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하아, 쿨럭!”
피를 한번 토해낸 신범수는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너 방금 그 기술 뭐야...”
“새로 생긴 스킬.”
“전투 중에, 얻었다고? 미친. 애초에 눈치챘어야 하는데.”
신범수는 죽음을 앞두고서야 후회가 되었다.
서진의 전투 실력은 자신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에 서진이 호위 헌터를 순식간에 처리할 때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계속 아래라고 생각했던 서진을 상대로 도망치는 건 신범수에게 상상도 못 할 일이었으니까.
결국 본능적인 육감을 외면한 대가는 너무나 컸다.
어차피 죽음 앞에선 뭐든 무의미한 것인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거라 했던가.
정말 그 말대로다.
가문의 자금 문제만 풀고 나면 다시 날아오를 일만 남았었는데.
한국 제일 가문으로 만들려고 했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신범수는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힘겹게 올리고 앞을 바라봤다.
죽기 전에 마지막 보게 되는 얼굴이 한서진이라니.
‘괴물 같은 새끼.’
사고당하기 직전까지 정말 약했던 주제에 언제 저렇게 강해졌던 말인가.
신범수는 문득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자조했다.
어렸을 땐 약혼 상대 때문에 질투했었고 지금은 그의 성장 속도를 질투하고 있었다.
신범수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 짜냈다.
“흐, 그래도 너도 곧 어차피 죽게 될.”
서진은 대꾸 없이 심장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신범수의 몸은 힘없이 땅바닥에 허물어졌다.
그 시체를 잠시 내려다본 서진은 공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작업자, 아니 감금되었던 헌터들이 무사한지 확인해야 했기에.
그러나 공장의 철문을 열려는 순간, 땅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누군가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서진은 땅에 손을 대며 기감을 확장했다.
‘인원은 대략 서른.’
그리고 서진도 무시 못 할 강한 존재가 한 명 포함되어있었다.
어떤 집단인지는 조금 전 신범수의 말로 짐작할 수 있다.
‘아마 환영신가의 헌터들이겠지.’
저들을 부르는 방법은 휴대폰이나 아이템 등 수단은 많으니 얼마든지 짧은 틈만 나면 가능할 터.
처음에 호위 헌터를 죽였을 때 보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전투 막바지에 했을 수도 있다.
서진도 중간에 대기하고 있을 흑룡대에게 신호를 보낸 건 마찬가지니까.
지금 중요한 건 누가 언제 저들을 불렀냐가 아니라 어떻게 대처할지가 문제다.
‘상황은 썩 좋지 않아.’
신범수와 싸우느라 마나도 거의 다 소진됐으며 체력도 바닥난 상태.
서른 명의 환영신가 헌터들 상대로 버틸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공장 안에 있는 저레벨 헌터를 버릴 순 없는 노릇.
저들을 데리고 도망치기엔 이미 늦었다.
‘별수 없군.’
서진은 공장 앞에서 놈들을 기다렸다.
잠시 후, 여전히 불타고 있는 숲을 헤치고 환영신가의 헌터들이 도착했다.
무복을 보니 환영신가에서 제일 강한 환혼대(幻魂隊)였다.
그들 사이에 있던 중년의 남성이 앞으로 걸어 나와 서진에게 말했다.
“흑룡검가의 장손이 여긴 왜 있는 겁니까.”
환혼대의 대장이자 이제 10년 전부터 8레벨에 머물고 있는 최상급 헌터인 남정태.
헌터계에선 나름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보아하니 자세한 사정은 못 듣고 온 모양이다.
하긴 전투 중에 그런 걸 세세하게 알려줄 수는 없었을 테니.
서진은 능청스레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당신네 가문에서 수상한 냄새가 나서 찾아왔지.”
“허허, 일단 그전에 소가주님은 어디 계시는...”
주변을 둘러보던 환혼대장의 안색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신범수의 시체에 그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소가주님!”
환혼대장과 부하들이 신범수에게 달려갔지만 느껴지는 건 싸늘한 기운뿐이었다.
“너희들은 소가주님 시신을 수습해서 가문으로 돌아가라.”
환혼대장은 부하 열 명을 선별해서 시신을 챙기게 했다.
그리고 검을 뽑고 서진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당신이 소가주님을 죽인 것 맞습니까?”
“그래.”
말이 끝나자마자 남정태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서진의 바로 앞에 나타나 검을 휘둘렀다.
쐐액!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의 상당한 쾌검.
서진은 한 발짝 빠르게 물러나 가까스로 피했지만 검격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마력이 18 상승합니다]
[정신이 17 상승합니다]
스텟 상승은 좋긴 한데 이러다 까닥하면 죽을 판이다.
심지어 나머지 환혼대 헌터들은 전투에 참여도 하지 않은 상황.
설하윤이나 정소율 같은 마법사를 데려왔으면 한결 나았을 텐데.
“지금 딴생각할 여유가 있나 보군요.”
찰나의 잡념이었건만 검을 맞대고 있는 남정태는 바로 눈치챘다.
그는 이전보다 더 빠르게 검을 내리쳤다.
현재 서진의 신체 스텟으론 반응하기 힘든 쾌검이었다.
콰아앙!
제대로 피하지 못한 서진은 그대로 날아가 철문에 처박혔다.
그나마 반룡포로 막지 못했으면 치명상이었다.
환혼대장은 땅이 팰 정도로 발에 힘을 주며 천천히 다가왔다.
소가주를 지키지 못한 환혼대장의 분노가 여실히 느껴질 정도.
“걱정하지 마십쇼. 당신은 가주님 앞에 가야 합니다. 그러니 쉽게 죽이진 않을 겁니다. 다행히 입고 있는 옷이 튼튼해 보이니 검에 힘을 빼진 않아도 되겠군요.”
팟.
잔상을 남기며 사라진 남정태는 서진의 위에서 검을 휘둘러왔다.
카앙!
서진이 막은 순간, 바로 우측에서 환혼대장의 찌르기가 들어왔다.
그야말로 반응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 극쾌검.
서진은 점멸로 회피했고, 환혼대장은 금세 따라붙어 검강을 날렸다.
예상을 초월한 반응속도에 서진은 급히 반룡포를 펼쳤다.
부욱.
옷은 무참히 찢어졌지만 덕분에 서진은 팔이 절단되는 참사를 면할 수 있었다.
환혼대장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꽤나 끈질기시군요.”
애초에 체력이 바닥난 6레벨 헌터가 8레벨 검사의 쾌검을 계속 막는 것 자체가 사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고레벨로 갈수록 스텟 격차가 크게 난다는 걸 생각한다면 더욱더 그렇다.
서진의 본능에 각인된 전투 센스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제압당했을 터.
환혼대장은 잠시 거리를 벌리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먼저 공장에 들어가.”
“예!”
부하들을 보낸 환혼대장은 다시 서진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럼 다시 갑니다.”
서진은 환혼대 헌터들이 공장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당장 공격해오는 환혼대장만으로 벅찼기에.
하지만 이제 그마저도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떨리는 손 때문에 쥐고 있는 검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니까.
“어찌 잘 막긴 했습니다만 그것도 이제 끝이군요.”
환혼대장도 서진의 상태를 눈치채고 극한의 쾌검으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와 동반된 엄청난 풍압.
첫 번째 검격이 팔뚝에 스쳐가고 두 번째는 허벅지에 혈선이 생겨났다.
열 번째 검은 허리를 깊게 베고 지나갔다.
조금만 더 휘몰아치면 서진이 쓰러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렇게 확신을 가지는 순간 환혼대장은 다른 방향에서 살기를 느꼈다.
‘우측!’
그는 갑작스레 날아든 무형의 검기를 피했고 자연스레 서진과 거리가 벌어졌다.
“방금 공격.”
남정태는 공격이 날아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서진을 보호하기 위한 검기처럼 느껴졌기에.
“서진 님!”
그 생각은 정답이었다.
서진이 대기시켰던 흑룡대와 같이 있던 설하윤이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아무래도 환영신가의 영역이니 환혼대보다 빨리 오진 못했지만 아주 늦진 않았다.
서진은 다가오는 흑룡대장에게 입을 열었다.
“너무 늦었잖아.”
“죄송합니다. 도련님.”
“일단 공장 안에 있는 환혼대 놈들 제압해.”
“알겠습니다.”
흑룡대장은 1팀과, 2팀 전체를 부대장에 붙여서 보내고 난 뒤, 환혼대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쯧.”
다 된 밥을 망친 기분이 든 남정태는 얼굴을 찌푸리며 침을 뱉었다.
“이제부턴 내가 당신을 상대하지.”
천천히 발검하며 남정태 앞에 마주 선 흑룡대장.
그러나 서로 같은 8레벨이기에 쉽게 전투가 시작되진 않았다.
상황을 살펴본 서진은 환혼대를 물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환혼대장,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보단 가문으로 돌아가는 편이 나을 거야.”
“절 쉽게 보내시려는 수작이라면 사양하겠습니다.”
“이미 공장에 있는 증거는 타 가문과 대한가문회에 보내졌어. 여기서 당신이 뭘 얻을 수 있을까? 힘 빼지 말고 당장 가문에 돌아가는 게 낫다고 보는데.”
“큭.”
서진의 말은 남정태에게 정곡으로 꽂혔다.
거기다 흑룡대장이 있는 이상 공장의 증거 인멸이나 소가주의 복수도 쉽지 않다.
남정태는 어쩔 수 없이 환혼대를 끌고 물러났다.
흑룡대장은 산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을 보며 서진에게 물었다.
“저렇게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문제없어. 어차피 증거는 확보했고, 굳이 저놈들과 싸우면서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고 쟤네들도 결국은 나중에 법에 따라 처분될 거야.”
여기는 적진 한가운데다.
비등해 보이는 상황이 불리하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
만약 이때 환영가주가 개입한다면 완전히 밀리게 될 터.
그전에 증거를 수습해서 빠져나가는 것이 제일이다.
아마 환영대장도 가문에 도착하고 나면 성급히 물러난 걸 후회할지도 모른다.
**
며칠 후 환영신가가 대규모의 마약을 만들어 유통했다는 사실이 전국에 퍼졌다.
심지어 제조과정에 사람의 피가 들어갔다는 내용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초기에 부작용이 없어 보이던 약이었지만 조사를 통해 잠복 기간이 지나면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도 밝혀졌다.
결국 부작용이 없다는 이유로 값비쌌던 가격도 허상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제일 놀란 이유는 이 짓을 저지른 곳이 환영신가라는 것.
대한민국 3대 가문 중의 하나였기에 충격은 배가 되었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헌터 커뮤니티를 봐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10년 전에 소가주의 동생이 미쳐서 일반인 학살해서 봉문 당했었는데, 사실 그때 마약 때문이었던 건가?
-그건 스킬 부작용으로 판명 났었잖아. 헛소리 금지.
-근데 이번 소가주는 시체에서 마약 반응 나왔다더라.
-미친 가문이구만 이번엔 멸문 확실하지? 설마 또 봉문으로 뭉개진 않겠지.
-대한가문회하고 헌터협회, 마관청 싹 다 나섰으니 빼박이지. 대부분 잡혀 들어가고 일부는 처형된다던데.
-그런 놈들 때문에 헌터 인식이 더 안 좋아지잖아.
환영신가를 성토하는 여론이 한바탕 휩쓸고 난 후에는 어떻게 밝혀졌는가에 관한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흑룡검가의 한서진이 알아냈다던데.
-단신으로 들어가 잠입하고 거기 갇힌 사람들 구하고 그랬다고 함.
-그뿐만이 아님. 그날 소가주를 비롯해서 다섯 명인가 시찰하러 왔는데 다 썰어버렸다잖아.
-미친 개쩌네.
-근데 그거 다 사실 맞냐? 흑룡가 홍보실에서 작업하는 거 아님?
-여기 구출한 헌터 인증글 링크 있으니까 보고 와라. 최소한 검색 좀 하고 살자.
공장에서 살아남은 헌터들이 감사의 인증을 이어가면서 서진에 대한 인지도는 더욱 올라가고 있었다.
-전에 들어보니 흑룡대원 구한다고 위험한 곳에 갔다 왔다던데 이 정도면 인성은 증명된 듯.
-아, 지금도 흑룡검가 들어가기 빡센데. 더 경쟁 치열해지겠네.
-야 그래도 지금이 저점이다. 만약 한서진 가주되면 더 박터질걸.
이런 여론은 흑룡검가의 사람들도 접했으며 대부분이 공감했다.
하지만 개중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도 한 명 존재했다.
“후우.”
한숨을 내쉬는 이의 집무실을 누군가 노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