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십대가문 중 하나인 적륜성이 하룻밤 사이에 증발했다는 소식은 중국 전역을 강타했다.
그에 대한 반응은 굉장히 격했다.
타국에서 저런 만행을 저지른 흑룡가 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복수를 해야 한다는 여론이 나돌았다.
“그래도 신경 쓸 필요 없는 거 알지?”
마광병 약을 사러 온 서진에게 약화련주가 꺼낸 말이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겉으론 난리가 난 듯 보이지만 실상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각 가문의 수장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기에.
“어차피 힘의 논리니까요.”
그들도 한국의 가문이 멋대로 침공한 것에 불쾌감을 느꼈을 테지만 총대를 메고 나서기엔 부담스러울 터였다.
이미 망해버린 가문을 위해 분노를 표출하게 되면 흑룡검가와 잠재적 적대관계가 형성된다.
이득과 손실을 따졌을 때 자신들의 가문에 전혀 도움이 되는 행위가 아닌 것이다.
최이린은 서진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적륜성에서 먼저 실수를 범한 것도 맞으니까 명분도 흑룡검가에게 있지.”
중국의 상위 가문들이 움직이지 않는 두 번째 이유였다.
다만 침공 문제는 국가 간 여론전을 펼칠 여지가 있긴 하나, 굳이 그럴 가치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흑룡가주 때문에라도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을 거야.”
“그것도 그렇고, 현재는 우리 가문에 신경 쓸 겨를도 없어 보이더군요.”
적륜성이 사라지면서 랴오닝성이 무주공산이 돼버렸다.
그 지역을 둘러싼 이권도 흑룡가에 대한 시선을 돌리는 데에 한몫했다.
“자, 여기.”
“감사합니다.”
서진이 약을 챙기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최이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엔 어떠니. 그 병.”
서진은 어제 열어봤던 상태창 제일 마지막 줄을 떠올렸다.
-마광병 53.9% 진행.
“조금 높아지긴 했는데 곧 괜찮아질 겁니다.”
적륜성의 곳간을 털면서 쓸만한 영약을 발견했기 때문에.
최이린은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그럼 다행이고. 계속 비싼 걸 복용해도 결국은 항체가 생겨서 영약 같은 걸로 몸을 정화시켜주는 게 좋을 거야. 나중에 찾기 힘들어지면 말해. 구해볼 테니까.”
“예.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됐어. 이제 가봐.”
서진은 짧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그리고 서진이 한약방의 정문을 나서자 누군가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한서진 님. 천궁에서 나왔습니다.”
정장 차림의 남자는 정중하게 인사하며 용건을 꺼냈다.
“길드장 님께서 한번 뵙길 원하십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서진에게 천궁에 대한 인상은 좋은 축에 속했다.
급한 일도 없으니 무슨 일인지 들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좋습니다.”
서진을 뒷좌석에 태운 차는 곧장 천궁 길드로 향했다.
**
서진이 천궁의 집무실에 들어가니 길드장이 기다렸다는 듯 의자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보네요. 반가워요.”
“예,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덕분에요.”
의례적인 서진의 인사에 문선영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서진은 일순간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마찬가지로 단순한 대답인 걸까 아니면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선 여기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죠.”
문선영은 급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차를 권했다.
잠시 후, 비서가 두 개의 찻잔을 놓고 물러가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적륜성 무너트린 거 잘 봤어요. 저까지 무섭더라구요.”
서진은 어이가 없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문선영은 차를 마시며 서진의 시선을 은근슬쩍 피했다.
“농담이 조금 과했나요? 미안해요. 어쨌든 흑룡검가가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재조명받게 될 거예요.”
“달라질 게 있을까요.”
“당연히 있어요. 흑룡검가가 타국의 헌터 집단을 없애버린 적은 여태까지 없었어요. 전례가 없었던, 이번이 처음이었죠.”
서진은 가문의 과거에 그다지 관심이 있진 않지만 대략적인 흐름은 파악하고 있었다.
그간 국내에서 길드나 가문을 무너트린 적은 많았지만 국외의 경우는 이번 일이 첫 사례.
“그것도 가주가 아닌 후계자가 주도했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은 큰 의미를 두고 있을 거예요. 어떤 말인지 아시겠죠?”
“가문의 방향 말입니까?”
문선영은 정답을 맞힌 걸 칭찬하듯 미소 지었다.
“앞으로 흑룡검가의 힘이 다른 국가의 길드나 가문에도 영향을 미칠 거라 보는 이가 많아질 거예요. 설령 예비 가주님이 그럴 생각이 없어도 말이죠.”
한마디로 이제 예상치 못한 견제가 들어올 수 있다는 의미.
하지만 투신에 올라섰던 서진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그만한 일을 했으니 주목을 받는 건 감수하는 수밖에요.”
“저도 그런 배짱은 좋아하는 편이라 응원해요. 하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명심하도록 하죠.”
서진은 그녀의 호의 섞인 걱정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제가 가주가 되지 않는다면 그런 우려는 사그라들게 되겠죠.”
“마음에 없는 소리 해도 안 속는답니다.”
그에 작게 웃음을 흘린 서진은 찻잔을 놓으며 말했다.
“그래서, 오늘 보자고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조금 전에 나눴던 대화 내용과 연관이 있다고도 볼 수 있어요. 최근 백야에서 자오(慈烏) 길드의 확장세가 심상치 않아요.”
백야를 지배하고 있는 세 길드 중 하나.
비교적 온건한 천궁과 대비되는 길드였다.
갑작스러운 백야의 세력권 얘기는 뜬금없었지만 서진은 잠자코 들었다.
그녀가 쓸데없는 말을 하진 않을 테니까.
“문제는 자오 길드 뒤를 봐주는 다른 세력이 있는 건 확실하나 실체를 잡기가 힘들다는 것이죠.”
어지간히 스트레스를 받은 건지 문선영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사흘 전에 작은 연결고리를 발견했는데 후계자님이 떠오르더라구요.”
“네?”
서진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적륜성에서 마나 봉인 결계가 펼쳐졌다고 했죠?”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에서 공개하진 않았지만 천궁의 길드장은 알고 있을 만한 위치에 있으니까.
“자오 길드의 영역 내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했거든요. 후계자님도 알다시피 그 결계는 굉장히 희귀하죠. 높은 확률로 같은 흑마법사라고 저는 예상해요. 아니면 사제관계라던가.”
“그런데 그걸 저에게 말하시는 이유는?”
문선영은 서진을 지긋이 응시하며 말했다.
“일부러 모르는 척해도 소용없어요. 예비 가주님이라면 분명 적륜성 전체를 수색해서라도 결계 주인에 대한 정보를 손에 넣었을 테니까.”
“들켰군요.”
서진은 애초에 끝까지 숨길 생각은 없었기에 쉽게 인정했다.
“그럼 제가 적륜성에서 얻은 정보를 원하는 거군요.”
“어때요. 정보를 공유할 의향은 있으신가요? 조건이라면 얼마든지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요.”
“으음.”
서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알려주기 싫은 정도의 거부감은 없지만 선 듯 공개하기엔 망설여졌다.
현재 천궁에서 얻어내고 싶은 게 없었으니까.
“아쉽지만 제가 원하는 것이 없어서 거래는 힘들 듯합니다.”
“그럼 백지수표는 어때요? 필요한 게 생기면 나중에 말하는 걸로.”
“글쎄요. 확실한 보증이 없어 믿기 힘들군요.”
서진은 천궁의 길드장에게 백화연만큼의 신뢰감을 갖고 있진 않았다.
계속된 거절에 문선영의 눈초리가 살짝 올라갔다.
조금 화가 난 걸까.
“그럼 백지수표라도 확실한 믿을 구석이 있다면 거래를 할 의향이 있다는 말이죠?”
“예.”
“알겠어요. 사흘 안에 다시 연락을 드릴게요.”
서진은 문선영의 눈빛이 결연한 의지를 품은 것처럼 보였다.
**
최근 흑룡가에는 어수선한 분위기와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몬스터 웨이브로 인한 대규모 토벌 작전 준비로 한창일 때 한치성이 복귀했기에.
“그래서 어제 한치성 만났어?”
서진과 같이 저녁을 먹고 있던 정보건은 밥을 삼키며 물어보았다.
“아니.”
“하긴 만나서 할 얘기도 없는데. 얼굴 봐봤자 좋을 게 없긴 하지.”
정보건은 고개를 끄덕거리다 문득 생각난 것을 말했다.
“아 참, 오후에 들은 소식인데. 한치성이 본격적으로 팀을 키울 생각인가 봐.”
“팀?”
“너도 있긴 하잖아, 거의 신경 안 쓰고 있지만. 어쨌든 규모를 크게 할 생각인 것 같던데.”
“어느 정도로?”
“벌써 팀에 있는 인원만 해도 10명이니까. 보통 소수 정예로 운용하는 거 생각하면 특이하긴 하지.”
정보건은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며 말을 이어갔다.
“거기다 이제 이틀 차라는 거 생각하면 많이 모은 편이고. 아무래도 레이나 이름값 덕택이겠지만 말이야.”
“레이나?”
처음 듣는 이름에 서진은 미간을 좁혔다.
“몰라? 한치성이 해외에서 있을 때 소속된 팀의 리더.”
“설마 그거 때문에 이름값이 있단 얘긴 아니지?”
“당연하지. 영국 혼혈인데 궁술로 7레벨에 도달해서 유명해. 외모 때문에 인기도 많아.”
설명을 들은 서진은 어렴풋한 기억이 떠올랐다.
이름은 몰라도 그런 헌터가 있다는 것 정도는 들어본 것 같았으니.
“영국의 가디언 길드장의 막내딸이기도 하고.”
“가디언이면.”
영국에서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길드.
유명한 이유는 알겠으나 서진은 의문을 표했다.
“근데 레이나 때문에 한치성의 팀원이 늘어난다는 얘긴 뭐야.”
“레이나가 한치성과 같이 가문에 돌아왔거든.”
“그래서 레이나가 팀에 들어갔다는 말이야?”
“응.”
“그림이 이상한데. 해외에 있을 땐 레이나가 팀장이었다가 이번에는 팀원이라니.”
정보건도 그건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안 그래도 그 얘기로 온갖 추측만 무성한 상태야. 자세한 사정은 둘만 알고 있겠지.”
“그나저나 가디언 길드장의 딸인데 길드를 이어받는 것엔 관심이 없나 보네. 여기까지 따라온 걸 보니.”
정보건은 폰으로 레이나를 검색해서 서진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귀찮은 거 질색이라며 공식적으로 말했던 적이 있어. 어차피 오빠가 있으니까 신경 쓰기 싫다면서. 그래서 이미 장남으로 굳혀진 상황이지.”
서진은 가볍게 웃으며 그의 말을 흘려들었다.
레이나의 영향력도 있겠지만 중요하게 작용하는 건 한치성의 경쟁력이다.
7레벨에 거의 근접했다는 소문이 파다한 만큼 기대를 거는 헌터들도 많은 거겠지.
“아참, 그리고 나 곧 승진할 것 같다.”
“정말? 그럼 던전기획실장이 된다는 건데 지금 실장은 어디 가고?”
“실장은 한재열 라인이었는데 좀 어중간했거든. 어떻게든 지금까지 버티긴 했는데 이제 한계가 찾아온 거지. 잘린 건 아니고 사표 냈어.”
“형이 압박한 건 아니지?”
정보건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야 이, 그걸 농담이라고 하냐. 오래 해 먹었어 그 양반. 사실상 정년까지 한 거나 마찬가지라니까.”
“뭐, 어쨌든 축하해.”
“아냐 우리 서진 동생께서 갈수록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덕분이지.”
서진은 정보건과 잡담을 나누며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이제 집으로 가려고 할 때, 구현수 비서에게 전화가 왔다.
-서진 님, 마탑에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레이놀즈 9계층장과 정소율 헌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