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서진은 케이트에게 일을 시키기 전에 확인차 질문을 던졌다.
“너에게 암살 의뢰를 넣은 자가 누구지.”
“저희는 여러 다리를 건너서 의뢰를 받기 때문에 의뢰자의 신원은 알지 못합니다.”
역시 그렇겠지.
예상한 바이지만 어디에서 의뢰를 넣었는지 짐작하긴 힘들다.
원한을 품고 있을 만한 곳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당장 생각나는 집단만 해도 마도현가, 적호검가, 적륜성까지.
개인까지 포함하면 섬에 보내버린 이들이 많아 세는 게 귀찮을 정도.
분명 덤비는 놈들만 쳐낸 건데 왜 이리 많을까.
서진은 헛웃음을 흘리다가 케이트에게 말했다.
“네가 할 일은 의뢰자를 알아내는 것이다. 네 모든 역량을 활용해서 무조건 찾아서 보고해.”
“알겠습니다.”
막상 이렇게 지시하고 나니 보름이 짧게 느껴진다.
물론 완전한 복중을 생각한다면 기간이라도 짧아야 아이템 밸런스가 맞겠지만.
**
아침이 지나고 서진은 감찰각에 가서 어제 착수했던 사건 조사를 종결시켰다.
감찰각주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범인이 잡힌 겁니까?”
“그래.”
가볍게 던졌는데 서진이 그렇다고 답하자 감찰각주는 더욱 놀랬다.
“범인이 누굽니까?”
서진은 밤에 있었던 암습을 얘기해주자 감찰각주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어. 어쨌든 그런 거니까 조사 안 해도 돼.”
감찰각주가 걱정하는 말을 더 꺼내려는 순간에 감찰각 복도가 어수선해졌다.
창문을 통해 내다보니 가문의 헌터 몇 명이 끌려가는 중이었다.
“쟤들은 뭐야?”
“아, 마약에 손댄 헌터들입니다.”
“마약?”
“최근에 스텟을 올려주는 마약이 퍼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빨리 성장하고 싶은 헌터들이 유혹에 흔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 부작용 있지 않나?”
“듣기론 기존의 마약보다 부작용이 약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단기간은 괜찮을지 몰라도 길게 보면 어떤 현상이 나올지 아직 미지수입니다.”
끌려가는 헌터의 복색을 보니 자호대와 백랑대 소속이었다.
“흑룡대는 없군.”
“예, 아무래도 특출 난 재능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흑룡대니까요. 그래도 흑룡가는 고작 몇 명이 전부지만 다른 가문은 더 심한 곳도 있다고 합니다.”
“그럼 쟤들은 어찌 되는 거지?”
“가문에서 퇴출되는 선에서 마무리될 겁니다.”
“이번엔 가주께서 화가 많이 나겠군.”
개인의 힘이 아닌 그릇된 수단을 통해서 강해지는 걸 극히 혐오할 테니까.
“안 그래도 조만간 가주님이 직접 말을 꺼낼 거란 예상이 파다합니다.”
“그렇겠지. 그럼 수고해.”
서진은 집으로 돌아가서 목함을 들고 샤워실로 향했다.
독의 내성을 만드는 내단은 흡수 과정에서 몸에서 이물질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저번에 대환단을 먹을 때에 비해선 마음이 가벼웠다.
이미 먹어봤던 경험이 있으니.
서진은 매트 위에 앉아 목함에 있는 내단을 천천히 꺼냈다.
내단을 입으로 가져가기 전에 멈칫하다 눈을 감고 넣었다.
‘윽.’
멈칫한 이유는 이 맛 때문이다.
입 안에서 퍼지는 악취가 후각을 자극해온다.
‘지구에서 먹어도 여전히 맛이 없군.’
이계랑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했던 기대가 무참히 무너졌다.
서진은 인상을 찌푸리고 턱을 움직여 씹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몇 번 씹으면 금세 잘게 부서져 식도로 내려간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이다.
새로운 기운을 맞닥뜨린 몸이 화끈 달아오른다.
독의 내성을 만들어주는 내단이지만 초기 반응은 독을 접한 듯이 신체 저항이 일어난다.
서진은 능숙하게 마나를 순환시키며 기운을 이끌었다.
자칫하면 몸 전체로 퍼져 중독 현상을 일으키는 내단의 기는 서진의 의도대로 단전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성을 만드는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노폐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치익.
노폐물에 섞인 독기 때문에 매트가 살짝 녹았지만 서진의 신체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내성이 생기고 있다는 증거였다.
마나 순환을 일곱 번째 이루어내자 드디어 기운이 차분해지며 자리를 잡아간다.
몸에서 나오는 노폐물도 서서히 멎는다.
“후우.”
심호흡을 마지막으로 마침내 내단이 완전히 흡수되었다.
[특성 ‘독 내성’이 추가되었습니다]
[7레벨 이하의 독에 대해 완벽한 내성을 가집니다]
서진은 확인하기 위해 상태창을 열었다.
❴한서진❵
【레벨】6
【특성】투신전, 독 내성(Lv.7)
【스텟】근력585 체력578 민첩580
마력603 지력586
【스킬】흑룡검술(6성) 투신공(6성) 점멸(6성) 용체화(해츨링)
【상태】마광병 32.8% 진행
‘됐어.’
그러고 보니 어느새 스텟도 7레벨에 가까이 다가간 상태였다.
세계의 어떤 헌터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성장 속도라 할 수 있다.
다만 7레벨부턴 두 개의 스텟이 700을 넘어야 하기에 조금 더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6레벨에서 7레벨로 올라가는 헌터가 급격히 줄어드는 이유도 그 때문.
하나의 스텟은 평생 몰두하면 올릴 수 있을지 몰라도 두 개부턴 재능의 영역이니.
오죽하면 재능의 벽이라 불릴 정도.
명문가나 대형 길드의 자제들이 아무리 지원을 받아도 올라가기 힘든 경지였다.
검과 마법 둘 다 재능이 있는 한치성이 괜히 6레벨에서 막혀 못 올라가는 게 아니었다.
이러니 조만간 7레벨에 오른다면 상당한 이슈가 될 것이다.
‘음?’
잠시 후,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서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백화연?’
또 무슨 일로 전화한 것일까.
서진은 전화를 받으며 입을 열었다.
“어. 무슨 일인데.”
-너 저번에 나한테 빚진 거 기억하지?
“말하는 거 보니 부탁할 게 있나 본데 생각보다 빨리 청산해버리네.”
-안 그러면 네가 잊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사람을 뭘로 보고. 어쨌든 용건은?”
-전화로 할 수는 없어. 나랑 어디 좀 가줬으면 해.
“뭐? 어디를.”
-비밀이야. 만나면 말해줄게.
**
다음날, 서진은 백화연의 노란 스포츠카를 타고 있었다.
백화연은 서진을 흘겨보며 어이없는 듯이 말했다.
“흑룡가의 후계자가 아직 면허증이 없는 게 말이 돼?”
“다른 사람이 다 해주니까 그닥 필요성을 못 느끼겠던데. 그리고 그럴 여유도 없었고.”
“그러니까 한 번쯤 쉬지 그래? 일 그만 만들고.”
“부탁할 일 있다고 날 데려온 네가 할 말이야? 그리고 이제 비밀이 뭔지 말할 때 되지 않았냐.”
백화연은 서진을 힐긋 보며 말했다.
“최근 마약이 헌터계에 퍼지고 있는 거 알지? 문제는 그게 가문이나 길드의 헌터들도 쉽게 손이 닿을 정도가 됐다는 거야.”
“그렇긴 하더라. 철혈백가도 마찬가진가 보군.”
“응. 그래서 가문의 힘을 썩게 만들게 하는 뿌리가 어딘지 찾아내려고.”
확실히 원인을 제거하지 않고 드러난 증상에만 집중하면 상황은 호전되지 않는다.
“그럼 지금 그런 놈들 잡으러 가자는 거야?”
“반은 맞아. 한국에 마약을 퍼트리는 놈 중에 간부급에 해당하는 녀석이 나타난다는 정보를 입수했거든.”
“어디서?”
“거기 글로브 박스 열어볼래?”
서진은 안에서 고풍스러운 각인이 새겨진 편지 봉투를 꺼냈다.
“그 안에 블랙 마켓의 초대권이 들어있어.”
서진도 존재는 알고 있었다.
일 년마다 열리는 헌터들만을 위한 비밀 경매장.
과거에 부모님에게 한번 들어본 적이 있었으니까.
서진도 흑룡검가의 직계 혈손이기에 원한다면 초대장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그동안 관심이 없었던 데다 백화연이 다음날 바로 데려가는 바람에 동행인으로 참석하게 돼버렸지만.
“그래서 이렇게 입고 오라고 말했던 거였네.”
“맞아. 블랙 마켓에서 무기는 소지할 수 있지만 최소한의 드레스코드는 있으니까.”
서진은 평소와 달리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익숙지 않은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푼 상태이긴 했지만.
“그런데 다른 정보는 없어? 설마 놈이 경매장에 나타난다는 정보가 전부는 아닐 거 아냐. 인상착의라던가.”
“아쉽게도 그건 없지만, 어떤 목판을 노리고 경매장에 참가한 사람들 중의 한 명이야.”
“그거 범위가 넓지 않아? 한 물품당 경매에 참가하는 인원이 최소 열 명은 넘어갈 텐데.”
합당한 서진의 의문이었지만 백화연은 자신 있게 말했다.
“아니, 이번 경매에 목판은 하나뿐이야. 그리고 제일 중요한 정보가 하나 더 있어.”
“뭔데.”
“중년의 흑마법사라는 거. 그놈이 목판을 왜 노리는진 몰라도 그렇게 인기가 있는 물건이 아니라서 특정하긴 어렵지 않을 거야.”
“그런데 경매장에선 무력행사는 금지이지 않나. 보자마자 잡는 건 불가능할 텐데.”
“그러니까 뒤를 쫓다가 잡아야지.”
그 말에 서진은 한 번 더 의문을 제기했다.
“그럼 나 말고 추적이 전문인 헌터를 데려왔어야 하는 거 아냐?”
“전에 그렇게 진행했다가 정보가 노출된 적이 있어서.”
“그래서 이렇게 끌어들여서 이제 얘기를 꺼낸 거구나.”
“응 갑작스러웠을 텐데 미안.”
“아냐, 그런 거면 최대한 숨기는 게 맞지.”
서진은 백화연이 왜 자신과 같이 가려고 한 건지 이해했다.
얘기하는 사이에 차는 어느새 주차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제 도착했어. 우리가 갈 곳은 저기 있는 저택.”
저택 아래의 주차장에는 온갖 비싼 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입장하기 전부터 주변엔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낯선 고레벨 헌터가 득실거리니 공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
백화연은 저택의 정문에서 초대권을 보여주고 서진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3층으로 가야 해.”
그녀는 처음 온 서진을 위해 곁에 붙으며 작게 설명했다.
“3층?”
“이 건물은 블랙 마켓으로 가기 위한 경유지야. 3층에 이동 포탈이 설치되어 있어.”
포탈을 통해 진짜 경매가 열리는 장소로 가는 방식이었다.
“그런 것치곤 이 저택에도 상당히 신경을 썼는데.”
저택 내부는 스쳐 지나가는 곳인데도 각종 미술작품을 전시해 놓음으로써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참가자 전부 가면을 쓰고 있어 기묘하게 느껴지는 광경이 재밌는 점이었다.
물론 서진도 그들과 마찬가지였기에 작게 웃음이 나왔다.
매년 열리는 행사답게 긴장감은 옅었고 대화 소리가 제법 들려왔다.
주변을 적당히 감상하며 3층에 올라가자 또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져 있었다.
벽에 어떤 장식도 없이 은은한 조명만이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을 밝혀주고 있었다.
이제부턴 오로지 포탈로 향하는 것에만 집중시키려는 의도가 느껴진다.
서진은 백화연과 나란히 3층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안내원의 깍듯한 인사를 받으며 포탈을 통해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밤하늘처럼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다.
그리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불빛이 비치고 있는 거리에서 많은 이들이 걷고 있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에는 아까와는 다른 저택이 보인다.
“저기가 경매가 열리는 건물이야. 우리도 어서 가자.”
“그래.”
저택을 향해 서진이 발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 미약한 마기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