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뭐, 난 주제를 알고 일찌감치 숙이는 놈은 썩 싫어하진 않아.”
환영신가의 헌터는 서진의 어깨를 거칠게 두드렸다.
그러다 다시 인상을 쓰며 목소리를 깔았다.
“그래서 여기에 왜 온 거야. 주제 파악한 건 좋은데 계속 대답도 못 할 정도면 답답하거든. 내가 인내심이 그리 크진 않아서 말이야.”
“아, 일거리가 없나 해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저를 받아주는 곳이 마땅히 없어서요. 하하.”
서진은 어수룩한 척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서진의 마나량을 가늠했다.
“하긴 꼴을 보니 고작해야 2레벨인 것 같은데 맞지?”
“예, 맞습니다. 얼마 전에 올라갔지만요.”
남자는 천변이란 가면을 쓴 서진의 연기에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
“요즘엔 던전도 상향 평준화가 되어서 그 수준으론 어디 가서 먹고살기 힘들지. 특히나 너 같은 약골은 더더욱 그렇고.”
서진이 바꾼 몸은 근육이 거의 없는 육체였기에 눈앞의 남자는 더욱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다.
‘신경 써서 몸을 설정한 보람이 있네.’
서진은 흡족함을 느끼며 그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렇더라고요. 안 그래도 워낙 힘들어서 헌터를 그만둬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그러자 환영신가의 헌터는 주위를 슬쩍 둘러보는 척하더니 은근하게 말했다.
“그럼 환영신가에서 일해볼 생각 있어?”
“저 같은 하급 헌터가 환영신가 같은 대가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서진은 짐짓 놀라는 척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정식 헌터부터 시작하는 건 아니지. 수습으로 들어가야겠지만 환영신가의 위명을 생각하면 사실 너는 수습도 힘들다는 거 알고 있지?”
“예. 물론이죠. 그래서 믿기지가 않습니다.”
그 말에 남자는 서진의 어깨를 한 번 더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너 같은 헌터 하나 꽂을 힘은 있거든.”
서진은 내심 웃음을 참았다.
상대는 기껏해야 4레벨.
부대장급도 안 되는 헌터가 신입을 멋대로 받을 수 있다니.
환영신가가 오랜 봉문 끝에 헌터가 급해진 건가.
그건 아니겠지.
아무리 환영신가가 급해도 2레벨의 재능도 없는 헌터를 수습으로 받을 리가 없으니.
그런데도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쓰고 버리기 위해서가 아닐까.
놈의 눈빛을 보면 무언가 속여먹으려는 속셈이 담겨있다.
‘잘됐어.’
이놈을 따라가면 별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찾으려던 곳으로 데려다줄 것 같다.
서진은 허리를 힘껏 숙이며 연기했다.
“그럼 저야 감사하죠. 앞으로 은인으로 모시겠습니다.”
“으하하! 그래 경우를 아는 것 같은 놈이라 마음에 드는군.”
남자는 거들먹거리며 서진을 어딘가로 이끌었다.
“그럼 이제 일할 곳으로 데려다주마. 그리고 너 이름이 뭐냐.”
“성기황입니다.”
“그래, 넌 앞으로 날 관리팀장님이라 부르면 된다.”
“예, 알겠습니다.”
**
1시간가량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어느 산골짜기였다.
차 안에서 바깥을 못 보게 해놓았기에 여기가 어딘지 감을 못 잡게 하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물론 서진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지만.
이곳은 본가가 있는 춘천 근처도 아니고, 훈련장이 있는 철원도 아니고, 홍천도 아니었다.
민간에 공개되지 않은 제4의 장소.
전방에 공장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고 결계가 넓게 둘러싸고 있었다.
‘감옥이나 마찬가지군.’
3레벨 이하의 헌터는 자력으로 나가지 못하는 결계였다.
관리팀장은 차 문을 거칠게 닫으며 소리쳤다.
“도착했다, 그리고 검 이리 내.”
“예?”
“당장 필요 없으니까 그런 거야. 수습 기간이 끝나면 줄 테니까. 싫으면 환영신가 헌터 포기하든지.”
서진은 헛웃음을 삼켰다.
정작 포기한다고 말하면 태도가 돌변할 분위기다.
어차피 모습을 바꾸면서 검도 제일 보급형으로 가져왔기에 상관없었다.
“검도 꼭 너 같은 걸 들고 다니는군.”
양아치 아니랄까 봐 싸구려 검인 걸 확인하자 실망하는 눈치다.
그리고 그는 무거운 족쇄를 서진의 팔다리에 채우며 말했다.
“이것도 훈련의 일종이니까 받아들여. 이제 따라와.”
공장에 들어가자 좌우로 같은 크기의 작업실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관리팀장은 그중에 8번이라 적힌 방에 서진을 밀어 넣었다.
“자, 네가 일할 곳이다.”
여기서 너무 순진하게 받아들이면 도리어 의심할지도 모른다.
서진은 일부러 살짝 의아한 안색을 보였다.
“여긴 어디입니까?”
“그건 하다 보면 알게 돼.”
“하지만...”
“그래서, 힘들게 데려다줬는데 안 하겠다는 거냐? 환영신가 헌터되기가 그리 쉬운 줄 알아?”
이쯤 하면 됐겠지.
서진은 의문을 접는척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입꼬리가 올라갈 뻔한 위기를 겨우 넘겼다.
‘연기가 쉬운 게 아니네.’
서진은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설비가 가득한 방에 들어갔다.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거대한 솥에 있는 재료가 잘 섞이도록 삽으로 계속 젓는 것뿐.
이러면 굳이 일반인이나 기계가 해도 될 것 같지만 헌터를 시키는 이유가 있었다.
삽을 통해 마나를 주입해서 저어야 하기 때문.
“저, 언제까지 하면 되는 건가요?”
“마나가 바닥날 때까지 계속 저어. 네 마나량으론 한 6시간만 하면 되겠네.”
2레벨 헌터의 평균 작업 시간은 6시간인 건가.
뭔가 선심 쓰듯 말했지만 저런 놈들이 작업자를 편하게 굴릴 리가 없다.
관리팀장이 작업실을 나간 뒤 서진은 재료에 시선을 고정한 채 기감만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리 크지 않은 작업실에 CCTV가 두 개. 문은 밖에서 잠글 수 있는 구조. 지금 솥에 있는 마약의 재료는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는 형태.’
사실 제일 신경 쓰이는 것은 마약의 재료.
가까이서 맡으니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피 냄새.’
동물이나 몬스터가 아닌 사람의 피 냄새였다.
그리고 이 냄새가 은근하게 사람의 진기를 빼앗는 느낌이 든다.
며칠은 괜찮을지 몰라도 이걸 몇 개월간 반복한다면 3레벨 이하의 헌터는 사망에 이를 것이다.
그때, 벽 너머에서 털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작업실에 있던 헌터 한 명이 쓰러진 듯했다.
서진이 기감을 넓혀 해당 작업실에서 있던 헌터를 살펴보니 이미 숨이 멎은 상태였다.
잠시 후 CCTV로 지켜보고 있던 관리자가 도착했다.
관리자는 허리를 숙이며 생사를 확인하더니 아래 직원에게 명령했다.
“야. 죽었다. 이거 치워.”
“이번엔 오래 버티나 했는데 역시 6개월을 못 넘기네요. 위에선 언제까지 해야 한다고 합니까?”
“앞으로 두 달만 하란다. 그 뒤론 본가에 가게 해준다니까 조금만 버텨.”
“예, 그래도 한 명당 생산량이 많아서 다행입니다. 안 그러면 진작에 헌터 실종 어쩌고 하면서 뉴스에 나지 않았겠습니까?”
“얌마 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고 시체나 치워.”
“예엡.”
대화는 거기서 끝나고 그들은 작업실을 나갔다.
사망자를 본 이상 서진은 선택해야 했다.
여기서 연기를 멈추고 다 뒤집어엎을지, 아니면 조금 더 지켜보면서 다른 증거들도 모을지.
그때 다른 작업실에서 나오던 헌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규선이 형!”
죽었던 헌터와 친했던 그는 관리자를 향해 소리쳤다.
“아니, 도대체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하는 겁니까!”
“조금만 더 하면 돼. 들어가.”
“들어가긴 시발, 저번에도 한 명 죽었잖아! 난 이제 못하겠어. 환영신가고 나발이고 안 한다고.”
“그건 곤란하군. 넌 정해진 작업 날짜를 다 채워야 한다.”
“개소리하지 마!”
관리자는 고함치며 달려드는 작업자의 복부를 걷어찼다.
퍼억!
애초에 족쇄를 찬 데다 2레벨 이상의 격차가 나는 상대를 이길 리가 없었다.
그러나 반쯤 정신을 놓아버린 헌터는 눈에 뵈는 것 없이 다시 달려들었다.
“야 이 개새끼야!”
죽음을 각오한 외침이었지만 관리자는 지극히 냉정했다.
작업자의 명치를 후려쳐 벽에 처박으며 부하에게 지시했다.
“야, 저놈도 죽여서 같이 소각로에 넣어. 조금 있으면 본가에서 시찰 오는데 눈에 띄면 곤란하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서진은 일단 얼굴은 놔두고 몸만 원래대로 되돌려 족쇄를 끊어냈다.
직원의 검이 쓰러진 헌터를 찌르려는 순간, 작업실에서 나온 서진이 끼어들었다.
손에 투기를 씌워 그의 검을 잡아서 부러트렸다.
이렇게 된 이상 증거 수집은 끝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고 넘쳤다.
봉문이 끝나지 않은 가문에서 사람의 피가 섞인 마약을 제조하며 그 과정에서 벌이는 감금과 살인까지.
이번엔 봉문이 아니라 멸문하게 될 것이다.
“너 이 새끼 뭐야!”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한 직원은 서진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훤히 보이는 검로.
서진은 옆으로 피하면서 그의 손목을 강하게 타격했다.
“아악!”
서진은 바닥에 떨어지는 검을 잡아채서 그의 목을 그었다.
그러자 그의 상관인 관리팀장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게 도대체. 네가 어떻게...?”
그는 아까 어수룩했던 서진과 현재의 분위기가 아예 달라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설마, 날 속인 거냐.”
“정답.”
“개자식이...! 크학.”
서진은 뒤늦게 분노하는 관리팀장을 검으로 베어서 숨을 끊었다.
고개를 돌리자 아까 얻어맞았던 작업자는 구석에 피신한 채 떨고 있었다.
서진은 그를 지목하며 불렀다.
“거기.”
“예?”
“단순 노동자 말고 환영신가의 다른 관리자는 어딨습니까.”
고작 두 명이 공장과 헌터들을 관리할 리는 없을 테니.
“아. 작업팀장과 3명의 직원이 더 있는데 제가 대충 어디에 있는지 압니다.”
“안내해주시겠습니까.”
“아 예, 물론이죠.”
서진은 공장 곳곳에 있는 작업팀장과 직원을 처리하고 안내했던 그에게 말했다.
“작업하는 인원들 여기에 전부 불러 모으세요.”
“알, 알겠습니다!”
잠시 후, 8명의 작업자가 서진의 앞에 모였다.
증인이 되어줄 이들이 죽어선 안 되기에 적당한 곳에 숨어있으라 말했다.
서진이 투신의 기세를 내보이자 기력이 쇠약해진 이들은 군말 없이 지시를 따랐다.
‘그러고 보니 곧 본가에서 누군가 온다고 했던가.’
과연 공장 쪽으로 다가오는 다섯 명의 기척이 느껴진다.
그리고 확장된 서진의 기감에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소가주님, 이곳까지 안 오셔도...”
“내가 책임지고 있는 사업인데 한번은 확인해 봐야지. 지금 몇 명 굴리고 있어?”
“약간의 변동은 있지만 최소 8명은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왜 아무도 안 나와?”
소가주가 공장의 문 앞까지 왔으면 책임자가 마중을 나와야 하는데 너무나 고요했다.
현재 공장의 내부 사정을 모르는 가신들은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확인하러 먼저 가보겠습니다.”
서진은 피식 웃으며 그들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공장의 문을 활짝 열었다.
쿠구궁!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누군지 모르는 자가 서 있으니 가신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어서 가서 작업팀장 데려와!”
서진은 그를 향해 천천히 검을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곧게 쏘아져 나간 검기에 가신의 몸은 정확히 반으로 갈라지며 피를 쏟아냈다.
그 광경에 순간 넋을 놓았던 나머지 가신들은 금세 무기를 뽑아 들어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환영신가의 소가주, 신범수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뭐 하는 놈이냐.”
“신범수, 참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군.”
“날 아나?”
신범수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기에 낯빛에 경계심이 생겨났다.
“잘 알지. 그리고.”
서진은 얼굴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이러면 너도 알아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