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마른하늘에서 떨어진 번개는 케린의 정면을 휩쓸었다.
던전으로 들어가는 케린을 막기 위한 의도가 포함된 뇌격.
그 의도대로 케린은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뇌격의 여파에 휩쓸렸어야 할 터인 케린의 모습은 멀쩡했는데,
반사적으로 발동된 실드 아이템 덕분이었다.
“아이템을 참 많이 갖고 다니는군.”
스킬이 전투 계열은 없고 던전 관련만 있을 테니 당연한 방책이겠지만.
상대한 입장에선 은근히 거슬렸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아이템으로 막을 수 있을까.
흑룡검술 제 1식 섬아.
덩치를 부풀린 늑대 형상의 전격이 스파크를 내며 케린에게 향했다.
콰앙!
그러나 케린은 전조도 없이 순간 이동을 하여 섬아를 피해냈다.
“이번에는 블링크 마법이 각인된 아이템인가.”
회피나 방어 계열 마법이 있는 아이템은 목숨과 연관되어 있기에 특히나 가격이 비쌀 텐데.
하지만 아이템으로 인한 마법 사용은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다.
아까부터 같은 마법이 아닌 다른 것을 차례대로 쓴 것만도 알 수 있듯이.
재사용 대기시간이 길어서 연달아 쓰질 못한다.
몇 번 몰아붙이면 갖고 있는 아이템도 무용지물이 되겠지.
“도대체...도대체 네가 왜 여기 있는 건데!”
케린은 그런 서진을 보며 경악하여 소리쳤다.
분명 거대 개미 군단에 둘러싸여 있어야 정상인데.
어째서 아무런 상처도 없이 이렇게 빠르게 쫒아올수 있는 거지.
그에 대한 서진의 답은 간단했다.
“네가 아이템을 쓰는 것처럼 나도 적합한 곳에 썼으니까.”
가문에서 이현지를 데리고 출발하기 전.
서진은 혹시나 케린을 찾아냈을 때, 던전을 미끼로 던지고 도망칠 것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가문의 비고에서 ‘페어리의 꽃’을 들고 나왔다.
봉인된 케이스를 풀고 밖에 꺼내기만 하면 강력한 향이 나와 몬스터를 유도할 수 있는 아티팩트.
제작이 가능한 게 아니기 때문에 매우 귀하지만 임시 가주인 만큼 써도 상관없었다.
서진은 그것을 발이 빠른 은월각주에게 맡기고 도망치게 했다.
발이 느린 이현지를 등에 업고 도망쳐야 하기 때문에 평소보단 느리겠지만 본인이 할 수 있다고 했으니.
물론 페어리의 꽃이라도 강력한 몬스터라면 유인이 힘들었을 터.
하지만 거대 개미 군단은 집단이라 무서운 것이지 단일 개체로 보면 약체에 속했다.
페어리의 꽂을 든 은월각주는 무리 없이 개미 군단을 이끌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을 것이다.
도망치면서 가문에 연락하라고 했으니 지금쯤 출동했겠지.
그리고 적당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흑룡가의 헌터들이 사냥하면 깔끔하게 완료.
아이템이란 말만 듣고 대략 어떻게 처리했는지 파악한 케린은 쌍심지를 켰다.
자신의 생각이 간파당한 것 같아 불쾌했기에.
서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뇌기를 다시 만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장소에 있는 건 너하고 나, 둘 뿐이라는 거지.”
건물에 있었던 4명의 헌터들은 던전이 터지고 나서 쓸려나갔으니까.
물론 케린이 그런 거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겠지만.
서진은 케린이 아까 들어가려던 던전 입구를 힐긋 쳐다봤다.
아마 저게 도주로가 맞겠지.
뇌격을 연발해 거리를 떨어트려 놓았지만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이 거슬린다.
유지 시간이 긴 스킬인 걸까.
그렇다면 작은 틈이라도 줘선 안 되겠지.
서진은 한 번 더 전광검을 펼쳤다.
흐름을 느리게 느낄 수 있는 만큼 몸에 부담이 가지만 그런 걸 가릴 상황은 아니었으니.
파지지지직!
이번에는 실드 따위로는 막지 못하게 마나를 더욱 끌어올렸다.
검이 뇌기를 수용할 수 있는 한계까지 증폭시키며 강렬한 자줏빛을 키워간다.
이윽고 뇌기가 가득 차오른 검이 비명을 지를 때, 압축을 시작했다.
무질서하게 뻗어 나가던 번개가 검면에 밀착되며 반듯한 모양이 완성되어 간다.
칠흑의 검신 위에 새로운 뇌검이 덧씌워진 형태.
6레벨에선 용체화 상태가 아니고선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기예.
이 모든 건 서진이 땅을 박차고 케린의 지척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몇 발자국 동안 이뤄낸 일이었다.
흔한 스파크의 비명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의 뇌검이 케린의 심장을 노렸다.
하지만 전광검을 한번 겪었던 케린은 대응법을 벌써 파악하고 있었다.
의식이 잠깐 끊겼다가 돌아온 것을 눈치챈 순간, 도약 스킬이 있는 신발을 이용해 뒤로 피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급히 떠오른 만큼 도약 후의 착지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고.
서진에게 그런 빈틈을 보이게 된 건 그녀에게 큰 패착이었다.
그 결과, 어느새 다가온 서진의 검격을 허용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아아악!”
필사적으로 몸을 틀었지만 흉부를 크게 베이는 것을 피할 순 없었다.
케린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거리를 벌리며 다급하게 던전 관리창을 열었다.
땅을 구르면서 눈에 흙이 들어가 앞을 보기가 힘들었지만 아무거나 상관없었다.
이곳에서 모아둔 던전을 다 쓰더라도 살아남는 게 중요했으니까.
콰아앙!
그렇게 던전이 하나 나타난 순간, 서진의 섬아가 케린에게 내리꽂혔다.
“끄아악!”
번개에 직격당한 케린은 전신이 마비되어 두 번째 던전을 개방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흑호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안에 받쳐 입었기에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다.
비록 서진이 직접 검으로 베는 걸 막을 순 없었지만 떨어진 거리에서의 번개 공격은 흑로 갑옷으로 경감이 되었으니.
서진은 케린의 몸 주변에 스파크가 튀는 것을 확인하며 앞에 있는 리자드맨을 베었다.
‘귀찮긴 한데 대비는 해놨으니까.’
방금 서진이 케린에게 날린 번개는 평범한 뇌기가 아니었다.
타인의 마나 흐름에 간섭할 수 있는 용체화의 묘리를 담은 뇌격.
아마 마비가 풀리고 마나를 움직이려 할 때쯤 깨닫게 될 것이다.
자신의 몸 상태를.
‘그래도 혹시 모르니 빨리 처리해야 되는데.’
비교적 높은 지능과 비늘을 가진 리자드맨은 서진의 발을 그나마 묶어둘 수 있는 몬스터였다.
진열을 유지하면서 공수를 번갈아 가며 서진을 둘러싸는 리자드맨에게선 스텟도 얼마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니 그냥 한 번에 쓸어버리는 게 낫겠지.”
파지지직!
흑룡검술 제4식 만천뇌우.
밀집되어 있는 리자드맨들에게 수천 갈래로 나뉜 전격이 폭풍우처럼 쏟아졌다.
**
한편 케린은 리자드맨이 서진을 막아서고 있는 광경을 보며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흑호 갑옷이 뇌기를 많이 흡수한 덕분에 마비도 오래 지속되진 않았다.
이제 던전 조금 더 풀어놓고 무사히 도망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어? 이거 왜 이래.”
케린은 당황하며 자신의 몸을 만졌다.
던전을 더 터트리기 위해 마나를 움직이려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케흑.”
오히려 마나를 끌어내려 할수록 내부가 진탕 되어 피가 올라왔다.
“도대체 뭐냐고!”
시간이 지나서 닫혀버린 이동 던전도 다시 열 수가 없다.
모든 스킬은 마나를 통해서 발동되기 때문에.
케린은 초조한 시선으로 서진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이러고 있는 시간에도 리자드맨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왜 마나를 움직일 수 없는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도망가면서 생각하자.’
그리고 아이템도 마나를 소모해서 발동해야 되기에 케린은 그저 달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 그녀가 지내던 건물 주변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밤이기도 하니 최대한 산속 깊숙한 곳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악, 흐악.”
입에서 단내가 나는 건 물론이고 아까 착지하면서 발도 삐끗한 상태지만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면서도 그런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원래라면 대규모 던전 브레이크에 한서진과 같이 많은 흑룡가 헌터들이 죽어 나가는 걸 멀리서 감상하고 있어야 하는데.
“아악!”
어두운 산길에서 발을 헛디딘 케린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하아...윽.”
일어나려 해도 체력의 한계를 넘었는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사박.
그때 누군가 낙엽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케린의 고개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빠르게 돌아간다.
“그렇게 멀리 가진 않았네.”
애초에 피를 흘리면서 지친 발걸음으로 도망간다 한들 서진을 따돌리는 건 불가능했다.
서진의 목소리가 들은 그녀는 다시 던전을 개방하려 했다.
하지만 역시나 마나가 움직이지 않았다.
둘 사이의 거리가 열 발자국 정도로 좁혀졌을 때, 케린은 표독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 내 몸에 무슨 짓 한 거야.”
“마나가 움직이지 않지?”
서진은 드디어 끝을 내기 위해 케린에게 다가갔다.
케린은 입안에 고인 피를 뱉고 눈을 치켜떴다.
“죽이려고?”
“설마 그 지랄을 해놓고 살고 싶은 거야?”
서진은 이 자리에서 케린을 바로 죽일 생각이었다.
그간 해왔던 짓거리를 생각하면 누구든 자비를 베풀려 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용체화의 힘을 담은 뇌기로 케린의 마나 경로를 마비시킨 것이 그리 오래가지 않기 때문이다.
서진이 검을 들자 케린은 다급하게 외쳤다.
“나 죽이면 A급 던전 3개가 풀릴 거야! 감당할 수 있어?”
케린이 완전한 지배력을 갖고 있는 B,C급 던전과 달리 A급은 불완전한 상태였다.
제어를 하던 그녀가 죽게 되면 A급 몬스터가 바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흑룡검가 근처에 있는 게 터지면 지금 있는 흑룡가 헌터들로는 절대 못 막아.”
“역시 일부러 이때를 노린 게 맞구나.”
“그래서 뭐, 그게 나빠? 애초에 너만 진작에 죽었으면 이런 일 벌이지도 않았어.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목숨을 구걸하든 저주를 하든 하나만 하지?”
이미 케린의 정신은 온전한 상태가 아닌 듯했다.
“그리고 지금 흑룡검가는 네가 걱정할 필요 없어. 충분한 전력이 모여있으니까.”
“그게 무슨.”
푸욱.
망설임 없는 서진의 검이 케린의 목에 박혀 들어갔다.
A급 던전 때문에 케린을 살려두기엔 위험성이 너무 컸으니.
아마 지금쯤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겠지만 서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흑룡검가, 기갑성가, 철혈백가 모두 A급 던전 공략 경험이 숱하게 있는 가문이기에.
서진은 케린의 시체를 챙기고 곧장 가문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흑룡검가의 후문.
경계를 서고 있는 자호대 소속의 한 헌터가 하품하려다 눈치를 보며 참았다.
같이 경계를 서고 있던 선배 자호대원은 그 모습을 보고 핀잔을 주었다.
“지금 잠이 오냐?”
“아닙니다.”
“밤에 뭘 하길래. 눈 제대로 떠 새끼야.”
“옙.”
잠시 앞만 보고 있던 후배 자호대원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 그런데 정말 습격을 당할 가능성이 있습니까? 미친 게 아닌 이상에야 흑룡검가인데.”
“그건 모르지. 세상에 미친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자호부대장이 그 짓을 해서 뒤질지는 누가 알았었냐?”
“하긴 그렇네요.”
그 순간, 그들의 눈에 저 멀리서 무언가 생겨난 것이 보였다.
“시발 저거는!”
던전이 출현하는 모습을 예전에 우연히 본 적 있던 자호대원은 바로 알아챘다.
후문에는 그들 외에도 다른 헌터들도 경계 중이었기에 곧바로 모든 헌터들에게 전파되었다.
“정말 A급 던전이군.”
흑룡가에서 대기하고 있던 철혈백가와 기갑성가의 헌터들도 쏟아지는 몬스터를 막기 위해 후문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