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몇십 년 전, 헌터의 등장과 더불어 탄생한 집단의 종류는 꽤 다양했다.
연합, 가문, 길드, 마탑 등 수많은 무력단체가 나타났고 그들이 지향하는 바도 각자 달랐다.
그러나 일반인이 보기엔 비슷한 성격의 집단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길드와 가문 그리고 패밀리였다.
한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며 강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이 비슷했으니까.
이런 공통점은 있지만 막상 자세히 들여다보면 천차만별이라 같은 범주로 묶기 힘든 면도 있었다.
철혈백가처럼 권한보단 의무를 더 많이 짊어지며 지역을 수호하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힐베르토 패밀리처럼 한 지역을 악랄하게 지배하는 집단도 있었으니.
오늘도 칼리에는 힐베르토 패밀리의 조직원들이 도시를 누비고 있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그런 조직원에게 알아서 고개를 숙이며 최대한 순종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어디든 예외는 있는 법.
아무리 무서워도 옳은 신념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소수는 있기 마련이다.
다만 거악 앞에서 힘없는 신념은 무참히 짓밟힐 뿐.
여태까지 칼리에선 항상 그렇게 흘러갔다.
**
해가 저물어 어두컴컴해질 때쯤, 칼리에 있는 어떤 집 앞에 멈춰 선 검은 승합차.
문이 열리고 하차한 일곱 명의 힐베르토 조직원들.
그리고 바로 뒤에 도착한 검은 세단에선 양복을 입은 남자가 내리며 입을 열었다.
“이 집이냐, 내 아들에게 모욕을 줬다는 사장이 사는 곳이.”
“예, 캡틴.”
조직의 중간 보스에 해당하는 직급인 캡틴.
평소엔 이딴 후줄근한 가정집에 올 일은 없지만 이번엔 아들이 걸린 일이었다.
식당에서 조금 소란 좀 피웠다고 감히 힐베르토 패밀리의 캡틴 아들을 쫓아내다니.
“들어가.”
캡틴인 펠리페의 한마디에 부하들이 현관문 앞으로 달려갔다.
손잡이를 부수고 집 안으로 쳐들어간다.
“꺄악.”
“뭐 하는 거야!”
집에 있던 부부가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캡틴은 느긋하게 걸어 들어가 말했다.
“식당에서 내 아들에게 창피를 줬으면 각오를 했어야지.”
“무전취식에 손님에 찝쩍거리고 심지어 내 아내까지 욕보인 놈을 그대로 놔뒀어야 한다고? 아무리 힐베르토 패밀리의 캡틴이라 해도 너무한 거 아니오?”
전부 사실이었지만 펠리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참고 나서 나중에 정중하게 피해 보상을 요구했어야지.”
“허.”
식당 사장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사실 그도 캡틴의 아들을 건드리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너무 참을 수 없어 홧김에 쫒아내 버렸는데 결국 아버지도 아들과 매한가지였다.
“알아보니 칼리에 온 지 얼마 안 됐더군. 특별히 작은 대가를 지불하면 넘어가주지.”
“정말이오? 대가는 뭐요?”
“별건 아냐. 네 아내를 하룻밤만 데려가기만 할 거니까.”
그러자 식당 사장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달려들었다.
“미친! 개 같은 새끼들...커헉!”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덤볐지만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사장은 명치를 맞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캡틴은 싸늘한 눈빛으로 떨고 있는 여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뭐하냐 저년 안 꺼내고.”
“예, 캡틴!”
부하들이 사장의 아내에게 다가가는 순간, 현관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나쁜 놈들이네.”
목소리의 주인공인 서진은 바닥에 널브러진 유리 파편을 밟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정보를 얻기 위해 저택에서 나오는 차량을 하나 추적했더니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을 줄이야.
캡틴은 서진을 향해 몸을 틀며 나지막이 말했다.
“사장의 친구냐?”
“아니, 모르는 사람.”
“그럼 꺼져.”
펠리페가 무력이 아닌 말부터 꺼낸 이유는 서진의 기세가 심상찮았기 때문이다.
내심 물러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서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기를 네놈의 사지로 만들어주지.”
캡틴의 눈짓을 받은 부하들이 총을 꺼내 드는 순간, 서진은 검을 횡으로 그었다.
“아악!”
단 일검에 일곱 명의 팔이 잘려 나갔다.
타앙!
경악한 펠리페는 서진을 향해 급하게 리볼버의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은 서진의 가슴에 적중했지만 옷에 흠집조차 내지 못하고 떨어졌다.
서진이 입고 있는 반룡포를 고작 일반 권총이 뚫을 리가 없었으니.
“시발...”
펠리페의 기습은 실패했지만 일단 그도 헌터였다.
허리춤에 있던 막대기 두 개를 꺼내서 결합해 창을 만들어 서진에게 겨누었다.
“조립형 창인가?”
“왜? 이제 겁나나.”
웃기지도 않는 말에 서진은 입을 여는 대신 검을 휘둘렀다.
서진의 검은 두부 자르듯 창날을 날려버리고 펠리페의 오른팔까지 베어버렸다.
“으아악.”
서진은 바닥에 엎어진 펠리페의 걷어차려다 여기가 가정집이라는 걸 뒤늦게 자각했다.
구석에 피신해 있는 집 주인을 향해 서진이 사과했다.
“아, 죄송하게 됐습니다. 놈들을 끌고 나가도록 하죠.”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아니 어쨌든 정말 감사합니다. 집은 신경 안 써도 괜찮습니다.”
식당 주인은 경황없는 와중에도 고개를 숙였다.
서진은 밖에서 대기 중인 설하윤과 정소율을 불러서 놈들을 전부 집에서 끌어냈다.
“살아 있는 놈이 하나뿐이네.”
서진이 일거에 팔을 자르고 나서 일곱이 쇼크사로 죽고, 펠리페 한 명만 숨이 붙어있었다.
서진은 기절해 있는 그를 으슥한 곳을 끌고 갔다.
그리고 뺨을 연달아 때리자 혼란이 가득한 눈빛으로 정신을 차린 펠리페.
“여긴 어디...헉!”
눈앞의 서진을 보자마자 기겁하며 숨을 들이켰다.
“지금부터 질문을 할 건데 넌 대답만 하면 돼.”
싸늘한 서진의 목소리에 펠리페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펠리페가 보기에 서진은 도저히 항거 불가능한 존재.
최대한 원하는 걸 들어주며 심기를 맞춰 주는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세리아라는 헌터가 너희 패밀리에 잡혀들어간 적이 있나?”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저택에 한 명 가둬놨다는 얘긴 들었습니다.”
“그게 언제지?”
“일주일 정도 됐을 겁니다.”
대화를 듣고 있던 정소율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가둬놓은 위치는?”
“저도 모릅니다.”
서진은 검을 들어 펠리페의 허벅지를 베었다.
“아아악!”
“진짜 몰라?”
“끄윽. 정말...입니다. 간부는 저 말고도, 여럿 있고 정보를 항상 공유하진 않습니다.”
펠리페는 추가 고통을 피하고자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 짜내서 추측성 정보를 내놓았다.
“하지만 중앙 건물에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중요 인물을 가둬놓을 때 주로 거기 둡니다.”
힐베르토 패밀리의 조직 건물은 총 5채.
동서남북에 하나씩 있고 중앙에 하나가 있다.
“진작에 그렇게 열심히 말하지.”
그 뒤로는 건물의 내부 구조, 안에 배치된 조직원의 숫자 등을 캐물었다.
그렇게 십여 분간 심문을 하고 나니 질문거리도 전부 떨어졌다.
서진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불안해진 펠리페는 눈치를 살폈다.
“괜찮다면 이제 가봐도 되겠습니까? 조직에서도 제가 없어진 걸 알면 아마 소란이 일 겁니다.”
“정말?”
검의 끝이 사타구니를 향하자 펠리페는 진실을 토해냈다.
“죄송합니다! 사실 캡틴은 하루 이틀 정도는 자리를 비워도 괜찮습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그만... 죄송합니다.”
“그렇게 가고 싶다면 보내주지.”
“예?”
콱!
서진은 검으로 펠리페의 목을 꿰뚫어서 저승으로 보내주었다.
잠깐의 적막함이 흐른 뒤 정소율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정말 저 사람이 했던 말이 맞을까요?”
“저도 무조건 믿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한 놈 더 납치해서 물어보고 일치하는 점이 있다면 믿어도 무방하겠죠.”
**
그리고 다음날 오후.
서진은 마찬가지로 조직원을 잡아서 정보를 뽑아내고 어제 얻었던 정보와 비교해보았다.
“다른 점은 거의 없네요.”
세리아가 힐베르토 패밀리에 잡힌 건 확실했고 중앙 건물에 있을 가능성은 높은 편이었다.
선택지는 좁혀졌으니 나중에 현장에 가서 정소율이 마나 탐지를 하면 명확해질 터.
문제는 중앙과 인접한 북쪽 건물이 마약왕이 지내는 저택이라는 것.
생각 없이 쳐들어갔다간 마약왕에게 발이 묶일 확률이 높다.
그 사이에 세리아를 빼내서 다른 곳으로 숨기려 테고.
즉 마약왕이 다른 곳에 있을 때, 습격을 해야 한다.
“그걸 위해 베놈 스콜피온 먼저 잡을 겁니다.”
“아...!”
정소율은 서진의 말을 알아듣고 작게 입을 벌렸다.
마약왕이 무려 일 년간 공들인 공략 몬스터가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면 무조건 확인하러 올 수밖에 없다.
베놈 스콜피온의 서식지가 인근에 있다곤 하나 차로 1시간 거리.
습격하고 세리아를 구출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그래서 지금 공략하러 갈까 하는데 괜찮습니까? 몸 상태가 안 좋으면 내일 하구요.”
“저는 괜찮습니다.”
“저도요.”
설하윤과 정소율은 문제없다는 눈빛을 보였다.
그에 서진은 바로 서식지로 출발했다.
**
베놈 스콜피온이 사는 밀림에는 신경 써야 할 문제가 곳곳에 산적해 있었다.
위잉.
공중에 쏘다니는 검은 벌 같은 곤충형 몬스터와 땅을 기어 다니는 독사, 옅게 퍼져있는 독 안개까지.
헌터들도 기피할 정도로 까다로운 환경이었다.
베놈 스콜피온의 서식지를 쉽게 알 수 있음에도 헌터의 발길이 없는 원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약왕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데도 서식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힐베르토 조직원 두 명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마약왕의 공략이 얼마 안 남았으니 아무래도 신경을 쓰는 모양이다.
서진은 가뿐하게 둘을 기절시키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 두 명은 나중에 베놈 스콜피온이 죽었음을 알려주는 중대한 임무가 있으니까.
츠으으.
오래간만에 다른 인간을 접한 베놈 스콜피온은 독이 바짝 올라있었다.
높게 올라간 꼬리는 서진 일행을 향해 구부러진 상태.
저놈의 갑각은 상당히 단단하기 때문에 여기저기 공격하기보다 일점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도 보통 쉽게 깨지진 않는다.
하지만 제일 약한 부위를 알고 있는 서진에겐 어려운 공략이 아니다.
서진이 검에서 뇌기를 보이는 순간.
샤악!
꼬리의 독침이 서진에게 쇄도했다.
[근력이 15 상승합니다]
서진은 점멸로 회피하고 베놈 스콜피온의 등껍질 위로 이동했다.
파지지직!
자줏빛 전류를 검 끝에 응축시키며 검을 내리꽂았다.
그러자 베놈 스콜피온은 몸을 뒤틀어 서진을 떨어트리고 거리를 벌렸다.
단 일격에 서진이 포식자의 위치라는 걸 직감한 것이다.
위험을 느낀 베놈 스콜피온은 도망치려 했지만 정소율이 놓아주지 않았다.
“임프리즌.”
공중에서 나타난 거대한 물 덩어리가 베놈 스콜피온을 집어삼켰다.
그렇게 잠시 물에 갇히나 싶었지만 꼬리를 휘둘러 물 감옥을 탈출했다.
하지만 서진에겐 그 잠깐의 구속만으로 충분했다.
전광검을 펼쳐 다시 등 위로 올라가 검으로 찍어버렸다.
콰앙!
뇌기 중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서진의 자주색 번개.
그것을 압축해서 일점에 두 번 찌르니 아무리 단단한 갑각이라도 버틸 리가 없었다.
빠각.
껍질이 부서지며 불긋한 속이 드러났다.
서진은 검을 꽂아서 강한 전류를 흘려보냈다.
파지지직!!
내부에서 전해지는 뇌격에 베놈 스콜피온의 전신이 뒤흔들렸다.
이윽고 속살까지 새카맣게 타버리면서 베놈 스콜피온은 죽음을 맞이했다.
정소율은 사체를 징그러워하면서도 조금씩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내단이 있을 텐데 그렇게 태워도 되는 건가요?”
“괜찮습니다.”
경험상 이 정도로는 손상되지 않으니까.
서진은 사체를 뒤집어서 배를 갈라 내단을 꺼냈다.
어두운 녹빛이 도는 작고 둥근 형태.
이계에서 봤던 것과 똑같다.
결국 마약왕이 그렇게 얻고 싶어 했던 베놈 스콜피온의 내단은 서진의 손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