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미국 뉴욕에 위치한 국제 헌터 연합의 본부.
수행원들마저 들어가지 못하는 원탁의 회의장에서 1시간째 회담이 이어지고 있었다.
“최근 마약의 확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약이란 마나와 결합해서 복용자의 육체 능력을 강제로 증폭시키는 물건을 뜻했다.
단순하게 스텟을 펌핑시키는 것부터 환각, 투쟁심까지 함께 올려주는 약까지.
따로 정리해야 할 만큼 종류가 다양했다.
각국의 정상급 헌터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확실히 영국에서도 그런 약을 먹다가 던전에서 죽는 헌터가 많아졌습니다.”
“지금까지 증가 추세를 보이긴 했지만 최근 들어 급증하긴 했죠.”
“이쯤 되면 연합에서 별도 기구를 신설해서 대대적으로 추살해야 되지 않겠소?”
“마약이란 것이 어떤 국가든 간에 자국의 전력을 깎아 먹는 바이러스나 마찬가지니까요.”
메이너드 총장은 일치된 의견을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우선 연합에서 자체적으로 조사 중이니 만약 각국에 협조 요청할 일이 생기면 그때를 대비해 미리 부탁드리겠습니다.”
“과하게 휘젓고 다니지만 않는다면야 괜찮지.”
“그 정도야 얼마든지.”
구태여 대답을 하지 않은 다른 헌터들도 동의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은 정부 수반인 대통령이나 총리가 아닌 헌터들.
그러나 말에 담긴 무게는 누구보다 무겁다 할 수 있었다.
한정된 임기 동안 권력을 누리는 이들보다, 군대도 어찌하지 못할 무력을 지닌 집단의 리더가 더 강한 것은 너무나 당연했기에.
단지 상호존중을 하며 암묵적인 불가침을 유지하고 있을 뿐.
그러니 이 자리에서 내뱉는 말에 따라 연합이 나아갈 방향이 정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그리고 마약이란 게 테러 단체와도 깊은 관계가 있지 않겠소?”
올해 들어 국소적인 테러가 많아진 만큼 연관성이 짙다고 볼 수 있다.
“그럼 한 번에 엮어서 쳐버려도 괜찮겠군요.”
“만약 임시 기구 만들어지면 이번엔 헌터 차출 비율 제대로 정합시다. 저번엔 엉망이었어요.”
각자의 의견을 개진하고 나서 조용히 있던 흑룡가주도 입을 열었다.
“마침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최근 유니온이 너무 느슨해진 것 같던데. 놈들이 한국에 저지른 짓을 되짚어보면 테러 단체와 별 차이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메이너드 총장은 흑룡가주의 말을 인정하며 나섰다.
“네, 그렇지 않아도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려 했습니다. 유니온의 마스터가 최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통제력이 약해졌단 말이 돌고 있습니다. 커흠.”
총장은 마른기침을 하며 말을 계속했다.
“여태까지 그나마 위험인물을 억제하던 마스터가 전면에 나서지 않으니 미국에서도 유니온 멤버의 과격한 행동으로 인해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면 마스터는 현재 어디에 있나요?”
“찾기가 어렵더군요.”
“허 참, 그러면 망나니들이 날뛰는 걸 알아서 처리해야 한단 말인가.”
흑룡가주가 가만히 있어도 다른 헌터들이 말을 이어갔다.
“유니온의 마스터가 10레벨이라더니 소문이 맞는 모양이군.”
유니온의 본부는 숨겨져 있는데 미국의 내로라하는 탐지계 헌터들도 찾지 못할 정도였으니.
그래서 대중들은 마스터의 스킬이 은신, 은폐 계열이라 추측하고 있었다.
10레벨 헌터가 특기 스킬로 숨겨버리면 알아낼 방법이 요원하니까.
같은 10레벨이 직접 나서면 찾을 수 있을지 모르나 엉덩이가 무거운 이들이 그런 일로 움직일 리가 없었다.
어찌 보면 비합리적이지만 따지고 보면 세상일이 어찌 항상 합리적으로만 굴러갔던가.
유니온의 마스터를 찾아내야만 하는 강력한 명분이나 이익이 없다면 앞으로도 이들이 움직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회담이 마무리될 때쯤 총장은 지나가는 뉘앙스로 가볍게 말했다.
“다들 세리아라는 7레벨 헌터에 대해 들어보셨는지요.”
알고 있는 헌터도 있었고 모르는 헌터도 있었지만, 반응은 전부 차갑지 그지없었다.
7레벨이란 성취는 이 원탁에서 거론하기엔 너무 가벼웠기에.
“대단한 문제는 아니고 그녀에 관해 관심이 있다면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이 계신지 해서 꺼내 봤습니다만, 아무래도 없는 듯하군요.”
메이너드 총장은 역시나 하는 얼굴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럼 이번 회담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모두가 일어서며 회의장을 나설 때 가장 안쪽에 앉아있던 흑룡가주는 먼저 가는 총장을 불러 세웠다.
“총장, 세리아라는 헌터의 스킬이 성역이라 했던가.”
“음? 관심이 있으신 겁니까?”
한국의 가주가 나설 줄 몰랐던 메이너드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관심을 보일 만한 녀석이 가문에 있어서 말이지.”
“그렇군요. 그럼 일단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자면 세리아를 찾아서 구출하는 일입니다. 다만 들이는 품에 비해 얻을 수 있는 건 없는 수준이라 그다지 추천드리진 않습니다.”
“괜찮네.”
한벽호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다리를 놔주는 것 정도는 할만하다 여겼다.
어차피 이 건을 받을지 말지는 본인의 선택이니.
메이너드는 총장은 떨떠름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야... 한번 세리아 가족과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언니에게 이야기를 듣는 편이 빠를 겁니다.”
**
서진은 전화를 통해 흑룡가주에게 세리아의 현재 상황을 전해 들었다.
‘성역 스킬을 가진 세리아가 남미에 갇혀있고, 성역의 힘은 그전부터 거의 사라졌었던 상태라...’
설명을 끝낸 한벽호는 짧게 덧붙였다.
-이건 후계자 임무도 아니고, 하라고 강요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선택은 너의 자유다.
“알겠습니다.”
서진은 잠시 결정을 미루고 전화를 끊었다.
우선 성역이 사망 확정을 해주 할 수 있는지가 관건인데.
일단 성역이 어떤 스킬인지 정확히 알 필요성이 있었다.
다행히 그 부분은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인터넷에 세리아가 성역을 전개하는 모습은 영상으로 올라와 있었으니까.
“이건?”
영상 재생이 끝나고 서진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미 과거에 본 적이 있었기에.
반구형의 영역이 주황빛을 내며 넓어지는 모습.
이계에서 어느 페어리가 쓰던 스킬이었다.
그땐 성역이란 명칭은 안 붙였지만.
어쨌든 서진이 기억하는 그 스킬과 동일하다면 사망 확정은 얼마든지 해주 할 수 있다.
다만 8레벨이 되어야 하는데 현재 세리아는 7레벨.
“아 그래서.”
서진은 왜 세리아가 남미로 떠난 건지 이해했다.
성역 스킬만의 독특한 성장 방식 때문이었다.
그 페어리도 다음 레벨로 올라가기 위해서 능력을 봉인하고 험지로 제 발로 들어갔었으니.
가서 뭘 하는진 관심이 없어 듣지 않았지만 중요한 건 세리아의 행보가 페어리와 똑같다는 점.
결론을 도출한 서진은 이내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구출할 필요는 없지 않나?’
스킬 수련의 일환이라면 오히려 방해하는 것일 테니.
아니면 문제가 생겨 정말 도움이 필요한 상황일 수도 있다.
아무래도 자세한 얘기를 듣고 판단해야 할 듯싶다.
**
그로부터 하루가 지나고, 흑룡가주와 흑룡대 1팀이 귀국했다.
흑룡가주는 서진에게 치하의 말을 건넸다.
“며칠간 가문을 이끄느라 고생했다.”
“아닙니다.”
“지금은 나보다 너를 더 찾는 사람이 있으니 자리를 양보하도록 하마.”
흑룡가주와 함께 온 외국인이 한 명 있었다.
“안녕하세요. 우선 관심을 보여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세리아의 언니인 엘리 마르테네스예요. 그냥 엘리라고 부르면 돼요.”
“반갑습니다. 한서진입니다. 여기서 대화하긴 그러니 안으로 들어가시죠.”
서진과 엘리는 서로 악수를 하고 응접실로 이동했다.
“일단 먼저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겁니다. 정말 구출이 필요한 상황인 건지. 그냥 험지에서 수련 중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건 아니에요. 이 펜던트를 보세요.”
서진은 그녀가 내민 펜던트를 살펴봤다.
별다른 능력이 없는 단순한 마나 반응형 아이템이었다.
펜던트에 달린 보석에 마나를 주입하면 색이 변하거나 하는 장난감에 가까운 물건.
심지어 일회성이라서 이미 색깔이 변한 상태였다.
“단순한 펜던트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건 세리아가 착용하고 있는 펜던트와 연결되어 있어요.”
“자매가 같은 걸 착용 중이었군요. 그럼 한쪽에서 마나를 넣으면 다른 펜던트의 색이 변하게 되나요?”
“네. 원래는 푸른색이었는데 지금은 보다시피 붉은색이죠.”
엘리는 펜던트를 손에 꼬옥 쥐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세리아가 떠나기 전에 제가 이걸 선물해주었거든요. 위험해지면 이걸로 신호를 보내 달라고 말했죠.”
“그럼 기왕이면 위치 추적 기능이 달린 아이템이 더 좋을 텐데 그건 왜 안 준겁니까.”
“그건 걔가 한사코 안 받으려 해서 겨우 타협한 게 이 펜던트였어요. 휴대폰도 안 들고 가면서 무슨 배짱이었던 건지.”
아마 성역 스킬을 올리기 위한 조건과 연관이 있었겠지.
서진은 어렴풋이 납득했다.
그녀의 언니에겐 말해주기 힘든 내용이기에 어쩔 수 없지만.
“그래서 펜던트 색이 언제쯤 변한 겁니까?”
“3주 정도 됐어요.”
그러자 뒤에서 조용히 있던 설하윤이 덧붙였다.
“3주 전이면 콜롬비아의 마약왕이 정규군을 몰아내고 영역을 확장한 시기와 겹치는군요.”
“예, 맞아요. 그때 휘말리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럼 지금 억류된 상태인 겁니까?”
“그건 잘 모르겠어요. 숨어있는 건지 갇혀있는 건지.”
서진은 잠시 소파의 등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세리아가 8레벨이 될 수 있을지 불확실한 시점에서 남미로 향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지만 사실상 다른 방도는 없었다.
어제 구현수 비서를 시켜서 알아본 바로는 현재 풀려있는 물량으론 3명을 해주 하기엔 재료가 모자랐으니까.
서진은 이번 일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사실 개인적으로 얻고 싶은 것이 현재 남미에 있다는 점도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
바로 베놈 스콜피온의 내단.
여태까지 독 공격 때문에 거슬렸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전투 상황에서 중독이 되면 기본적으로 움직임에 제약이 생기게 된다.
여태까지는 스컬 아나콘다를 제외하곤 중독 상태로도 어렵지 않게 적을 상대했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란 보장은 없다.
이제는 독 내성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베놈 스콜피온의 서식지가 근처에 있다고 했으니.’
세리아를 찾으러 가는 김에 내단도 얻을 계획이었다.
서진은 소파에서 등을 떼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럼...?”
엘리는 눈빛에 희망을 담아서 바라봤고 서진은 그녀가 바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가겠습니다.”
“아아, 정말 감사드려요.”
엘리는 펜던트를 감싸 쥐고 눈물을 글썽였다.
“서진 님.”
고개를 돌리자 설하윤이 다가와서 걱정스러운 듯 속삭였다.
“현재 콜롬비아는 굉장히 혼란스럽고 위험합니다. 특히 마약왕 힐베르토가 장악한 중서부 지역은 외부에서 들어가는 것부터 난관이라고 합니다.”
설하윤의 작은 말소리를 들은 엘리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 점은 괜찮습니다. 협력자가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