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서진은 여태껏 독단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제일 선호했지만 앞으론 달라질 필요도 있었다.
가문의 피해를 최소로 줄이려면 혼자만의 힘으론 불가능하기 때문에.
거기다 어차피 가주를 목표로 하는 이상 앞으로 수많은 이들과 엮이게 될 테고.
타인에게 빚을 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빚을 지는 것도 감수할 줄 알아야 했다.
기갑성가와 철혈백가.
서진이 도움을 요청하면 응당 받아들일 사람들이 속해 있는 가문이다.
기갑성가는 서진이 세밀한 마나 운용법을 가르쳐주며 적극적인 지원 약속을 받아낸 바 있고,
철혈백가엔 크라켄 공략 후 철혈단장이 도와주겠노라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이런 사안으로 부르면 꽤 놀라지 않을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때라서 서진이 도움을 요청하려 하는 것이기에.
사실 이번 일은 서진에겐 매우 색다른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속한 집단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에게 손을 내밀다니.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며 얽히는 일들이 서진에게 새삼 생경한 감상을 느끼게 했다.
이계에선 서진이 습격을 받을 위험에 처하거나 공격을 받으면 주변에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기껏해야 투신을 따랐던 일부 몬스터와 함께 싸우는 정도.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물론 서진은 지금까지 여러 도움을 받아왔지만 이번 일은 명백히 규모와 성질이 달랐으니까.
어쨌거나 필요한 일이라면 하는 게 옳겠지.
서진은 연락처에서 성주원을 찾아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냐.
먼저 말을 꺼낸 성주원의 퉁명스러운 말투.
하지만 그 아래엔 말만 하면 어지간한 건 들어줄 거란 뉘앙스가 깔려있었다.
“놀라지 말고 듣길 바랄게.”
-뭔데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야?
서진은 설하윤에게 말했던 추측을 읊어주었다.
“...그래서 헌터들 좀 보내줘야겠다.”
성주원은 상당히 놀랐는지 서진의 말이 끝났음에도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언제까지 가면, 아니다 빨리 가는 게 좋겠지. 내가 가용 가능한 헌터 전부 끌고 갈 테니까 잠시 머물 곳이나 준비해줘라.
“그래.”
예상보다 빠르고 적극적인 응답에 서진은 뭐라 말해야 할지 헤맸다.
-뭐야, 감동했어?
“아니.”
-쑥스러워하긴. 처음으로 1살 동생 같네.
“끊는다.”
작게 한숨을 쉰 서진은 이번엔 백화연의 연락처를 찾았다.
그리고 고민 없이 통화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서진이 볼일이 있는 건 철혈단장이지 가주가 아니었으니까.
소회합 때 그녀가 지지 선언을 하긴 했지만 유사시 헌터들까지 빌려주겠다는 구체적인 약속까지 한 건 아니었다.
서진은 결국 구현수 비서에게 지시를 넣었다.
철혈백가의 외부연락망으로 연락해서 철혈단장에게 말하는 편이 적절하겠지.
‘내가 괜히 돌아가는 건가?’
스스로 의구심을 품어보지만 명확하게 답이 나오진 않았다.
서진이 이계에서 투신공과 검술, 갖가지 전투 감각을 얻은 반면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해선 백지상태가 되어버렸으니.
명확하게 주고받는 거래와 복수, 그 외엔 문외한에 가까웠다.
나름 잘 녹아들었나 싶어도 이럴 때면 아직 멀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때 갑자기 백화연에게 전화가 먼저 걸려왔다.
서진이 의아해하며 받자 뾰족한 말투가 귓가를 찌른다.
-야, 한서진. 연락을 왜 그런 식으로 해?
“그게 어때서?”
-도대체 철혈단장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그리 은밀하게 접근한 건데?
외부연락망으로 통하려는 게 은밀한 건가.
서진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로 실랑이를 하는 대신 용건을 꺼냈다.
“그래, 먼저 전화를 했으니 이참에 말해줄게.”
이번이 도대체 몇 번째 같은 설명인 거지.
차라리 처음에 녹음해둘 걸 그랬나.
시답잖은 후회를 하며 말을 끝내자 땅이 꺼질듯한 백화연의 한숨이 들려왔다.
-하아, 그걸 왜 바로 말 안 해?
“네가 흑룡가 사람도 아니고 내가 도움받을 만한 이유도 없는데 왜 말해.”
서진에겐 합리적인 이유일지 몰라도 백화연의 사고방식으로는 용납하기 힘든 말이었다.
-그럼 넌 만약 철혈백가가 멸문의 위험에 처하면 가만히 두고만 볼 거야?
막상 그렇게 질문하니 서진은 단호하게 그렇다고 답할 수 없었다.
왜 그런 걸까.
예전에 조금 친했으며 약혼했던 사이라서?
자문해도 확실하게 짚이는 이유는 나오지 않았다.
아마 대가를 나중에 받아내더라도 우선 도와주긴 하겠지.
철혈백가 같은 가문이 한국의 수도를 지키고 있는 편이 여러모로 낫다는 합리화를 붙이며 나설지도 모른다.
-그거 봐.
말문이 막힌 서진에게 백화연은 의기양양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거니까 철혈백가에서도 보내줄게. 최대한 빠르게. 철혈단장이야 자기가 말한 약속 때문이지만 그 외 철혈가의 헌터들은 내 덕분이라는 것만 기억해둬.
“그래, 빚으로 걸어두지.”
서진은 그녀의 어설픈 생색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철혈가주의 적극적인 무력 지원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어쨌든 이로써 가문의 방비는 끝났다.
남은 일은 케린을 직접 찾아내 가문의 지척에서 던전을 터트리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
서진은 임시 가주의 권한으로 외부에 있는 헌터는 전부 복귀시키고 주변을 경계할 것을 명령했다.
가문의 태세를 확립한 뒤에 서진은 이현지와 은월각주를 불렀다.
그리고 던전이 사라졌을 법한 장소를 한 곳씩 살피기 시작했다.
케린의 스킬이 어떤 기준으로 발동하는진 몰라도 먼 거리에서 던전을 마음대로 하진 못할 것이다.
그게 가능했다면 이미 서진은 죽었거나 또 병원에 누워있었겠지.
던전을 터트리는 건 비교적 거리가 떨어져도 괜찮을지 모르나 처음 던전의 지배력을 가지려면 근처까지 도달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던전을 없앴을 거라 추측되는 주요 장소를 돌아다니며 기억을 읽는다면 분명 걸리게 될 거다.
서진을 따라온 은월각주는 과연 이런 방법이 먹힐까 궁금했다.
언뜻 주먹구구식처럼 보였지만 여태까지 이런 식으로 확인해 본 적은 없었으니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사실 던전 출현은 랜덤이라 주요 장소라고 해도 꼭 그곳에 다시 나온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헛수고하는 걸지도 모른다.
다만 임시 가주가 된 한서진의 명령은 거절할 수 없기에 은월각주는 묵묵하게 그를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10번째 장소에 도착한 후에 이현지는 스킬을 쓰고나서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서진 님, 찾은 것 같아요. 체구도 똑같고 던전을 사라지게 하는 걸 보니 케린이 맞겠죠.”
세상에.
찾아낼 거라 기대하지 않았던 은월각주는 입을 벌렸다.
하지만 서진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기에 덤덤하게 지시했다.
“그래서 어디로 갔습니까?”
이현지는 땅의 기억을 짚어가며 안내를 시작했다.
나무와 풀이 무성한 작은 산을 넘어서 내려간 뒤에 개경의 한 외곽 지역에서 이현지는 멈춰 섰다.
“저기로 들어갔었어요.”
그녀가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곳엔 5층짜리 낡은 건물이 있었다.
“은월각주.”
서진의 부름에 그는 단검을 꺼내 들며 말했다.
“예, 갔다 오겠습니다.”
은밀한 잠행이 특기인 은월각주를 서진이 데려온 이유였다.
은월각주는 스킬로 전신을 투명하게 만들어 회색 건물로 향했다.
땅을 밟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기에 믿을만한 실력이었다.
그리고 15분쯤 지났을 때, 그는 다시 돌아와 서진에게 보고했다.
“내부에는 각 한 층마다 1명의 헌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현지 과장이 말했던 케린의 인상착의와 일치하는 인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4명의 수준은 어땠지?”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세 명은 4레벨로 예상되며 한 명은 5레벨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선택을 해야 한다.
케린이 올 때까지 가만히 있을 건지 아니면 먼저 저들을 제압하고 건물 안에서 기다릴 건지.
그때 정반대 편 건물 너머에서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이현지는 서진에게 눈빛으로 케린이 확실하다는 걸 전달했다.
외출했다가 지금 건물로 돌아오는 모양이다.
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이렇게 된 이상, 기다릴 필요도 없다.
팟!
서진은 땅을 박차고 용수철처럼 튀어나가며 검을 뽑았다.
저녁노을이 사라지기 전의 순간.
해와 달의 역할이 교체되는 얕은 어둠 속에서 서진의 번개가 화려하게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흑룡검술 제5식 전광검.
초살의 의지를 담은 전격이 느려진 시간 속에서 케린을 향해 나아간다.
치지직.
무질서하고 파괴적인 뇌기가 눈을 크게 뜬 케린의 목을 찔러 들어갔다.
그야말로 일격필살이라 할 수 있는 한 수.
하지만 결과는 서진의 기대를 무너트렸다.
전류가 케린의 살갗에 닿는 순간, 케린의 몸이 잔상을 그리며 뒤로 쭈욱 밀려났다.
마치 누군가가 밀친 듯한 케린의 움직임은 서진의 공격을 피해버렸다.
그런데 뒤로 밀려나는 속도를 감당하기 힘든지 케린은 결국 땅바닥을 뒹굴며 겨우 멈추었다.
거기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마 본래의 능력이 아니라 아이템이나 아티팩트 효과가 발동된 것이 아닐까.
작은 의문은 찰나에 스쳐 지나가고 전격은 다시 케린에게 쇄도했다.
이때, 건물 안에 있던 헌터가 창문을 깨고 내려와 서진의 공격을 몸으로 막아섰다.
**
케린은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찾아온 거지?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오늘 새벽에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키려던 작전이 어그러졌다는 것.
방금 아티팩트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한서진이 눈앞에 있는 한 위협은 계속될 것이다.
한서진과 정면으로 싸워선 이길 수 없으니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죽을 거야.’
케린은 벌떡 일어나 상태창을 켜서 스킬 던전 지배를 터치했다.
그러자 A등급부터 C등급까지 총 13개의 던전을 제어할 수 있는 창이 펼쳐졌다.
케린에게 던전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관리창에서 즉시 꺼내서 터트릴 수 있는 것과 특정 위치에 두고 다녀야 하는 것.
A급 던전은 후자에 속했다.
그래서 흑룡검가 근처에 숨겨뒀는데 한서진이 오는 바람에 계획이 제대로 꼬였다.
공들인 A급 던전 3개가 없는 이곳에서 나머지 던전을 풀어도 의미가 없다.
‘일단 여기를 벗어나야 해.’
일단 무사히 도망친다면 불안한 한서진은 흑룡검가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면 자신을 미끼 삼아서 가문으로 유인하는 방법도 있고.
케린은 시간 벌이용으로 B급 던전 하나를 골라 이곳에 소환했다.
콰아앙!
쿠구구구구.
개체수가 워낙 많은 걸로 유명한 거대 개미 던전을 터트렸으니 고생 좀 하겠지.
케린은 한서진 일행을 향해 조소를 날리며 건물 뒤편으로 달려갔다.
“이동 던전 개방.”
꿀럭.
허공에서 작은 던전이 생기더니 점차 커지면서 사람 하나가 오갈 정도로 확대되었다.
“됐어.”
이동용 던전을 만들어서 한번 간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스킬.
쿨타임이 일주일 단위라 자주 쓸 수 없지만 지금은 아낄 상황이 아니었다.
케린이 다소 안심한 얼굴로 던전에 들어가려는 순간, 그 자리에 자줏빛 번개가 내리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