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제가 이현지 과장의 스킬 레벨을 올려드리죠.”
“예?”
이현지는 잘못 들은 줄 알고 귀를 의심했다.
스킬이 원한다고 올릴 수 있으면 헌터들이 고생을 왜 하겠는가.
그러나 서진의 표정과 말은 너무 당연한 말을 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사실 그녀도 최근 2년간 스킬이 정체 상태였기에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치부하면서도 솔깃했다.
“정말인가요? 거짓으로 떠보는 거면 저 화날 것 같은데.”
“거짓말은 아니에요. 물론 화가 난다면 굳이 안 해도 됩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서진의 태도.
이현지가 그렇게 느끼는 것처럼 실제로도 그랬다.
그녀의 스킬 등급을 올리면 시간을 훨씬 단축해서 알아낼 수 있겠지만 거절당한다면 매달릴 생각은 없었다.
시간의 문제일 뿐 조사하다 보면 결국 나오게 돼 있기에.
다만 그 기간 동안 흑룡가의 헌터뿐만 아니라 일반 직원까지 추가 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서둘러서 나쁠 건 없었다.
서진의 그런 생각은 말하지 않아도 전신에 묻어났고 이현지가 되려 찜찜해졌다.
마치 하늘이 내려준 기회를 자신의 발로 차는 기분이 들 정도.
그런데 생각해보면 저 말이 허세일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그간 봐왔던 한서진이 그런 성격이 아니라는 건 익히 알고 있고 이런 때에 거짓말을 해봤자 이득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네가 못한다고 남도 그럴 거라 단정 짓지 말라고.
헌터마다 어떤 능력을 가졌을지는 미지수이기에 무작정 거절하는 건 악수다.
그렇기에 이현지는 꼬리를 내렸다.
“...그러면 정말 가능한 건가요?”
“못 믿는 것도 이해가 가니 맛보기로 잠시 보여드리죠.”
서진은 용체화를 유지하며 이현지와 악수한 상태로 뒤틀려 있던 마나 경로 한 곳을 바로잡았다.
“한번 운용해보세요.”
서진은 손을 놓고 이전과 비교해보라 말했다.
이현지는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마나를 움직였다.
그리고 손목시계의 초침이 반 바퀴 정도 돌았을 때, 그녀는 놀란 눈으로 서진을 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흐름이 미세하게 원활해졌다.
“어떻게...?”
“전 지금 시답잖은 거짓말로 시간 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이렇게 되니 안달이 난 건 이현지였다.
“의심해서 죄송해요. 저도 스킬 등급을 올리고 싶어요. 물론 원하시는 조건이 있으시겠죠?”
“그럼요.”
이현지는 그 말을 듣고 오히려 안심했다.
승낙의 말임과 동시에 자신에게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는 거니까.
그녀는 아무런 대가 없이 해주겠다며 다가오는 사람을 매우 경계하는 타입이었으니.
서진은 마음의 준비가 된 이현지에게 말했다.
“앞으로 제가 당신의 능력을 종종 필요로 할 때마다 기존의 마관청 업무 대신 제 일을 우선할 것. 물론 이런 조건을 평생 걸 순 없으니 기간을 정해야겠죠. 이현지 과장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 것 같아요?”
기간의 결정권을 받은 이현지는 꽤 난감했다.
너무 짧게 하자니 양심이 없고 그렇다고 마냥 길게 정할 수도 없고.
이현지가 말을 못 하고 있자 서진이 결국 말했다.
“생각해보니 기간으로 하면 시도 때도 없이 부를 수도 있으니까 횟수로 정하죠. 딱 10번.”
이현지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네 좋아요. 생각보다 조건이 후하네요.”
서진으로선 이현지의 능력이 탐났기에 마관청에서 빼내서 은월각에 넣고 싶은 속셈이 있기 때문이다.
10번이면 충분히 친밀감을 쌓으면서 오래 끌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주는 적당한 횟수였다.
“그럼 계약서를 쓰죠.”
이현지가 마관청에 묶인 헌터이니 상관의 허락을 받아서 계약서로 남겨둘 필요가 있었다.
“잠시만요.”
그녀는 양해를 구하고 수사국장에게 전화했다.
“예, 국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이현지는 전화 상대가 상관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자신의 의사를 시원하게 쏟아내며 통화했다.
“아, 네. 그럼 허락하신 걸로 알게요.”
거의 일방적이었던 통화를 끝낸 그녀는 서진에게 계약서를 받았다.
조건은 아까 얘기했던 내용에 추가적인 세부 사항이 붙어있었다.
3일 안에 서진이 스킬 등급을 올리지 않으면 모든 계약 내용을 무효로 하거나, 이현지에게 신체를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조항 등.
그녀가 보기에 전부 문제가 없었기에 사인을 하려던 중 멈칫하고 서진을 바라봤다.
“근데 만약 스킬 등급이 올랐는데 제가 거짓말하면 어찌하실 건가요? 계약서엔 관련 내용이 없네요.”
“안 그럴 거라고 믿습니다.”
레벨과 달리 스킬의 성취는 일반적으로 본인 외에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거짓말하며 잡아떼면 증명하기가 힘들지만 서진에겐 상관없었다.
용체화는 반대로 체내 마나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으니 서진은 미소만 지를 뿐이었다.
“그렇긴 한데, 뭐 알아서 하시겠죠.”
서진이 너무 대책 없이 믿는 것 같아 아리송한 이현지였다.
그렇지만 어차피 거짓말을 할 생각도 없으니 넘어가기로 했다.
사인을 마치자 서진은 이현지의 등 뒤로 이동했다.
“시간 없으니 바로 시작하죠.”
“네, 저도 좋아요.”
계약까지 했지만 여전히 의구심이 남아있는 이현지.
아무런 준비 없이 등급을 올리는 게 가능하단 건가?
이현지가 고개를 갸웃댈 때, 서진은 이현지의 등에 손을 대었다.
그녀의 마나 흐름이 서진의 통제하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통제 범위가 넓어질수록 이현지의 체내 마나 경로에 대한 이해 또한 깊어진다.
아직은 용체화 단계가 해츨링 급이기에 전부 파악하려면 시간이 꽤 걸렸다.
서진의 마나가 천천히 그녀의 등을 통해 전신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한편 등을 내주고 있는 이현지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타인의 마나가 몸에 침투하는데도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처음엔 이물감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거부감이 옅어지더니 현재는 한 몸이 된 상태.
물론 외부에서 마나가 들어온 만큼 긴장을 완전히 풀 수는 없지만 그 외에 그녀가 딱히 할 일은 없었다.
스킬 등급을 올리는데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된다니.
계약서에 위해가 없다고 적혀있긴 해도 강한 통증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이현지는 눈을 감고 몸속의 마나 움직임에 집중했다.
서진은 그녀가 집중하든 말든 뒤틀린 경로를 바로잡아가고 있었다.
다만 한 번에 전부 수정하기는 힘들었기에 일부만 바꿀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정도만 해도 스킬 하나 올리는 덴 충분할 테니.
그렇게 30분이 더 흘렀을 때, 이현지의 눈앞에 사이코메트리 등급이 올랐다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
서진을 바라보는 이현지의 눈빛엔 경외감이 가득 차 있었다.
**
세계 질서를 선도한다고 일컬어지는 국제헌터연합.
헌터가 활동하는 정상적인 국가라면 대부분 속해있는 이 기구는 1년에 한 번씩 회담을 개최해서 여러 안건에 대한 논의를 하기도 한다.
다만 회담에 참여할 수 있는 자리는 한정되어 있기에 헌터 강국 순으로 참석 기회가 주어지고 있었다.
올해도 어느새 정상회담하는 날까지 이제 며칠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국제헌터연합의 총장은 깊은 눈빛으로 참석국 리스트를 훑고 있었다.
보고를 위해 올라온 정무국장은 메이너드 총장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총장님. 이번 회담 안건에 세리아 건도 포함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총장은 그녀의 이름을 듣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굳이? 얘기 꺼내봤자 나설 국가도 없을 테고 분위기만 이상해질 거야.”
예전에는 촉망받던 치유계 헌터였지만 현재는 기대 가치를 상실한 골칫덩이였다.
성역이란 스킬을 각성했지만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위력이 줄어들더니 이젠 아예 못 쓰는 상태.
부풀어 올랐던 기대는 곧바로 실망으로 덮어졌다.
그러니 그냥 가만히 있을 것이지 뭐하러 자진해서 지옥의 사지로 갔단 말인가.
그런 헌터를 구하기 위해 고급 인력을 계속 남미로 보낼 순 없었다.
“이미 한번 보냈잖아. 심지어 갔다가 5레벨 헌터 다섯 명이 죽고 나머지는 겨우 돌아왔어. 그냥 거기서 적응하고 살게 냅둬.”
정무국장도 총장의 말에 공감했지만 일부 여론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한때 국가적으로 촉망받았던 인재인 만큼 아직 기대를 버리지 않은 사람들이 소수 남아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한번 말이라도 꺼내 보심이 어떠십니까. 회담에서까지 외면을 받으면 완전히 힘을 잃을 겁니다.”
“쯧, 알았어 한번 얘기해보지.”
잡음을 빨리 없앨 수만 있다면 노력하는 시늉이야 한 번 정도는 낼 수 있다.
짧은 대답으로 귀찮은 고민을 날려버린 총장은 시선을 책상으로 내렸다.
조금 전에 보다 말았던 참가국 리스트과 인원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 한국에선 거기 협회장이 아니라 흑룡가주가 온다고.”
10레벨이 두 명 있는 한국이지만 항상 협회장이 참석했었는데.
“별일이군.”
**
스킬 등급이 상승한 이현지는 금방 도주 경로를 특정해냈다.
그녀의 말대로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도시 백야로 들어가는 도로 위에 서 있었다.
“아마 도시 안에 있는 모양인데 괜찮으세요?”
한국의 다른 지역과 백야는 완전히 다른 곳이기 때문에 이현지는 서진에게 어떻게 할 건지 물어봤다.
“상관없어요.”
수많은 사람이 얽히며 셀 수 없는 기억들이 거리에서 뒤얽히는 백야였으나 이현지는 결국 한 건물을 특정해냈다.
“저기로 들어갔네요.”
“수고했습니다.”
이제부턴 무력 충돌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았기에 서진은 이현지를 돌려보냈다.
간판조차 없는 회색 4층 건물.
너무 흔하고 평범해서 주위의 음침한 거리와 잘 어울렸다.
콰앙!
서진은 거칠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1층은 기다란 바가 있는 어두운 술집 같은 분위기였다
“뭐야?”
술잔을 기울이던 한 남자는 인상을 쓰며 서진을 노려봤다.
“흑룡검가의 자호대를 건드린 놈들이 있는 곳이라 해서 왔는데.”
마치 별일 아닌 듯 내뱉은 서진의 말에 사내의 투기가 새어 나왔다.
서진은 검 손잡이를 잡으며 말했다.
“잘 찾아왔네. 기왕이면 우두머리를 보고 싶은데.”
“흑룡가의 도련님이라도 백야에선 말을 골라서 하는 편이 좋을 거다.”
“그런 건 모르겠고 죽기 싫으면 네 보스 불러와. 아니면 맞아야 말하는 타입인가?”
우웅.
그때 의문의 작은 소리가 들리더니.
콰아앙!
서진이 서 있던 바닥을 뚫고 얼음 기둥이 솟구쳤다.
“죽을 뻔했잖아.”
아무런 상처 없이 다른 곳에 이동해있는 서진.
“어쨌든 이거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신호 맞지?”
백야의 거리에 있는 곳이라서 조용하게 해결해볼까 싶었지만 서진에겐 역시나 이게 더 편했다.
서진의 자줏빛 전류가 검을 타고 뻗어나가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눴던 사내의 심장을 관통했다.
‘다음은 빙결계 마법사.’
시선이 아래층으로 향할 때 위층에서 천장을 부수고 내려온 남자가 대검을 내려쳤다.
카앙!
그리고 서진이 검을 쳐내고 거구의 목을 찌르려는 순간, 둘 사이에 단검이 지나갔다.
콰득.
벽면에 강하게 박힌 단검의 주인은 나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서진이었던가, 여긴 천궁 길드의 영역이다. 이쯤에서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싫다면?”
“강제로 집행하는 수밖에.”
“뭐 할 수 있으면 해 보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