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함가원은 서진이 다가오는 것을 알았음에도 별다른 대응을 할 겨를이 없었다.
“큭.”
설하윤의 검격에서 도저히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처음엔 할 만했는데 설하윤의 온몸에서 은근한 붉은 아우라가 생기고 나서부터 달라졌다.
‘분명 마나 장애와 독이 동시에 옭아매고 있을 텐데...!’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함가원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서로 같은 레벨인데 어찌 이리 실력 차이가 나는 건지.
실은 투신의 가호 역할이 상당히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일시적으로 폭증한 스텟은 7레벨 초입에 다다른 상태였으며 검기도 이전보다 더욱 예리해졌다.
더불어 옅게 몸을 감싸고 있는 투기 자체가 마나 장애를 어느 정도 상쇄시켜주고 있었다.
설하윤은 서진 덕분에 강해진 투신의 가호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다시금 깨달았다.
그렇기에 함가원만큼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처리할 셈이었다.
그때, 서진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꽂혔다.
“하윤 씨, 죽이면 안 됩니다.”
설하윤은 본능을 가라앉히고 차갑게 내려앉은 이성으로 공격의 흐름을 바꾸었다.
이는 함가원 입장에서 미칠 노릇이었다.
눈앞의 설하윤도 힘든데 저기서 지켜보는 한서진이 신경 쓰여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다.
카앙!
그러니 둘의 승패는 금방 갈렸다.
그녀는 함가원의 오른 손목을 베어 무력화시키고 검을 목에 갖다 댔다.
“계속하실 겁니까.”
함가원는 고개를 젖혀 천장을 보며 허탈하게 말했다.
“하, 인생 존나 꼬였네.”
제일 큰 실책이라면 한서진의 성장 속도가 한재열의 예상을 웃돌았다는 것.
어쩌면 한재열에 약점을 잡힌 순간부터 이런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
기절한 장두일과 함가원을 데리고 가문에 도착하기 직전.
서진은 차를 멈추게 했다.
설하윤은 갓길에 주차하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이대로 데려가면 가문에 소문이 퍼질 테니 그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서진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리며 지시했다.
“하윤 씨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요. 제가 감찰각 내려보내면 그때 같이 가문에 복귀하면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계획이 실패한 것을 알면 한재열은 도주하고도 남을 녀석이다.
그러니 그전에 잡아놔야지.
서진은 제일 빠른 경로로 한재열의 집을 향해 달렸다.
쾅!
서진은 시원하게 집 현관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그러자 위층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서진은 검기로 천장을 뚫어버리고 2층으로 도약했다.
그때 창문 밖으로 나가려는 한재열이 모습이 포착되었다.
역시나 이럴 때는 눈치가 엄청 빠른 놈이다.
서진이 말없이 다가가자 한재열은 그대로 뛰어내렸다.
“허.”
이게 얼마만의 술래잡기인지.
서진은 한재열이 나간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멀어지는 한재열을 보며 작게 웃었다.
‘과연.’
무작정 도망갈 수 있다고 믿은 이유가 저것인가.
어떤 신발 아이템인지 몰라도 한번 땅을 디딜 때마다 거리가 확 벌어지고 있었다.
방향을 보니 역시 가문 밖으로 나가려는 모양이다.
서진은 마나로 다리에 힘을 실어 추격을 시작했다.
동시에 점멸까지 쓰니 둘의 거리는 금세 줄어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진은 아예 한재열을 추월할 수 있었다.
타악!
한재열의 옆을 스치며 검집으로 그의 다리를 걸자 균형을 잃고 쓰러지며 앞으로 크게 굴렀다.
스릉.
서진은 검에서 실처럼 가는 검기를 뽑아내 한재열의 아킬레스건을 잘랐다.
“아아악!”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가 한재열 바로 앞에선 서진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재열아,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했냐.”
한재열은 핏발이 선 눈으로 서진을 노려봤다.
“저보다 느긋하게 살아온 형님은 이해가 안 갈 겁니다. 재능이 없어서 기대조차 못 받았으니 압박감을 이해할 수 없겠죠.”
“내가 편하게 살아온 거로 보였다고?”
“그럼 아닙니까? 예전엔 재능 없어서 압박 없이 살아가다가 몇 달 전에 눈 뜨고 나선 운 좋게 얻은 스킬로 강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하.”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되었다.
서진이 이계에서 겪은 고생을 모른다면 그렇게 보일 수 있었다.
일반적인 상식으론 도저히 납득이 불가능한 성장 속도와 검술 실력이었으니.
어떤 헌터가 급격히 강해진다면 백이면 백 희귀하고 좋은 스킬, 특성을 얻은 경우였으니.
그리고 재능이 없어 멸시를 받았지만 가주가 될 거라 기대를 못 받은 것도 사실이긴 했다.
하지만 서진이 기억하는 한재열은 이렇게 단편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녀석이 아니었다.
“너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냐. 예전엔 이 정도로 무리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큭, 형님이 저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러십니까.”
“하긴 그건 그렇네.”
15살쯤이었나.
그 이후로 형제간의 대화는 거의 단절되었다.
그 당시 한벽호가 10레벨이 되면서 그가 가주직을 오래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가문 내 압도적인 여론이었다.
그리고 한벽호가 가주를 계속 이어가면서 자식들의 위치가 애매해져 버렸다.
가주직을 넘기기엔 한벽호에 비해 레벨이 한참 모자라고 나이도 이미 중년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결국 아들 세대를 건너뛰고 바로 손자 세대에서 후계자를 정하기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때부터 가문의 분위기, 아니 손자들을 둘러싼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나마 친하게 지냈던 사이가 멀어지고 얼어붙게 되었으니.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다다랐지만.
서진은 한재열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뭐 네가 나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지던 자유지. 그런데 나를 죽여서라도 가주가 되고 싶었냐.”
“형님도 가주가 될 수만 있다면 저를 죽였을 겁니다.”
“글쎄, 너를 안 죽여도 내가 가주가 되는 것엔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거든.”
한재열은 그 말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서진의 눈을 쳐다봤다.
하지만 금세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끝난 마당에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한재열은 이제 지쳤는지 힘을 빼고 축 늘어졌다.
열심히 발버둥을 쳐봤지만 한서진은 흔들리지도 않았다.
마치 맨손으로 거목을 밀고 있는 느낌.
어쩔 수 없이 포기하게 되었지만 그것만으로 정신이 환기되는 것 같았다.
물론 아직도 마음 한편엔 흑룡가주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었다.
반평생을 그것만을 보며 살아왔으니 당연했다.
이어지는 한재열의 상념은 서진의 말로 끝을 맺게 되었다.
“일단 자고 있어라.”
서진은 한재열을 기절시키고 들쳐 맸다.
**
설하윤이 맡고 있던 함가원과 장두일은 감찰각에 보내졌다.
그러나 이번엔 강도 높은 심문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모든 걸 포기한 함가원이 묻지도 않은 것까지 전부 불었기 때문에.
심지어 계획이 녹음된 파일까지 자진해서 넘겨주었다.
반면 장두일은 입을 열지 않았지만 함가원의 증언에 부정도 하지 않았다.
감찰각에서 사건을 정리하고 있는 사이, 서진은 가주실로 향했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간 서진은 중요한 본론만 말했다.
“이번 사건은 제가 전부 처리하겠습니다.”
최소한의 절차상 확인 겸 통보였다.
한벽호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렇게 하거라. 다만 감당할 자신은 있느냐.”
처분을 다른 기관에 넘기지 않고 직접 행한다는 것은 그로 인한 시선, 평가, 원한 등 모든 것을 짊어진다는 의미였다.
“네, 상관없습니다.”
“그렇다면야 마음대로 해라. 다만 네 숙부와 숙모는 별다른 죄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추방에서 그칠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가족이라고 연좌제를 적용할 순 없으니까.
다만 그간의 정황을 살폈을 때, 숙모인 이혜린이 한재열을 부추겼을 가능성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굉장히 애매한 영역이었기에 죄가 될지 안 될지는 미지수였다.
감찰각주가 스킬로 한재열의 기억을 끄집어내면 알게 되겠지만.
**
쾅!
한재열이 감찰각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은 이혜린이 서진을 찾아왔다.
“한서진!”
“오랜만입니다, 숙모님.”
감찰각주와 대화를 나누던 서진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 당장 조사를 멈추고 아들을 풀어.”
“싫습니다.”
“뭐?”
이혜린은 서진을 찢어 죽일 듯이 쳐다보며 몇 걸음 더 다가갔다.
서진은 담담하게 그녀의 눈빛을 받아내며 입을 열었다.
“만약 제가 먼저 한재열을 죽이려 했다면 숙모님은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결국 네가 죽은 건 아니잖니. 적당히 괴롭혔으면 넘어갈 줄도 알아야지.”
서진은 짧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가문이 당신을 그렇게 만든 겁니까. 아니면 원래 그런 겁니까.”
이렇게 제대로 서로가 부딪힌 적은 없었기에 서진은 그녀가 어느 쪽인지 궁금했다.
한재열이 변했으니 그의 어머니도 전자에 속하는 걸까.
사실 변화만 놓고 보면 제일 많이 달라진 건 서진이었다.
물론 변화의 방향은 그들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면 내가 한재열을 보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그런 시선으로 나를 볼 때가 있는 걸까.’
이것은 서진이 지구로 귀환한 후에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주제였다.
그간 외면해왔던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고민이 서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서진아.”
이때 굵은 중년의 목소리가 상념을 끊어버렸다.
“숙부님.”
그간 조용히 지내던 한재열의 아버지였지만 이번만큼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대신 사과하마.”
한태균은 짧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재열이가 잘 모르고 실수한 것 같다. 앞으론 조심하고 쥐 죽은 듯이 살 테니 풀어줬으면 좋겠다.”
“후우.”
깊게 한숨을 내쉬는 서진의 모습은 일견 고민을 하는 듯 보였지만 실은 그건 아니었다.
서진이 앞으로 어떤 일을 겪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신념.
먼저 죽이려 들었으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계에서 천 년이란 세월이 지나며 굳어진 이 원칙은 투신이라 불리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서진은 둘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안타깝지만 그렇겐 못 해드립니다.”
**
“끅, 흐윽.”
클레어는 그날 팔이 잘린 이후로 환지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개새끼...반드시 죽여버린다.”
당장이라도 복수를 하고 싶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트리플 소환의 부작용으로 인해 몸을 정양하는 것이 우선.
그리고 환지통을 완화할만한 약도 구해야 했다.
어쨌거나 밖에서 이것저것 살 게 많은데 나가기가 무서웠다.
작전에 실패한 이후로 스승을 피해 숨어있는 그녀로선 행동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그날 크게 실패한 후 몸 상태 때문에 재시도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그사이 연구원들의 행방은 놓치고 말았다.
감옥으로 갔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불분명했다.
이렇게 됐으니 이제 스승님을 만나게 되면 자신을 가만히 놔둘 리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방도가 없는 건 아니다.
한서진을 죽이거나 사로잡는다면 작전 실패로 인한 잘못도 경감이 될 터.
그렇기에 클레어의 눈빛엔 복수를 위한 강한 집념이 가득 차 있었다.
똑똑.
그때, 은신처의 문 앞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클레어의 경계심이 최고조로 치솟았다.
사실 은신처 주위엔 간단한 결계마저 없는 상태였다.
그녀는 소환계 전문이라 결계 마법은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괜히 조악한 흑마법 결계를 쳤다간 오히려 스승의 눈에 띌 가능성이 더 높았고.
그런데 여기에 누가 올 일이 있는 걸까.
아직 상급 소환 마법을 쓰기엔 몸 상태가 좋지 않은데.
이럴 때를 대비한 여러 아이템이 있긴 하지만 고레벨 마법사에겐 의미가 없다.
클레어가 조용히 무기를 하나 쥐는 순간,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