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감사합니다. 이번 일은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흑룡부대장의 절절한 목소리에서 진심이 묻어 나왔다.
서진은 미묘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어찌 보면 서진 때문에 저주에 걸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건데.
그건 흑룡부대장도 대략이나마 알고 있을 터.
하지만 실제로는 가문에서 서진을 원망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케린이 노린 대상은 서진뿐만이 아니라 가문 전체였으니까.
그리고 서진에 대한 가문 내 여론이 좋은 것엔 예전의 성격도 한몫했다.
과거에 무력이 약했을 뿐이지 성격은 굉장히 유순했으니.
그땐 무시를 받게 된 이유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그런 과거가 현재 서진의 냉연한 인상을 중화시켜주고 있었다.
거기다 최근에 서진의 행보를 통해 가문의 미래를 점치는 사람들도 늘고 있었다.
서진이 가주가 된다면 지금보다 더 흑룡검가가 날아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그런 감정이 가문에 슬쩍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흑룡대도 마찬가지였고.
이런 바탕에서 서진이 세 명의 흑룡가 헌터를 구하기 위해 세리아를 구출해오니 인정을 안 할 수가 없었던 것.
그렇기에 흑룡부대장은 서진에 대한 마음을 굳혔다.
흑룡대는 특정 후계자를 지지하는 걸 금기시하지만 사람의 속마음까지 억제할 순 없지 않겠는가.
이런 분이 가주가 되면 믿고 따를 수 있을 것 같다.
흑룡부대장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아니 이런 면에선 현 흑룡가주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 정도.
함께 성역의 치유를 받은 흑룡대원의 생각도 비슷했다.
흑룡부대장 허대일은 주변을 살짝 둘러보고 작게 말했다.
“서진 님, 잠깐 옆 방에 같이 가주실 수 있습니까?”
긴히 부탁하는 듯한 목소리에 서진은 그와 같이 다른 방으로 잠시 이동했다.
허대일은 품에서 작은 천 주머니를 꺼내어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제가 가지고 있던 아이템입니다. 맨입으로 감사를 표할 순 없어서 이걸 드리고 싶습니다.”
허대일이 갖고 있던 물건 중에 가장 등급이 높은 아이템이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이럴 때 선물할 만한 가치 있는 아이템이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을 뿐.
서진이 주머니를 받고 안에 있는 걸 꺼내자 아이템 창이 나타났다.
[낙인의 도장]
-등급 : 희귀
-사용 가능 횟수 : 1회
-효과 : 원하는 대상의 피를 도장에 묻혀 등에 찍으면 대상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게 된다.
-조건 : 사용자의 레벨이 더 높아야 하며, 대상을 굴복시켜야 사용 가능.
※보름의 기간이 끝나면 낙인이 찍힌 대상은 사망한다.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직사각형의 도장이었다.
“이런 건 어디서 얻은 겁니까?”
“전에 부모님이 다른 사람에게 돈 빌려줬다가 돈 대신 받은 아이템입니다. 그러다 제가 물려받게 됐는데 딱히 쓸 일이 없더군요. 하지만 서진 님은 다른 위치에 계시니 쓸 일이 있을 거라 생각되어 가져왔습니다.”
확실히 당장 사용할 일은 없지만 갖고 있기엔 괜찮은 아이템이다.
“그럼 잘 받겠습니다.”
서진이 방에서 나오니 맞은편 복도에서 흑룡대장이 오고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서진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도련님, 저주는 어찌 됐습니까?”
서진은 허대일을 쳐다봤고 그가 대답했다.
“세 명 전부 해주 되었습니다.”
“그렇구나.”
흑룡대장은 큰 짐을 던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항상 철벽 같던 흑룡대장도 부하가 엮이니 꽤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이란 게 느껴진다.
서진이 어릴 때는 보지 못했던 면이라 색다른 감상이 들었다.
부하의 안위를 확인한 흑룡대장은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번 약속은 기억하고 있으니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지.”
그때 서진의 휴대폰으로 김형석 비서의 전화가 걸려왔다.
내용은 가주실로 와달라는 것.
서진은 흑룡대장과 다음을 기약하고 가주실로 향했다.
**
보통 누군가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생명을 구해내는 이야기는 작은 감동을 전해주곤 한다.
헌터계에서도 일어나는 일이지만 사례가 많지는 않다.
그만큼 직접 행하는 게 쉽지 않다는 증거.
그런데 이번에 그런 드문 사례가 흑룡검가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한서진이 흑룡가 헌터를 위해 마약왕의 영역에 쳐들어가 기어코 세리아를 데려온 이야기는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어디든 그 얘기가 화제였고 던전기획실 1팀도 마찬가지였다.
“도련님 되게 멋있어진 것 같아.”
“응, 진짜 거기 가서 구해오실지 몰랐어.”
“대단하지 않아? 다른 가문 후계자 같으면 관심 없거나 기껏해야 부하들 보내고 말 텐데.”
“아니 사실 험지에 직접 들어갔다는 것부터 대단한 거야.”
그에 맞장구를 치던 여직원은 다른 얘기도 꺼냈다.
“그리고 던전 터지기 전에 전부 예상하고 기갑성가랑 철혈백가 끌어들인 것도 대단하지 않아요?”
“인정, 보통 그렇게 부르는 게 쉽지 않으니까.”
“그런데 그런 가문의 도움을 받으면 흑룡검가도 뭘 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사체 분배 말곤 그런 거 일절 없었대. 들리는 말로는 한서진 님 혼자서 전부 감당한다고 하더라.”
그 말을 들은 나머지 직원들은 저마다 감탄을 표했다.
“와 대박, 그런 후계자가 어딨어.”
“몇 달 전에 병원에서 깨어난 직후엔 좀 무서웠는데 이제 보니까 완전 잘못 생각했었나 봐.”
“야, 그것도 걔들이 잘못해서 도련님이 화냈던 거잖아. 생각해보면 한 번도 먼저 꼬투리 잡거나 그런 적은 없었어.”
“하긴 그렇긴 해.”
그들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요즘에는 그때처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없어지니 별일도 없고.”
그때 정보건 팀장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요?”
“아닙니다.”
“아니긴 다 들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정보건의 말투엔 웃음기가 담겨있었다.
서진을 응원하는 그에게 있어 저런 대화가 기분 나쁠 리 없었으니까.
**
서진이 집무실의 문을 열자 늘 그렇듯 가주와 김형석 비서가 있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짧게 할 말이 있어 불렀다. 형석아 그거 내줘라.”
“예.”
김형석 비서는 서류철 하나를 서진에게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서진 도련님이 외국에 가시고 나서 한국에 있는 유니온 지부를 소탕했습니다.”
서류철을 열어보니 유니온 소속 멤버의 인적사항과 처리 결과가 적혀있었다.
“기갑성가, 철혈백가와 연계해서 대대적으로 색출해서 없애버렸으니 당분간은 한국 땅에서 볼 일은 없을 겁니다.”
예상치 못했기에 서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상당히 급진적으로 처리되었군요.”
“이전부터 마관청에서 수사를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정보는 어느 정도 쌓였던 상태였습니다. 그러다가 저번에 도련님이 발견하신 건물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서진은 서류철을 다 보고 덮으며 말했다.
“그럼 이게 전부입니까?”
“흩어진 잔챙이는 있겠지만 핵심 멤버는 전부 죽이거나 섬으로 보내버렸으니 전부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렇군요.”
서진은 흑룡가주를 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할까요.”
“되었다.”
“그렇겠죠.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시 후 서진이 나가고 김형석 비서는 작은 궁금증을 가주에게 꺼냈다.
“가주님. 도련님이 던전 브레이크 당시 어떻게 두 가문을 섭외했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사실 김형석은 그걸 제일 알고 싶었지만 알아낼 수가 없었다.
서진이 공개하지 않으니 두 가문도 말하려 하지 않았고, 그걸 계속 캐묻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기 때문에.
“알아서 하겠지.”
흑룡가주는 서진을 믿는 건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 건지, 짧은 말로 일축하고 주제를 돌렸다.
“그보다 요즘 협회장 그놈 소식 들은 거 없느냐. 귀찮게 회담에 참석시켰으면 얼굴이라도 내밀어야지. 아무런 말이 없군.”
“아, 예.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
집무실을 나온 서진은 대기하고 있었던 설하윤과 같이 걷고 있었다.
“서진 님.”
무언가 할 말이 있는듯한 설하윤의 얼굴을 본 서진은 용건을 짐작했다.
“괜찮습니다.”
“예?”
“흑룡부대장처럼 감사 얘기 꺼내려는 거 아니에요?”
설하윤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딱 그런 표정이었으니까요. 그리고 하윤 씨는 그런 인사 안 해도 됩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하윤 씨도 저처럼 했을 테니까요.”
저번에 백화연이 했던 말과 비슷한 내용을 직접 말하고 있으니 서진은 기분이 묘했다.
설하윤은 어느 정도 납득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렇게 하겠지만 저는 역할이 호위인 만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비슷하다고 생각하니 이 얘기는 이쯤에서 끝내죠.”
“그렇게 말하신다면.”
단호한 서진의 말에 설하윤은 의견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서진은 다른 말을 꺼냈다.
“전 이제 약제원에 가보려고 하는데 하윤 씨는 어디 가실 겁니까.”
“수련장에 갈 계획입니다.”
“그럼 내일 보도록 하죠.”
서진은 설하윤과 헤어지고 정선을 만나러 약제원으로 향했다.
정선은 반갑게 서진을 맞이했다.
“얘기는 들었다. 베놈 스콜피온 내단의 정제가 필요한 거겠지?”
“네. 그냥 삼킬 순 없으니까.”
이계에서도 다른 종족에게 맡겼던 만큼 재료를 모은다고 서진이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일단 보여줘 봐라.”
서진은 들고 온 목함의 뚜껑을 열고 거뭇한 녹빛의 내단을 꺼냈다.
“한눈에 봐도 제대로 된 놈을 잡았다는 게 느껴지는구나. 위험했을 것 같은데.”
“그리 어렵진 않았어요.”
“다른 헌터가 보면 재수 없어할지도 모르니 조심해라.”
정선은 가볍게 농담을 던지며 내단을 계속 살펴보더니 혀를 찼다.
“쯧.”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이건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좋겠다.”
“설마 못한다는 말은 아니죠?”
“정제를 할 수는 있는데 내단이 가진 잠재력이 상당히 높아서 내가 해버리면 효능을 전부 끌어낼 수가 없다.”
정선은 쉽게 예를 들어 설명했다.
“이 내단의 최대치는 7레벨 수준의 독을 버틸 수 있게 하는데 내가 하면 아마 6레벨에 그칠 거다. 그래도 괜찮다면 맡아보마.”
“됐습니다.”
기껏 얻었는데 손해를 볼 순 없는 노릇이다.
정선은 그럴 줄 알았기에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내밀었다.
“이 영감님을 찾아가 봐라. 내 스승님이자 전임 약제원주였다. 너는 기억 못 해도 스승님은 아마 아기일 때 너를 알고 있을 거야.”
“이미 은퇴하신 분인데 괜찮은 겁니까?”
“제자 이름 팔아먹으면 무조건 한 번은 해줄 거야. 걱정 안 해도 된다.”
“그럼 한번 가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수련장에 간다고 말했던 설하윤을 다시 불러야 할 것 같다.
**
“여긴가.”
지리산에서 산길을 벗어나 한참 깊숙이 들어가다 보니 작은 돌계단이 나왔다.
서진은 설하윤과 함께 한 걸음씩 내딛으며 올라갔다.
돌계단을 다 오르자 나무들로 둘러싸인 작은 기와집 한 채가 보였다.
그러나 집 안에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설하윤은 주변 경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마 외출하신 것 같습니다.”
“급한 일도 없으니까 그냥 앉아서 기다리죠.”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삼십여 분이 지났을 때, 계단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