치명적이기에 서진보다 전투가 훨씬 벅찬 상태였다.
이처럼 서진이 생각보다 고전하는 모습을 보이자 자호부대장은 자신감을 가졌다.
물론 이 모든 것의 이면에는 서진의 욕심이 깔린 결과였다.
[체력이 10 상승합니다]
[마력이 12 상승합니다]
[지력이 11 상승합니다]
이렇게 스텟이 잘 오르는데 어찌 빠르게 죽여버린단 말인가.
가능한 최대로 뽑아내야지.
그리고 서진이 검이 평소보다 무디다고 해도 이미 길드원 8명은 시체였다.
길드장 장두일은 더 이상 관망하고 있을 수 없었다.
부웅!
둔중한 파공음을 내며 서진의 머리 위로 도끼가 떨어져 내렸다.
[마력이 14 상승합니다]
서진은 알림 창을 보며 바로 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놈들의 리더라 그런지 다른 놈보다 스텟이 많이 들어온다.
그렇다면 더더욱 빨리 죽일 수 없지.
서진은 검을 들어 도끼를 비스듬히 막아서 흘려냈다.
첫 공격은 가벼운 탐색이었기에 장두일은 두어 걸음 물러섰다.
“제법이구나.”
가벼운 공격이라 해도 무기를 맞댄 순간 느꼈다.
서진이 쌓아온 검술 실력이 자신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마약을 먹지 않았다면 밀리는 것은 자신이었을지도.
장두일은 곧장 든 생각을 부정했다.
의구심은 들었지만 확신을 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장두일의 손을 타고 도끼를 감싸고 있는 마나가 화염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염월참(炎鉞慘)
맹렬한 기세의 불꽃이 도끼를 감싸며 불타올랐다.
“이제부터 가볍진 않을 거다.”
“글쎄.”
서진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이전에 5레벨 흑마법사가 만든 불길을 헤쳤던 그에게 저 정도는 감흥이 없었다.
물론 장두일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괜찮았지만.
장두일은 방심하는 듯한 서진의 좌측 어깨를 노리며 내리쳤다.
화르륵!
‘과연.’
장두일의 강점은 화염이 아니라 부술(斧術) 그 자체.
도끼의 공격 경로는 묘하게 막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더구나 무게가 실린 화염 도끼기에 어중간한 놈들은 단번에 곤죽이 될 정도.
서진은 제자리에서 풍차가 돌아가듯 몸을 틀어 회전력이 담긴 검으로 도끼를 받아쳤다.
콰앙!
위에서 내려치는 도끼와 충돌했음에도 검은 밀리지 않았다.
“제법이구나.”
장두일은 서진의 일검에 순수한 감탄을 뱉었다.
겉보기엔 쉬워 보일지 몰라도 저런 식으로 막으려다 어깨가 박살 난 놈이 한둘이 아니거늘.
그런데 젊은 나이의 서진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해냈다.
“그쪽도 생각보다 못 하진 않군.”
헌터의 실력이 어떤진 실전에서 한두 번만 붙으면 감이 오기 마련이다.
장두일 정도면 스킬을 빼더라도 기본기가 탄탄한 헌터였다.
서진의 말을 들은 그는 헛웃음을 내었다.
“젊은 놈이 참으로 건방진 칭찬이구나. 그럼 이것도 막아봐라.”
염월참환(炎鉞慘幻)
불꽃이 더욱더 화려하게 타오르며 상대방에게 강한 아지랑이를 보이게 만든다.
일종의 환각을 가미한 변칙 기술.
어지럽게 번지는 화염이 서진의 시야를 가리는 사이.
도끼는 거의 서진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부웅!
장두일의 일격은 허망하게 공기만을 갈랐다.
서진은 점멸로 이동하여 장두일의 뒤에서 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 순간 기척을 감지한 장두일도 등을 돌려 도끼면으로 검을 막아냈다.
카앙!
장두일은 염월참환이 먹히지 않자 다른 공격을 꺼냈다.
도끼를 감싼 불길이 소용돌이치면서 그의 몸 주변에도 스프링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른바 공방 일체.
화염으로 도끼의 위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자신을 보호하는 기술.
약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많이 불길이 타오르는 바람에 컨트롤하기가 힘들었다.
거기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성이 본능에 잠식되어가는 기분이지만 멈출 수 없었다.
“하아압!”
무기와 신체 전부 불길에 휩싸인 장두일의 모습은 서진이 보기에도 위협적이었다.
[마력이 13 상승합니다]
[정신이 12 상승합니다]
장두일이 필사의 의지로 내려치는 도끼.
서진은 섬아를 압축한 번개 검을 만들어냈다.
모르는 이가 보면 강맹한 기세의 도끼의 압승일 듯싶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참격을 회피한 서진의 날카로운 검 끝은 장두일의 목을 찌르려 하고 있었다.
캉!
하지만 그것은 자호부대장의 개입으로 막혔다.
장두일은 일대일은 선호했지만 작전의 성공만이 중요한 함가원으로선 그를 잃을 수 없었다.
함가원은 서진의 칼을 튕겨내고 장두일 옆에 섰다.
“숨 좀 고르시죠.”
장두일과 함가원이 물러난 순간, 레이븐 길드원들이 단체로 서진을 몰아쳤다.
그들은 이미 완전히 마약에 잠식되어 목숨을 도외시하며 서진을 급소만을 노렸다
[근력이 12 상승합니다]
[민첩이 13 상승합니다]
[체력이 10 상승합니다]
:
덕분에 스텟은 많이 올랐지만 느긋하게 여길 상황은 아니었다.
마나 장애 입자와 독이 퍼진 상황에서 용체화로 언제까지나 마나를 끄집어 쓸 순 없다.
이젠 스텟보단 상황 정리를 우선해야 한다.
전투의 목적을 바꾼 서진의 검에서 강력한 스파크가 튀었다.
파직!
흑룡검술 제6식 연폭뢰.
방어 자체를 하지 않는 놈들에게 번개를 선사하는 일은 서진에게 쉬운 일이다.
콰르릉!
갑작스러운 천둥 소리와 함께 지면에 내리 꽂힌 자색 전류.
그것은 한순간에 두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제 와서 뒤늦게 경계를 해도 늦었다.
작은 낙뢰는 차례대로 레이븐 길드원을 죽여나갔다.
그리고 16번째 벼락이 떨어졌을 때, 길드원 전부 시체가 되어 누워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한쪽에선 설하윤과 자호부대장의 일전이 한창이었다.
“후우.”
그 사이 장두일은 마약으로 인한 마나 폭주를 일정 부분 제어하는 것에 성공했다.
한 줌 가량 남은 이성으로 서진을 오롯이 쳐다보며 말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가겠다.”
“당신이 먹은 이상한 약. 알고 먹은 건가? 몸이 망가지고 있는데.”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지.”
“그런데도 싸우겠다는 건가. 한재열에게 뒤통수 맞은 것 같은데.”
장두일과 함가원은 한마디도 안 했지만 한재열의 사주라는 걸 서진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역시나 알고 있었나, 뭐 뒤통수를 맞아도 상관없다. 은혜를 입었으면 언젠간 갚아야 하지 않겠나.”
8년 전, 적대 길드에게 죽을 뻔했던 장두일이 이렇게까지 성장한 건 흑룡가 한재열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재열의 지원은 명확한 목적성을 품고 있었지만.
서진은 그 점을 짚으며 말했다.
“비록 그게 사냥개가 필요해서 베푼 은혜라고 해도?”
“어차피 난 그날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까지 온 것이 과분한 것이지.”
“그렇군.”
서진은 장두일이 이해되지 않지만 굳이 반박하려 들진 않았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법이니까.
“그리고 왜 이런 약을 챙겨줬는지 이해도 되고 말이야.”
장두일은 자조적인 냉소를 보였다.
만약 두 개의 폭탄과 약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전멸당했을 터.
자신도 약이 아니었다면 이미 서진에게 죽었을 게 분명하다.
“그게 당신의 결정이라면 어쩔 수 없지.”
파지지직!
서진은 이제 마지막이라는 듯 강렬한 자줏빛 전류를 발산했다.
장두일 또한 최후에 걸맞은 화염을 만들어 도끼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장두일이 발을 떼려고 할 때, 서진의 전광검이 펼쳐졌다.
일방적으로 거리를 좁힌 서진은 장두일의 도끼를 날려버렸다.
전광검이 끝나고 눈 깜짝할 사이 무기를 잃은 장두일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가 당황한 순간 서진은 검집을 꺼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퍼억!
천년의 묘리를 담은 충격에 장두일은 단숨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장두일은 한재열을 죽이기 전까진 살아있어야 했기 때문에.
“이제 저놈만 남았군.”
서진은 자호부대장 함가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