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클레어, 나야. 가레스.”
클레어는 익숙한 목소리에 경계심이 사그라들었다.
마기를 흘려보내 확인해보니 그녀가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가 맞았다.
클레어의 손가락에 있는 것과 같은 추적 반지를 끼고 있는 가레스라서 은신처를 단번에 찾아온 것이었다.
“들어와.”
흔쾌한 승낙에 문이 열리고 가레스가 은신처에 발을 들였다.
“여긴 무슨 일로 온 건데.”
현재 기분이 좋지 않아 날이 서 있는 클레어의 질문.
하지만 가레스는 그런 말투에 신경 쓰기엔 너무 놀란 상태였다.
“클레어, 너 그 팔...”
“그 이상 말하지 마.”
싸늘한 클레어의 목소리.
평소라면 눈치를 봤을 법한 가레스지만 이번엔 입을 안 열 수 없었다.
“클레어, 흑룡검가에 침입했다는 흑마법사가 너였어?”
흑마법사 커뮤니티를 떠들썩하게 만든 이슈의 주인공이 클레어였다니.
흑룡검가에서 자세한 정보를 공개하진 않아서 누군진 몰랐었다.
아니 사실 그런 것보다 중요한 건 클레어의 몸 상태였다.
“팔 이거 흑룡검가 놈들이 한 거야?”
한순간에 가레스의 눈빛에 살기가 생겨났다.
자존심 강한 클레어가 입을 꾹 닫고 아무 말 않는 걸 보니 확실했다.
가레스는 답답함에 질문을 쏟아냈다.
“누구야? 정확히 어떤 놈이 그런 건데? 아니 일단 잘린 팔은 어딨어?”
흑마법이 괜히 흑마법이겠는가.
절단당한 부위만 멀쩡하다면 얼마든지 다시 붙일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클레어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가레스는 어렵지 않게 공격 당시 팔이 완전히 손상됐음을 직감했다.
‘클레어 정도의 실력자를 이리 만들었다니 대체 어떤 놈이지.’
흑룡검가가 강한 가문으로 유명한 만큼 특출난 강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몇몇이 있다.
제일 먼저 흑룡가주부터 시작해서 흑룡대의 대장과 부대장급과 자호대장 정도.
나머지 놈들도 일대일로는 힘들어도 팀을 짜서 덤볐다면 클레어를 압박할 무력 수준을 보유했으니 경우의 수가 많다.
둘째 손자라는 한치성도 강하나 그놈은 해외에 있다고 했으니.
후계자에 생각이 닿은 가레스는 문득 최근 언론에서 오르내린 한 남자가 떠올랐다.
“한서진.”
가레스가 그 이름을 담는 순간 클레어가 움찔했다.
“그놈이구나?”
가레스는 클레어의 반응으로 확신했다.
한서진이 뇌기를 다룬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팔이 잘리는 과정에서 강력한 전격이 동반되었다면 팔이 못 쓸 수순으로 손상이 될만하다.
“후...”
가레스는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짧게 숨을 뱉었다.
보아하니 팔 뿐만 아니라 몸도 성치 않은 상태.
클레어가 이런 은신처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도 스승을 피해 있는 거겠지.
그녀가 맡았던 임무를 알게 되자 전반적인 상황 흐름이 전부 예상이 되었다.
“일단 이거부터 받아.”
가레스는 평소 들고 다니던 아이템 가방에서 갖가지 진통제를 꺼냈다.
마법사이면서 근접 전투가 특기인 가레스가 갖고 다닐 만한 물건이었다.
“당분간은 이것만 있으면 충분할 거야.”
무언가 묘한 뉘앙스에 클레어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야? 너 지금 뭐 하려고?”
“복수해야지.”
“그걸 네가 왜 하는데? 네가 개인적으로 명문가를 혐오하는 것과 내 복수를 연결 짓지 마.”
가레스는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흑룡검가.’
그는 안광을 번뜩이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과거 흑룡검가가 대대적으로 주변의 범죄 길드를 소탕할 때, 그의 친구도 죽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때 한번 참았는데 이번엔 클레어까지.
더 이상 참으면 그건 호구나 마찬가지.
가레스는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걸어 나가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길드원 소집해. 중요한 일이 있어.”
**
서진이 한재열을 처리한 지 일주일이 지나고, 가문에 미친 여파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카앙!
흑룡검가의 직계 전용 수련장.
오전의 햇살이 창문을 통해 내리쬐는 이곳에서 서진과 설하윤이 서로 검을 맞대고 있었다.
마나 사용 없이 순수한 검술과 육체만으로 한계까지 몸을 몰아붙이는 중이었다.
청명한 검 소리가 울려 퍼지고 구슬땀이 바닥에 떨어진다.
“하아.”
작게 숨소리를 내는 설하윤에게 서진의 검이 날아들었다.
“허리 너무 뒤틀지 말고.”
서진은 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 생기는 빈틈을 지적하며 상대하는 중이었다.
평소에 쓰던 존댓말도 생략할 만큼 서진은 열중한 채로 설하윤의 검술을 지도하고 있었다.
“어차피 검기가 안 보이니까 스킬 쓸 땐 쓸데없는 동작하지 말고 바로 들어오면 돼.”
동시에 은월검류와의 연결점도 고려하며 조언을 이어간다.
서진은 은월검류를 익히지 않았지만 어차피 모든 검술의 근본은 같다.
검의 끝을 보았기에 은월검류의 특징을 파악해 조언해주는 것은 서진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설하윤은 서진의 말을 들으며 새로운 시야가 트이는 기분이었다.
세상의 어떤 헌터도 서진보다 검을 잘 가르칠 사람은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을 정도.
원래 고레벨 헌터가 빈틈을 계속 지적당하면 기분 나쁠법한데 설하윤은 오히려 반대였다.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서진이라서 괜찮은 것.
그녀는 흐트러지는 집중력을 다 잡고 눈을 또렷이 떴다.
항상 설하윤에게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주는 서진의 모습과 다르게 검술 지도는 굉장히 혹독하게 이어졌다.
어느덧 1시간을 채울 만큼 계속되고 있었으니까.
일반 대련이 길어봤자 20분 정도라는 걸 생각하면 굉장히 긴 편이었다.
그렇기에 6레벨인 설하윤이라도 체력이 한계에 도달해있었다.
아무래도 지도를 받는 설하윤이 서진의 배 이상 움직이다 보니 체력이 더 빨리 닳은 것이다.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설하윤은 앞으로 넘어졌다.
탁.
서진은 바로 검을 놓아버리고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니 시침이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느새 1시간 동안 했네요. 오전엔 이만하면 됐으니 그만하죠.”
설하윤은 물을 마시고 나서 서진을 보며 말했다.
“서진 님은 검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도움이 된 것 같으니 다행이네요.”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번 가르침을 받아보면 얼마를 내던지 가르쳐달라는 사람이 줄을 설 겁니다.”
“하윤 씨 말이 정말이면 굶어 죽진 않겠네요. 소가주 못 되면 그걸로 먹고살면 되겠군요.”
그렇게 사소한 잡담을 나누며 수련장을 나서니 가문의 분위기가 조금 어수선한 게 느껴졌다.
그때 서진의 폰으로 구현수 비서에게 연락이 왔다.
-서진 님, 자호대의 헌터 6명이 습격당해 사망한 채로 발견됐습니다.
“뭐?”
서진은 쉬이 믿기지 않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시신이 안치된 약제원의 2관 건물로 향했다.
“아저씨.”
“어, 서진아.”
이미 영안실엔 정선이 약제원 직원들과 함께 도착해있었다.
“확인해 봤어요?”
“방금 막 봤다.”
“어떻던가요.”
“일단 탄화 시체라 금방은 확인이 힘들 것 같아. 거의 뼈만 남을 만큼 이건 작정하고 제대로 태웠어. 흐릿하게 검상이 남아있는 걸 봐선 분사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옆에 확인차 나온 은월각의 헌터가 덧붙였다.
“던전 사냥을 마치고 복귀하는 길에 참변을 당한 것 같습니다.”
“잠깐 시신을 볼 수 있을까요.”
정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검실로 안내했다.
서진은 가까이 다가가 시신을 내려봤다.
‘이건.’
비록 불에 탔지만 검상으로 인해 갈라진 안쪽에서 서진만은 미세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마기의 흔적이다.
그러면 흑마법사란 건데 서진에게 짚이는 흑마법사는 하나뿐.
짐작이 맞는다면 그때 그 흑마법사거나 아니면 연관된 놈이겠지.
물론 전혀 상관없을 수 있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시신을 이렇게 훼손했다는 건 보복의 성격이 짙었다.
서진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됐어요. 이만 가겠습니다.”
“뭘 알아낸 거냐?”
정선은 서진의 표정이 급변한 걸 보며 눈치챘다.
“예, 아마도 제 일인 것 같습니다.”
**
서진은 이번 습격에 대해 담판을 짓기 위해 가주실로 향했다.
보고를 받았던 가주는 서진이 올 것을 예상했기에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말 하러 온 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만 아직 자세한 결과도 나오지 않았는데 급하구나.”
흑룡가주는 시체 속의 마기를 보진 않았지만 최근에 이런 일을 저지를만한 족속은 흑마법사뿐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 놈들이 아니고서야 양지에 있는 놈들이 감히 대놓고 이런 짓을 하진 못할 테니까.
“바로 흑룡대를 대기시켜 놓은 것. 보고 왔습니다.”
서진은 아닌 척하는 가주의 말을 짚었지만 그에 맞는 대답도 준비되어 있었다.
“검은 준비해 놓더라도 확신이 섰을 때 뽑는 것이다.”
“그 확신이 제겐 있습니다. 이런 보복 심리는 잘 아니까요.”
이계에서 마냥 혼자 다녔을 것 같은 서진이지만 그도 따르는 존재들이 있었다.
투신이 7성주의 견제 대상이었던 만큼 이런 상황은 익숙했다.
“잘 안다..?”
서진의 말이 선뜻 납득되지 않는 한벽호는 눈매를 좁혔다가 이내 다른 말을 꺼냈다.
“그래, 네 확신이 맞다고 했을 때, 원한다면 자호대는 물론이고 흑룡대도 붙여줄 수 있음에도 필요 없다고 할 것이냐.”
“예, 굳이 말하자면 은월각만 있으면 됩니다. 정보만 수집되면 실행은 제가 해야겠습니다.”
비록 마관청에서 시작된 임무로 엮인 흑마법사라 할지라도 자신이 놓쳤으니 직접 끝맺는 것이 옳다.
그리고 이번 사안이 마경 임무와 관계되어 있기에 마관청의 수사국에서도 나설 수밖에 없을 터.
“마관청의 수사국과 은월각이 합동 조사를 하면 도주 경로 같은 결과는 금방 나올 겁니다. 그 이후부턴 제가 알아서 하죠.”
후계자로서의 책임감을 넘어서 투신이라 불렸던 서진의 양보할 수 없는 자존심이기도 했다.
한벽호는 서진에게 느껴지는 의지를 받아들이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한번 해보거라.”
**
서진은 허락을 받고 나서 가주실을 나와 홍세인에게 연락했다.
마관청에서도 심각성을 느끼는 만큼 수사국에서 바로 지원 인력이 도착했다.
에이스라 들었던 수사국의 이현지 과장이 모든 업무를 뒤로하고 조사에 착수했으니,
마관청에서 이번 일을 최우선으로 신경을 쓰고 있단 뜻이었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고 금방 끝날 것 같았던 조사는 의외로 난관에 부딪히고 있었다.
우선 마나와 다른 성질인 마기라는 것과 현장에 남아있는 흔적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특히 흑마법사가 추적을 대비한 교란에 능한 만큼 이현지 과장의 사이코메트리도 역부족이었다.
역시 아무리 보복이 목적이라고 한들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진 않았던 것.
“스킬 레벨만 더 높았어도.”
이현지는 붉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인상을 찌푸렸다.
한 끗 차이로 막혀버리니 굉장히 답답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던 서진이 나섰다.
“1레벨만 높으면 되는 겁니까?”
“네? 네.”
사이코메트리 같은 정신계 스킬은 특히 마나 컨트롤과 밀접한 관계를 띤다.
용체화로 살펴본 그녀의 신체는 지금보다 스킬 레벨을 올릴 수 있는 잠재적인 가능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