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어떻...게.”
클레어는 눈빛이 꺼져가는 와중에도 무슨 수로 은신처를 찾아온 건지 의문을 표했다.
마법사적인 기질에서 비롯된 건지.
죽어가는 마당에 그 정도 아량은 베풀 수 있었기에 서진은 입을 열었다.
“가레스가 죽었으니까.”
“아.”
그 한마디로 전부 이해한 클레어는 이내 눈을 감고 쓰러졌다.
서진은 그녀에게 다가가 확실히 숨이 끊어졌는지 확인했다.
저번처럼 도망가면 정말 골치 아프기 때문에.
“죽었군.”
다행히 두 번 놓치는 참사는 겪지 않아도 될 듯하다.
다만 이 여자도 배후의 끝은 아닌 것 같은데.
연구소에서 죽였던 다렌보단 클레어가 확실히 강했지만 둘 사이에서 위아래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아마 클레어도 누군가가 보내서 온 것이며 위에 더 있겠지.
그러나 이번 일은 여기서 끝이다.
추가로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이쯤에서 멈추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언제까지나 이 일에 시간을 뺏길 순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집이 난장판이 됐네.”
한 번에 죽이긴 했지만 심장을 관통하면서 주변에 튀어버린 선혈이 낭자했다.
서진은 뒷수습을 위해 가문에 연락을 넣었다.
**
중국의 랴오닝성.
그곳에 있는 붉은 성벽의 주인, 적륜성주는 익숙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연구는 현재 어디까지 진행됐지?”
구 연구소가 완전히 파괴된 이후, 마경에 새로 짓기엔 여러모로 부담스러웠기에 어쩔 수 없이 랴오닝성으로 위치를 옮겼다.
문제는 관련 자료와 데이터를 전부 한서진에게 뺏겼기 때문에 실험 속도가 굉장히 더딘 상태였다.
그런 적륜성주의 불만은 자연스레 게일러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흑마법사들이 잘만 대처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
“아직 수복 중이네. 한참 걸릴 것 같더군.”
“쯧.”
“그나저나 게일러. 한서진이 아직도 살아있던데 내가 잘못 확인한 건가?”
왜 죽이지 못했냐며 노골적으로 힐난하는 어투.
어쨌든 그가 먼저 나서겠다고 해서 복수심을 억누르고 있었는데 죽긴커녕 여전히 잘 쏘다니고 있다는 정보를 보고 받았다.
“지금 그 발언, 너무 성급하게 내뱉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번 일로 제자 둘을 잃은 게일러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특히 클레어는 쉽게 구하기 힘든 자질이었던 만큼 적륜성주의 말에 불쾌감이 높아졌다.
여기까지 올라온 게 누구 덕이거늘.
게일러의 전신에서 제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묵직한 마기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적륜성주는 적반하장 같은 게일러의 태도에 기어코 한마디 더 보탰다.
“나서겠다고 먼저 말을 꺼낸 건 게일러 자네 아닌가.”
이번만큼은 답답함을 억누를 수 없었던 적륜성주는 마기의 압박을 받아쳤다.
게일러는 입꼬리를 비틀며 쇳소리를 냈다.
“해보자는 거군.”
벽장에 장식된 청자가 흔들릴 정도로 서로 다른 기류가 충돌했다.
쩌적.
청자에 금이 가면서 갈등이 격화되려는 순간.
똑똑.
“성주님.”
보고를 위해 올라온 총관의 노크 소리에 방 안의 흐름이 바뀌었다.
둘은 서로를 노려보다 결국 아쉬운 구석이 조금 더 많은 적륜성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다음에 얘기하지.”
“....”
게일러는 마기와 함께 사라지고 총관이 들어왔다.
“성주님, 말씀하신 히트맨 리스트입니다.”
적륜성주는 이미 서진을 암살할 헌터를 알아보고 있었다.
아들을 죽이고 연구를 망친 장본인과 언제까지나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순 없는 노릇이니.
게일러 때문에 참았지만 이제는 한계였다.
적륜성주는 한 사람을 손가락으로 지목했다.
“이자가 낫겠군.”
“알겠습니다. 접촉해서 진행하겠습니다.”
“제일 중요한 건 기밀을 지키는 것이네. 총관.”
“명심하고 있습니다. 절대 안 들키게 처리하겠습니다.”
국내의 다른 세력 견제만으로도 힘든 만큼 부담이 될지 모르는 흑룡가는 배제하고 한서진만 깔끔하게 죽일 생각이었다.
**
가문으로 복귀한 다음 날, 서진은 던전기획실로 향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정보건이 긴히 할 말이 있다고 연락이 왔기 때문에.
그렇게 서진은 내원당의 1층 복도를 걸어가는 중에 맞은 편에서 다가온 덩치 큰 남자와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아, 자호대장. 얼굴 오랜만에 보네요.”
극도로 무뚝뚝한 자호대장은 인사말과 대답도 건조하고 짧았다.
“예.”
서진도 딱히 할 말은 없었기에 이대로 지나가려 했다.
그때 자호대장이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저희 애들의 복수를 해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네? 아.”
서진은 잠시 어색하게 웃다가 그의 어깨를 잡고 허리를 세웠다.
“감사받기는 좀 그러네요. 어차피 제가 놓치는 바람에 그리 된 거라.”
“전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자호대장은 단호하게 대답하며 묵례를 하고 물러갔다.
서진은 잠시 그의 등을 보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던전기획실의 1팀에 도착하니 정보건이 손을 들며 맞이했다.
“어, 우리의 가주께서 오셨군.”
“가주는 무슨.”
서진은 가볍게 웃어넘겼다.
“왜 그래, 임시라도 가주는 가주지.”
정보건의 말처럼 서진은 현재 임시 흑룡가주였다.
단 이틀 동안만이지만.
국제헌터연합에서 개최되는 정상회담에 흑룡가주가 참석하게 되면 잠시 가문의 주인이 비어버린다.
유사시에 문제가 발생하면 현장에서 지휘 공백이 생기기에 가주가 국외로 갈 땐, 가주의 역할을 대신할 인물을 정해야 하는 것이 가문의 규율.
현재 흑룡검가의 후계자는 두 명이지만 한 명은 해외에 머물고 있다.
그러므로 규율에 따라 한서진이 임시 가주로 임명된 것이다.
이미 오전에 서진은 임시 가주의 권한을 넘겨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임시 가주가 된 건 서진인데 정보건이 더 기분 좋은 듯이 장난스레 말을 걸었다.
“흑룡가주님 기분이 어떠십니까.”
“아무렇지도 않고. 재미도 없어. 어쨌든 할 말 있어서 불렀다며.”
서진은 무미건조하게 답하며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렇지. 잠시만.”
정보건은 웃음기를 거두고 모니터 화면에 지도 사진을 띄웠다.
지도에는 던전을 표시하는 아이콘과 숫자가 같이 적혀있었다.
“개성과 그 인근에 던전이 나타났던 장소들을 지도에 표시한 거야. 최근 일주일 치를 누적한 자료지. 그리고 이건 한 달 전의 던전 개수를 정리한 자료.”
듀얼 모니터의 왼쪽엔 최근 지도, 오른쪽엔 한 달 전 지도가 띄워져 있어 차이점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 달 전보다 던전이 좀 줄었네?”
“맞아. 그때부터 감소 추세가 시작되긴 했는데 미묘한 차이라 그냥 넘겼었거든. 그런데.”
탁.
정보건은 다음 페이지로 넘겨서 최근 일주일간의 감소 추이를 상세하게 정리한 자료를 보여주었다.
“보는 것처럼 느낌이 이상해서 너를 불렀다.”
서진은 정보건이 무엇을 염려하는지 눈치챘다.
“형은 이게 저번 던전 브레이크 사건이랑 연관이 있다고 보는 거야?”
“모르겠어. 확신을 못 해서 일단 너한테 말해주고 싶어서 불렀지. 네가 보기엔 어때?”
서진이 생각하기에 체이서의 동료, 케린은 던전 관련 능력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흑룡검가 영역에서의 던전 감소와 케린은 연관점이 있을 수도 있다.
“감소되는 던전이 그 녀석 짓이고, 던전을 저번처럼 터트리려는 걸지도 모르지. 가설이지만.”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정보건은 의심스런 정황을 먼저 알아챘으면서도 그런 가설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무리 헌터라지만 던전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른다고? 그것도 하나면 몰라도 그 많은 걸?”
한 달 전의 던전 수와 비교했을 때 15개 정도 차이가 난다.
그 많은 걸 혼자서 전부 컨트롤한다니.
그리고 짐작컨대 던전의 등급도 높은 편일 것이다.
현재 고등급 던전이 유독 줄어들었으니까.
각성은 했지만 한없이 일반인에 가까운 정보건은 믿기지 않아 고개를 내저었다.
“형이 먼저 얘기를 꺼냈으면서 못 믿는 거야?”
서진이 실소하며 말하자 정보건은 다른 가설을 내놓았다.
“워낙 스케일이 크니까 그렇지. 나는 던전 한 두개가 한계 아닐까 싶은데. 나머지는 그냥 우리 가문 방해하려고 없애버린 거라 생각하는 게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그것도 가능성이 있는 얘기다.
“현실적이긴 한데, 나는 적에 대해 함부로 한계를 정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하거든. 아, 하윤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서진은 그림자처럼 조용히 서 있던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도 항상 최악을 고려하고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보건은 침음을 내며 머리를 긁었다.
“으음, 그렇군요. 내가 너무 안이했나.”
“그런데 이거 오늘 처음 말한 거야?”
“그건 아냐, 매주 던전 경과 보고서를 쓰거든. 물론 지금처럼 우려되는 문제를 따로 언급하진 않고 그냥 수치만 적어서 올리니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겠지만. 나도 보면서도 여태까진 긴가민가했고.”
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구나. 어쨌든 말해줘서 고마워. 한번 조사해봐야겠네. 그리고 형.”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 감소하기 이전의 주요 던전 출현 장소들은 내가 보내줄게. 현장에 가보려는 거지?”
“어. 맞아.”
“10분 내로 정리해서 폰으로 쏴줄게.”
서진은 1팀 사무실을 나와 잠시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던전 감소가 케린과 연관되어 있다면 최근에 줄어든 이유가 뭘까.
던전 관련 능력을 늘리느라 이전에는 잠잠했고 이제는 힘을 충분히 쌓았다고 판단해서?
이유가 될 순 있지만 뭔가 부족하다.
아니면 조만간 무슨 특별한 날이 있는 건가 생각하던 서진의 머릿속에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정상회담?’
오늘과 내일.
흑룡가주는 미국에서 열리는 회담에 참석하러 이틀간 자리를 비운다.
흑룡가주를 호위하는 흑룡대 1팀까지.
가문에서 제일 큰 무력이 부재하게 되는 것.
‘무력 공백이 생기는 타이밍에 십수 개의 던전을 일거에 풀어버릴 심산인가.’
과연 한 명의 헌터가 할 수 있는 일인지에 대한 문제는 차치한다.
얼마든지 협력자가 존재할 수 있으며 아이템, 아티팩트의 도움을 받는다면 본래의 능력을 초월하는 경우도 있으니.
어찌 됐든 서진의 예상대로 상황이 터진다면 흑룡검가는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쏟아지는 몬스터들은 다 처리할 수 있다 해도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갈 테니까.
서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윤 씨.”
“네.”
“제가 예상되는 일이 하나 있는데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서진은 자신의 추측을 정리해서 말해주었다.
그녀는 서진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고 나서 미간을 찡그렸다.
“증거래 봤자 던전이 감소한다는 정황뿐이지만, 하윤 씨가 생각하기엔 어떤가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다만 이 얘기를 가주님께 전해드려도 회담을 불참하시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죠.”
국제적으로 공표된 약속을 정황만으로 취소하고 돌아올 가주가 아니었다.
그리고 시계를 보니 이미 비행기가 이륙해 있을 시간이었다.
“일단 방금 말한 내용은 같이 따라간 김형석 비서에게 전달은 해놓으세요. 그렇다고 불안해하면서 답장을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서진은 다시 발걸음을 떼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선수를 쳐버리면 되니까.”
그리고 가문을 지킬 전력이 부족한 것에 대한 해결책도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