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들어와.”
한정후의 집무실.
비서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당주님.”
현재 집법당주 자리에서 물러났음에도 한정후의 수하들은 여전히 당주라 부르고 있었다.
한정후는 책을 덮으며 머리를 들었다.
“치성이는 지금 어디에 있다고 했지?”
부자지간임에도 한정후는 아들에 대한 소식을 비서에게 일임한 상태였다.
필요할 때만 비서에게 전해 듣고 판단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에.
“이집트 카이로에 있습니다. 얼마 전에 샌드 자이언트 던전을 공략했습니다.”
“아직 6레벨인가?”
“예.”
한정후는 작은 한숨을 들이키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들어오라고 해.”
“바로 말입니까?”
드디어 불러들이는 건가 싶은 기대감에 비서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공략 준비 중인 던전 있으면 그거까지만 처리하고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비서는 미간이 패인 한정후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후계 경쟁에 참여시킬 생각이신 겁니까?”
“그래, 원래는 7레벨 되고 나서 불러들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욕심이었나 보군.”
“한치성 도련님은 현재 성취만으로도 천재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일견 상관을 위하는 비서의 말로 보일 수 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검과 마법, 두 가지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서 6레벨에 도달하는 헌터는 정말 희소하니까.
거기다 아직 24살이란 걸 고려한다면 천재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른 가문이었다면 진작에 소가주 자리를 꿰찼을 터.
그렇지만 한정후는 아들의 칭찬에도 별다른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런가.”
“예, 그러니 분명 몇 년 내에 7레벨로 올라갈 겁니다.”
“몇 년 내라...”
한정후는 고개를 살짝 흔들며 말했다.
“그거론 부족해. 물론 객관적으로 또래와 비교했을 때 압도적이라 할 수 있지만 그놈이 경쟁해야 할 상대는 다른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야. 한서진이지.”
후계자 경쟁은 절대 평가가 아닌 상대평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보다 강한 자가 존재하면 결국은 패배자가 되어버린다.
“이대로 시간만 끌다간 한서진의 영향력만 더 높아지게 돼.”
요즘 가문에서 걷다 보면 심심찮게 한서진에 대한 얘기가 들려오곤 한다.
이런 흐름을 끊을 필요성은 느꼈지만 자신이 나설 수는 없었다.
집법당주직을 내려놓은 현재로선 함부로 움직이기엔 위험하니까.
전면에 나서려면 시간이 조금 더 흘러야 했다.
“그래도 마침 잘 됐어. 분위기를 바꿀만한 이벤트가 곧 있을 테니까.”
“아..!”
비서는 무엇을 말하는지 바로 눈치챘다.
흑룡검가에서 해마다 막아내고 있는 몬스터 웨이브.
추운 겨울이 되면 마경에서 서식하고 있는 일부 몬스터들이 남하를 시작한다.
그걸 막아내는 것이 개성 인근을 지배하고 있는 흑룡검가의 책무.
그리고 후계자의 무위를 가늠하는 경쟁의 장이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몬스터를 죽였는지에 따라 여론이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비서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경험이라면 한서진은 절대 한치성 도련님을 못 따라옵니다.”
해외에서 숱하게 쌓은 던전 경험은 이번 몬스터 웨이브 경쟁에서 엄청난 이점이 될 것이다.
비서와 마찬가지로 한정후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이번에 압도적으로 한서진을 꺾을 기회다. 그러니 아무리 늦어도 웨이브 전엔 무조건 가문으로 돌아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
“완전히 너덜너덜 해졌구만. 누구랑 싸웠길래 반룡포가 이 지경이 된 건가?”
강주표는 서진이 공방에 들고 온 반룡포를 보며 혀를 찼다.
서진은 떨떠름한 얼굴로 강주표를 바라보았다.
“여긴 가죽을 다루는 8구역인데 강주표 야장은 왜 오신 겁니까.”
“도경인이 이놈이랑 친군데 왜, 오면 안 되나?”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그나저나 어서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주게.”
“환혼대장입니다.”
“그 8레벨 쾌검으로 유명한 놈? 살아있는 게 용하군.”
그리고 반룡포를 살펴본 도경인이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수복 가능합니다. 다만 소량의 드레이크의 가죽이 있어야 합니다.”
“그거 구하기 힘들 텐데 어쩌나.”
“괜찮습니다. 환영신가 멸문하면서 얻은 부산물이 꽤 됩니다.”
현재는 가문의 비고에 보관 중이지만 이번 일에 서진의 공이 크기 때문에 얼마든지 꺼내 쓸 수가 있었다.
“다행이군요. 수리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멸문했으면 환영신가의 가주는 어찌 됐는가? 8레벨이라 순순히 목을 내놓진 않았을 테고.”
“흑룡가주께서 처리했습니다”
서진이 증거를 확보한 뒤엔 대한가문회를 통해 멸문 결정이 내려졌고, 흑룡가주가 직접 환영가주의 목을 베었다.
“허, 그렇구만.”
강주표는 가주가 나섰다는 말에 바로 납득했다.
한국에서 10레벨 헌터를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을 테니까.
지잉.
그때 서진의 폰으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내용을 확인한 서진은 대화를 끝내며 인사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드레이크 가죽은 조만간 보내드리겠습니다.”
“예, 수리는 아마 일주일 정도 걸릴 겁니다.”
반룡포를 맡긴 서진은 급히 공방을 나섰다.
목적지는 개성 외곽에 있는 폐공장.
암살자 케이트에게 말해놓았던 접선 장소였다.
십여 분이 지나고, 공장에 도착한 서진은 공손하게 기다리고 있는 케이트를 발견했다.
낙인의 도장으로 인해 기간제 노예가 된 케이트는 서진이 오자 깊이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알아낸 정보는.”
“저를 고용한 사람은 적륜성의 총관입니다.”
“적륜성? 확실해?”
“저에게 의뢰가 닿게 된 과정을 전부 조사했습니다. 여기 보시기 편하게 정리해놓았습니다.”
케이트가 수집한 증거를 첨부한 서류를 보니 확실했다.
그렇다면 화답을 해줘야겠지.
서진이 적륜성에 대한 보복을 결심하는 순간, 단말마가 들려왔다.
“컥!”
절명한 케이트의 육체는 힘없이 쓰러졌다.
어느새 보름이란 시간이 다 지나버린 것이다.
서진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가문으로 돌아갔다.
**
“부르셨습니까.”
붉은 노을이 짙게 깔리고 있는 저녁.
서진은 가주실에 와있었다.
“거기 앉아라.”
한벽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암살자가 죽었다고 들었다.”
“예.”
“누가 너를 암습하려 했는진 알아냈느냐.”
“적륜성이더군요.”
“그래.”
한벽호는 알고 있었던 것처럼 표정에 어떠한 감정 변화도 없었다.
그리고선 옆에 조용히 서 있던 비서를 불렀다.
“형석아.”
“예, 가주님.”
“마경에 연구소를 만들고 흑마법사를 시켜 뇌옥에 침입하고, 후계자 암습까지. 이 정도면 되겠지.”
뜬금없어 보이는 말이었지만 김형석 비서는 가주의 말뜻을 쉽게 알아챘다.
“예, 충분합니다.”
한벽호는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이며 서진을 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너에게 흑룡대와 자호대의 전체 지휘권을 주마. 앞으로 일주일 내에 적륜성을 지우고 와라.”
“진심이십니까.”
소가주도 아닌 후계자에게 가문의 주력부대의 일시적 지휘 권한을 주다니.
서진도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 겁나느냐.”
그러나 놀람도 잠시, 서진은 기꺼운 듯이 대답했다.
“그럴리가요.”
**
중국의 십대 가문 중 하나인 적륜성.
그곳에 소속되어 일하길 원하는 사람들은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니 적륜성에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은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느끼는 감상은 다른 법.
특히나 높은 직책일수록 부담은 무거워지기 마련이었다.
적륜성의 총관은 성주와 같이 차를 타고 있는 이 순간이 특히 더 그랬다.
“총관. 저번에 암살자 보낸 건 전혀 소식이 없던데 어떻게 된 일인가.”
“죄송합니다. 실패한 것 같습니다.”
“뭐라고?”
“뿐만 아니라, 역으로 그 암살자가 의뢰자의 신원을 조사하고 다닌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총관도 일이 왜 이렇게 꼬인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며 보고를 이어갈 뿐이었다.
“현재는 사람을 풀어서 그 암살자를 추적 중입니다.”
“도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길래 그리 되는 건가.”
성주의 말에 총관은 살얼음판 위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빠른 시일 내에 잡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럼 한서진도 눈치챈 게 아닌가? 그게 아니고서야 암살자가 의뢰인을 찾아다닐 이유가 없을 텐데.”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암살자만 잡아서 없애버린다면 한서진도 더 이상 움직이진 못할 겁니다.”
“후우.”
적륜성주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싸늘한 어조로 경고했다.
“총관. 앞으로 이런 일이 계속 발생한다면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총관은 식은땀을 흘리며 다음 보고를 위해 입을 열었다.
“키메라 연구 진척은...”
그때 적륜성주의 전화기가 크게 울렸다.
“잠깐 있어 봐.”
적륜성주는 총관의 보고를 멈추고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성주님! 본 성에 습격이 들어왔습니다!
“어떤 놈들이야!”
적륜성주는 목에 핏줄을 세우며 노호를 터트렸다.
다른 지역에 볼일이 있어 적륜성에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기습해 오다니.
적륜성주는 전화를 으스러트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흑룡검가입니다!
“뭐?”
-이미 외성은 쑥대밭이 되었고 놈들이 내성까지 쳐들어온 상태입니다!
“무조건 버텨, 지금 바로 가지.”
콰득!
통화를 마친 적륜성주는 결국 전화기를 찌그러트렸다.
차창 밖을 보니 멀리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게 보였다.
“감히...!”
콰앙!
달리고 있는 차에서 천장을 박살 내며 도약한 성주는 적륜성으로 향했다.
**
흑룡대와 자호대는 적륜성의 헌터들을 쓸어버리며 전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적륜성 내부로 들어가기 직전, 서진은 부대를 멈춰 세웠다.
묵직한 위압감이 느껴지는 존재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진이 제일 기다리고 있던 헌터.
쿠웅!
“드디어 오셨군.”
내성의 문 앞에서 적륜성주가 굉음을 내며 착지했다.
적륜성주는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전황을 파악했다.
“무참하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땅바닥에 누워있는 시체들 전부 적륜성의 무복을 입고 있었다.
흑룡검가와 적륜성의 전력 차가 이렇게나 심했다니.
내심 비등할 거라 생각했었지만 완전히 착각이었다.
이 정도면 중국의 십대 가문 중에서도 상위에 해당 될 무력 수준이다.
적륜성주는 입술을 씹고 피를 삼키며 입을 열었다.
“흑룡검가는 어찌하여 적륜성에서 패악을 부리는 건가.”
서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성주를 쳐다봤다.
“잘못은 적륜성에서 먼저 저질렀고 이건 그에 대한 화답이라 할 수 있지.”
“잘못이라.”
“설마 모른 척하려는 건 아니지?”
“그쪽에서 마경의 연구소를 먼저 공격한 건 잘못이라고 생각 안 하나 보군.”
“역시 쓸어버리러 오길 잘했네.”
“이 놈... 오늘 이곳을 너희들을 사지로 만들어주마!”
적륜성주는 다른 세력과의 전쟁을 위해서 아껴왔던 결계를 발동했다.
쿠구구구!
하늘이 어두워지며 결계가 적륜성 전체를 둘러쌌다.
“마나가!”
그리고 흑룡가 헌터들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경에 있던 것과 같은 결계군.”
서진은 익숙한 감각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적륜성주는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곧 죽을 놈이 웃다니. 배포는 좋구나.”
“그런데 이거 당신도 적용되지 않나?”
“난 이런 환경에서 숱하게 수련을 해왔다. 같은 조건이지만 같은 게 아니다 애송아.”
“음, 확실히 다르긴 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