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다음 날 아침.
시계는 9시를 가리키고 있지만 늘 그렇듯 시간은 저마다 다르게 흘러간다.
출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사람도 있기 마련.
힐베르토 패밀리의 대저택도 마찬가지.
특히 북쪽 건물을 이르는 제5관은 숨소리 외엔 어떤 소음도 안 들릴 정도였다.
힐베르토 패밀리의 보스, 카밀로 힐베르토가 잠에 빠져있을 시간이었기에.
보스의 수면을 방해하다가 몇 명이 죽은 이후로는 제5관에서 침묵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절대적인 침묵이 깨지려 하고 있었다.
이유는 베놈 스콜피온의 서식지 입구에서 들려온 소식 때문.
서식지 초입에서 베놈 스콜피온의 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충격적인 내용.
‘사체라니.’
보고를 받은 언더 보스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놈이 얼마나 단단한지 먼발치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기에 더욱 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칼리에서 보스 말고 베놈 스콜피온을 사냥할 수 있는 헌터가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사체를 찍어서 보내준 사진이 있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지금 당장 보고를 해야 해.’
보스의 단잠을 방해하고 싶진 않지만 사안이 시급한 일이다.
거기다 일반 조직원들이 잠을 깨우면 목이 날아갈지 몰라도 언더 보스는 조직의 이인자에 해당하는 직급.
고작 잠을 깨웠다는 이유 하나로 죽일 확률은 희박했다.
철컥.
언더 보스인 페르난도는 보스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섯 명이 누워도 될만한 거대한 침대 옆에 페르난도가 다가섰다.
“페르난도, 무슨 일이냐.”
그의 목소리에서 별것 아닌 일이라면 반죽음을 만들어버릴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거에 일일이 겁먹는다면 조직의 이인자는 하지 못하는 법.
페르난도는 크지 않은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했다.
“보스, 베놈 스콜피온이 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어?”
힐베르토는 반쯤 감겨 있는 눈으로 페르난도를 쳐다봤다.
“내가 잠이 덜 깨서 그런가. 헛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사실입니다 보스. 아침에 발견했다고 합니다.”
페르난도는 사체를 찍은 사진을 내밀었다.
등 부분의 갑각이 박살나고 전신이 꺼뭇하게 타버린 처참한 모습.
그것을 본 힐베르토는 말없이 사진을 구겼다.
쾅!
분노에 찬 힐베르토의 주먹이 매트리스를 뚫고 들어갔다.
“거기 경계 세워두라 하지 않았었나.”
“두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략한 놈들이 사전에 기절시킨 것 같습니다.”
“기절이라.”
굳이 죽이지 않았다는 말은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으려는 샌님이거나 아니면 도발하기 위한 목적이거나.
힐베르토는 다시 한번 사진을 바라봤다.
“사체가 있는 곳이 서식지 초입이군. 여기서 처음 발견했다고?”
“그렇습니다.”
“어떤 개새끼들이.”
굳이 잘 보이는 곳에 사체를 옮겨놨다는 건 의도가 뻔했다.
“페르난도. 애들 모아라. 직접 확인해야겠어.”
“예, 보스.”
“뭐 하는 놈이든 간에 반드시 찾아내서 피부를 직접 벗겨 내줄 것이다.”
보스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페르난도의 피부가 섬찟해졌다.
**
“방금 나가는 저 차예요.”
정소율은 저택을 나가는 검은색 리무진을 가리켰다.
“8레벨급의 마력, 확실해요.”
그리고 총 여섯 대의 차량이 리무진을 호위하듯 함께 빠져나가고 있었다.
“소율 씨, 중앙 저택 쪽은 어때요?”
“조금 강한 마력 두 개가 느껴지긴 하는데...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다른 건물들은 그런 느낌마저 없어요.”
“그럼 소거법으로 생각했을 때 중앙으로 가봐야겠군요. 일단 잠시 기다립시다.”
마약왕이 서식지에 도착하고 나서 작전을 시작해야 하니까.
그렇게 50분 정도 흘렀을 때, 정소율이 입을 열었다.
“도착했어요.”
그녀의 옆에서 떠 있는 거울에 마약왕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수 속성 마법 중 하나인 리플렉트.
물로 만들어진 거울을 통해 CCTV처럼 먼 거리에서도 지켜볼 수 있는 마법이었다.
이제 사전에 계획했던 대로 투명화 마법을 걸고 저택으로 잠입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여기엔 작은 문제가 있었기에 정소율은 부끄러운 듯 말했다.
“투명화는 제가 특기가 아니라서 오래 유지하기가 힘들어요. 아마 중앙 건물에 도달하기 전에 풀릴 것 같아요.”
이번 작전은 최대한 짧은 시간에 치고 나오는 것이 관건.
그런데 건물 돌입 전에 들킨다면 소요 시간이 길어질 게 분명하다.
그리되면 조직이 세리아를 다른 곳으로 옮길 가능성이 높아질 테고.
“몇 분 유지 가능합니까?”
“5분 정도예요.”
힐베르토 패밀리 저택의 부지가 넓다 보니 5분 만에 도달하는 건 무리다.
물론 정소율에 한정해서.
당연히 서진과 설하윤은 6레벨의 검사인만큼 육체 능력만으로 5분 안에 진입이 가능했다.
그러니 해결 방법은 간단했다.
“그럼 소율 씨는 제 등에 업히세요.”
“네?”
“저하고 하윤 씨는 육체 스탯이 높으니까요.”
거기다 점멸이 있어 기동력이 더 뛰어난 서진이 업는 게 밸런스가 맞았다.
“그, 그럼...”
정소율은 쭈뼛거리며 다가와 천천히 업혔다.
문득 서진은 마도현가의 소가주가 썼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블링크는 아직 안 익혔나 봐요?”
“네. 5레벨에서 제일 어려운 마법이라 아직...”
“그렇군요.”
서진이 정소율을 업자 설하윤의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하윤 씨, 무슨 할 말 있어요?”
“아닙니다.”
설하윤이 고개를 저을 때, 정소율은 투명화 마법을 발동했다.
“꽉 붙잡으세요.”
서진은 표범처럼 풀숲을 헤치며 도약했다.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벽을 가뿐히 뛰어넘고 안으로 착지했다.
조직원이 여럿 보이지만 아무도 서진 일행을 제지하지 않는다.
소음 감소 마법까지 걸어둔 덕분에 의심조차 받지 않고 중앙 건물까지 쾌속으로 질주했다.
“이제 풀릴 것 같아요.”
정소율의 마법이 해제되기 직전, 서진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갑자기 나타난 서진 일행을 보며 놀라는 조직원.
정소율을 등에서 내려주고 있는 서진 대신 설하윤이 조용하게 그의 목에 칼을 꽂아 넣었다.
서진은 제자리에 서서 기감을 확장했다.
아까처럼 거리가 멀다면 힘들지만 건물 안이라면 얼마든지 감지가 가능했다.
‘3층.’
최소 7레벨급의 마력이 3층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정소율은 세리아의 친구이기에 더욱 깊은 확신을 가졌다.
“익숙한 마력이예요. 3층이 확실해요.”
2층으로 가는 계단은 총 3곳.
제일 우측과 좌측, 그리고 정면에 있는 중앙 계단.
굳이 인원을 분산할 필요는 없다.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다른 조직원이 서진을 보며 소리쳤다.
“니들 뭐야!”
중앙 건물에도 조직원이 많았기에 들키지 않고 올라가는 건 불가능했다.
물론 이런 상황을 예상했기에 서진은 담담하게 검기를 날려 죽여버렸다.
서진이 2층으로 올라가니 침입자를 알리는 비상벨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중앙 건물에서 뛰쳐나온 조직원들은 서진이 가려는 길목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기껏해야 2,3레벨의 헌터들.
서진의 검에서 쏟아지는 뇌격에 선혈을 흩날리며 낙엽처럼 쓸려나간다.
저택의 복도에 피가 칠해질수록 조직원들의 발이 뒤로 밀려났다.
“저건 괴물이야.”
“저런 놈을 어떻게 막으라고.”
그들이 공포에 잠식되는 사이, 서진은 3층에 도달했다.
‘너무 약한데.’
오늘 마약왕이 나가면서 정예들을 끌고 나서 그런 걸까.
아니면 다른 건물에 쓸만한 헌터들이 많은 걸까.
어쩌면 둘 다라서 손쉽게 느껴지는 것일 수 있었다.
다만 중앙 건물에도 하급 헌터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중간 보스급인 캡틴 두 명이 서진을 막아섰다.
‘시간을 들여서 투기를 끌어내면 스탯은 좀 얻을 수 있겠지만.’
서진은 그냥 빨리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상태였다.
흑룡검술 제5식 전광검.
한줄기 번개가 두 명의 캡틴에게 이어지고 전류가 번쩍이는 순간, 그들은 절명했다.
중간 보스가 허물어지는 모습을 본 조직원들은 기겁했다.
“말도 안 돼!”
“캡틴이 저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린다고?”
“썅. 난 못하겠어!!”
절망감에 휩싸인 일부 조직원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때, 도주하던 놈들의 목이 위로 치솟았다.
도망칠까 갈팡질팡하던 조직원들은 동료를 죽인 사내의 모습을 보고 숨을 집어삼켰다.
“허업. 언더 보스...”
힐베르토 패밀리에서 보스 다음으로 강한 존재.
제5관에서 일을 보던 그가 급보를 접하고 온 것이다.
“도망치는 새끼들은 내 손에 죽을 테니 어디 한번 해봐.”
싸늘하게 웃는 언더 보스를 보고 발을 떼는 간 큰 조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페르난도는 얼어있는 부하들 앞으로 나아가 서진과 마주 섰다.
“혹시 베놈 스콜피온을 죽인 게 네놈들이냐.”
“맞아, 눈치가 빠르네.”
“그리고 여기에 온 이유는 그 여자 때문이겠지.”
“반응을 보니 잘 찾아왔나 보군.”
“훗.”
페르난도는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내가 온 이상 네가 원하는 목적을 이룰 일은 없을 거다. 그 여자는 이제 다른 곳에 옮길 거니까.”
그리고 페르난도는 자신이 데려온 캡틴 네 명에게 지시했다.
“니들은 저놈 뒤에 있는 년들을 맡아라.”
“예.”
그들이 나서려는 순간, 정소율은 마법 캐스팅 준비를 마쳤다.
“아쿠아 웨이브.”
좁은 복도에서 갑자기 나타난 거센 파도가 일어나 조직원들을 덮쳤다.
콰아아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마법에 그들은 파도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 공격은 파도로 그들을 휘말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흑룡검술 제 1식 섬아.
서진이 자줏빛 전격을 물에 내다 꽂아버리자 동시에 수십 명이 감전되었다.
“으아아악!”
눈, 귀, 코 등 온갖 구멍을 통해서 전달된 전류는 그들의 뇌까지 태워버렸다.
결국 대부분의 조직원은 대규모의 전격 파도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쿨럭!”
물론 언더 보스인 페르난도는 목숨은 부지했지만 여파는 깊게 남았다.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흐르고 있을 정도였으니.
그나마 6레벨이니 버틸 수 있었던 것.
“목숨이 생각보다 질기네.”
서진은 작게 감탄했다.
꽤 강한 공격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남을 줄이야.
“소율 씨, 그 마법은 자주는 못 쓰죠?”
“네, 아무래도 시간이 걸려서...”
서진이 살짝 탐낼 정도로 위력이 준수한 공격 조합이었다.
‘가능하다면 정소율도 가문으로 끌어들이면 좋을 것 같은데.’
서진은 잠깐의 인재 욕심을 접어두고 페르난도에게 다가갔다.
페르난도가 자신의 주 무기인 실을 휘둘렀으나 거의 힘이 실리지 않은 상태.
혼미한 정신을 겨우 붙들고 있었을 뿐이니 당연했다.
서진은 비틀거리는 그의 목을 베어 죽음을 선물해주었다.
“저 방이군.”
서진은 허물어지는 페르난도의 시체를 옆으로 치우며 앞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닫혀있는 방.
“세리아!”
정소율이 제일 먼저 방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마법으로 문을 박살 내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율?”
서진이 방에 들어가니 그토록 찾았던 세리아가 눈에 보였다.
세리아는 정소율과 포옹하며 재회를 만끽하다 뒤에 있는 서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소율아, 그런데 어떻게 왔어? 그리고 저분은 누구야?”
서진은 정소율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나섰다.
“흑룡검가의 한서진입니다. 당신 언니의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