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노인는 형형한 눈빛을 보이며 일어서서 서진에게 다가왔다.
“반갑네. 마탑의 9계층장을 맡고 있는 레이놀즈라고 하네.”
마탑의 구조는 1계층부터 9계층까지 있다.
원로원이나 이사회를 차치한다면 사실상 부마탑주 다음으로 높은 지위인 셈.
“제 스승님이세요...”
옆에 있던 정소율이 작은 목소리로 덧붙엿다.
“그렇군요. 그런데 저에게 무슨 볼일이?”
“몬스터 웨이브 때문이네.”
“마탑에서 관심을 보일 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이번에 남하하는 몬스터 중에서 학술적으로 가치가 있는 희귀 개체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오게 됐네.”
“희귀 개체라 하면?”
“오우거가 속성 마법을 다루는 것을 마탑에서 관측했다네.”
그것을 들은 서진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이계에서 숱하게 봤기에 놀랍지도 않았으니까.
“기왕이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사체까지 가져갈 수 있으면 좋겠네만.”
“제가 웨이브 토벌에 참여하긴 하지만 방어선은 꽤 길고 어디서 나올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만.”
“상관없네. 그럼 참여만 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게.”
그에 서진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듣자 하니 결국 그거 때문에 절 부르신 겁니까?”
단순히 다리를 놔달라는 용건이었나.
일순 달라진 분위기에 정소율이 입을 열려고 했지만 서진이 자르며 말했다.
“이번 방어선의 총책임자는 흑룡대장입니다. 그쪽으로 연결을 해드리죠.”
서진은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음부턴 내원당의 종합지원실로 연락하시는게 나을겁니다. 앞으로 이런 일로 절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이런 식으로 대처하면 영입하고 싶었던 정소율과 거리가 벌어지겠지만 상관없었다.
일방적으로 통보한 서진은 응접실을 나왔다.
건물을 나가기 직전, 뒤늦게 뛰쳐나온 정소율이 서진을 불러세웠다.
“서진 님. 잠시만요!”
“할 말이 더 남았습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사과받을 생각까진 없습니다. 그냥 서로 생각이 안 맞았을 뿐이지.”
“하아, 그게.”
정소율은 너무나 차가운 서진의 태도에 사고가 정지되는 기분이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기 힘들었기에.
그런 정소율을 본 서진은 한숨을 쉬고 살짝 누그러트렸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아, 네. 사실 그뿐만 아니라 웨이브에도 참가하려고 온 거였어요.”
“예, 감사합니다.”
서진은 반응은 미지근했다.
몬스터 웨이브는 흑룍검가에서 오랜 세월 막아왔기에 상당한 노하우가 쌓인 상태였다.
거기에 이번엔 기갑성가와 철혈백가에서도 지원을 오기 때문에 전력은 충분했다.
여기서 인원이 더 추가되면 고생한 것에 비해 사체 분배 비율이 더 줄어들 뿐.
안전한 상황에서 도움을 준다 한들 숟가락 얹기밖에 안되는 것이다.
물론 헌터들의 부상 위험이 줄어든다는 점에선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그것 역시 흑룡대장과 협의하시면 됩니다.”
별 감흥 없는 기색으로 말한 서진에게 정소율이 조급한 듯 입을 열었다.
“저, 어떻게 하면 사과를 받아주실 수 있나요?”
“말했을 텐데요. 사과하실 필요 없다고.”
“제가 보기엔 그냥 받을 생각이 없어 보여서요...서진 님의 눈빛을 보면 이참에 관계를 잘라내 버릴 것 같은걸요.”
그리고 뒤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사과할 테니 받아주겠나.”
레이놀즈가 천천히 다가오며 서진을 응시했다.
서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후우. 일단 다음에 얘기하시죠. 여기서 계속해봤자 서로 안 좋을 것 같으니까요.”
**
서진은 집에 돌아와 소파에 털썩 앉으며 눈을 감았다.
냉수를 들이켜고 차분히 생각한 서진은 이상함을 자각했다.
‘왜 그랬지?’
그들의 용건이 살짝 귀찮긴 했지만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평소였으면 그걸 구실삼아 작게나마 빚을 씌우는 식으로 대화를 풀어갔을 것이다.
확실히 정상적인 대처는 아니었다.
이성이 아니라 본능에 잠식되어 움직여버린 느낌.
서진은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리고 인터넷에 들어갔다.
‘혹시.’
마광병의 부작용에 대해 검색을 해보니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진행도가 50%가 넘으면 본래 성격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례가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 그랬었나.’
오전에 대화를 나눴던 천궁 길드장은 워낙 화술이 좋은 사람이라 감정이 촉발될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놀즈는 달랐다.
그 차이가 서진의 반응에 큰 차이를 불러일으킨 것.
‘생각보다 심각한 부작용이군.’
만약 전투 중에 저런 감정을 자극당했다면 냉정한 판단을 하지 못했겠지.
상대에 따라 목이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서진은 바로 설하윤을 불렀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지금 가문의 비고에 넣어둔 영약이 있을 겁니다.”
“적륜성과 환영신가에서 획득한 두 개의 영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그거요. 지금 가져와 줄래요?”
“알겠습니다.”
설하윤은 군말 없이 바로 비고로 향했다.
괜히 서진이 직접 가져오려고 했다가 또 비슷한 일을 겪느니 믿을만한 그녀에게 맡기는 편이 나았다.
잠시 후, 그녀는 두 개의 보관함을 들고 와 서진의 앞에 내려놓았다.
“하윤 씨.”
“예, 옆에서 지키고 있겠습니다.”
이젠 별말 하지 않아도 서진이 할 말을 파악하는 설하윤이었다.
“하지만 서진 님. 영약을 연달아 두 개를 복용하는 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괜찮아요. 이게 대환단처럼 부담스러운 수준까진 아니니까. 그리고 하나 먹고 나서 불안하다 싶으면 멈출 테니.”
“알겠습니다.”
서진은 첫 번째 영약을 꺼내 바로 입에 넣었다.
**
-마광병 진행도 : 7.1%
두 개를 연달아 복용한 결과였다.
아무래도 한번 영약으로 진행도를 떨어트린 적이 있다 보니 두 번째는 감소 폭이 줄어든 모양이다.
대환단보다 효과가 약한 것도 한몫했겠지만 말이다.
‘이러니 계속 강력한 약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는군.’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낼 순 없는 노릇.
마광병 덕분에 마나 발현 속도가 빠른 점은 좋지만, 그 외 모든 것이 단점이었다.
‘지구에서도 치유할 방법이 있는지 찾아봐야겠어.’
본래는 10레벨 될 때까지 참으려고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직접 체감한 부작용은 생각보다 치명적이었기에.
그리고 병원에서 깨어날 당시와 비교해서 현재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서진이 마음만 먹으면 활용할 수 있는 인재와 단체가 여럿 있으니까.
어느 정도 기반이 쌓였기에 할 수 있는 결정이었다.
“서진 님.”
옆에서 지켜보던 설하윤이 걱정스레 서진을 불렀다.
“괜찮아요. 잘 흡수됐습니다. 많이 줄어들었고.”
서진이 창밖을 보니 어느새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
본의 아니게 밤을 새워버린 서진은 작전실로 향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몬스터 웨이브를 대비한 회의가 있으므로.
그때 서진은 앞에서 걷고 있는 정소율을 보았다.
“소율 씨.”
“네? 어.”
무심코 뒤를 돌아본 그녀는 서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제보다 무언가 달라진 느낌.
예리한 날이 서린 검처럼 차가운 압박감이 사라진 분위기였다.
“지금 잠깐 대화 가능하십니까?”
“네.”
서진은 어제의 숨은 사정을 털어놓았다.
흑룡가의 후계자에게 마광병이 있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에 말함에 있어서 거리낌은 없었다.
“...그래서 반응이 좀 날카로웠습니다. 그 점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정소율은 깜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틀린 말 하신 건 아니었으니까요.”
그녀는 마음의 짐이 사라진 기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면 지금은 나아지신 건가요?”
“네. 당분간은요.”
“그랬었구만.”
그때 레이놀즈 9계층장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8레벨 마법사답게 멀리서도 서진과 정소율의 대화를 듣고 온 것이었다.
“어제 마나가 불안정해 보였는데 그 이유 때문이었군. 어쨌거나 내가 빌미를 제공한 셈이니 사과하지.”
“그건 이제 괜찮습니다. 이제 곧 회의 시간이니 들어가시죠.”
“그러지. 아, 참고로 희귀 개체는 마경 안에서 서해와 근접한 곳에 있는 걸로 확인됐네. 작전 회의에 들어가기 전이니 참고하게.”
“알겠습니다.”
**
참석 인원을 확인한 흑룡대장은 브리핑을 시작했다.
예상되는 몬스터의 수와 주요 남하 경로, 그것을 고려해서 배치된 방어선까지.
수십 년간의 경험으로 쌓인 결과를 토대로 만들어진 작전이었다.
다만 후계자는 어디에 투입될지 결정할 수 있었는데, 두 명 이상일 경우엔 서로를 떨어트려 놓는 편이었다.
“두 분 어디에 가시겠습니까?”
“서쪽 진영.”
“동쪽으로 결정하겠다.”
서진은 레이놀즈에게 말했던 몬스터가 내려올 법한 경로를 택했고, 한치성은 반대편을 골랐다.
한편 둘을 지켜보던 다른 헌터들은 속으로 안심했다.
벌써 의견 충돌이 일어나면 어쩌나 걱정했기 때문에.
“이것으로 작전 설명은 마치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작전실을 나서던 서진은 자연스레 한치성과 마주 보게 되었다.
“내가 해외에 있는 동안 이것저것 많이 했더라?”
“일이 많긴 했지.”
“그동안 수고했는데 앞으론 무리하지 말고 그냥 쉬어. 내가 할 테니까.”
“그 말을 내가 들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쓸데없는 발버둥을 계속하는 건 미련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거야 보면 알게 되겠지.”
[지력이 8 상승합니다]
서진은 한치성의 투기를 흡수하며 먼저 걸어 나갔다.
**
“온다!”
작전 당일.
예상했던 시간에 몬스터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시작은 마경에서 최약체인 고블린 부족이었다.
“3조!”
후열에 위치한 마법사와 원거리 스킬을 가진 헌터들이 화력을 퍼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블린은 전멸했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쉴 틈 없이 오크 부대가 물밀 듯이 오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신호에 맞춰 사전에 설치한 트랩 마법과 폭탄이 터 져나왔다.
당연히 그것만으론 해결이 안 되기에 후열은 계속해서 전방에 공격을 쏟아냈다.
“취이이익!”
약한 놈들은 화력에 휩쓸려 죽었지만 방패가 있거나 강한 오크들은 목숨이 붙어있었다.
여기서부턴 멀리서 타격해도 효율이 많이 떨어진다.
그러니 근접계 헌터가 나설 차례였다.
살아남은 오크들은 장병기를 든 헌터들에게 차례로 죽어갔다.
한편 서진이 맡은 방어선은 비교적 여유로운 상황이었다.
몰려오는 몬스터의 수는 비슷했으나 서진과 계층장의 마법 덕분이었다.
광범위하게 지면과 몬스터를 적시는 물 마법과 전격 조합은 효율적인 사냥이 가능했으니까.
그리고 서진의 뇌격을 가만히 지켜보던 레이놀즈는 작게 감탄했다.
“소율이 말대로 자네는 검사인데도 마법사 수준의 마나 운용 능력을 갖고 있군. 비정상적이야.”
서진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전방을 보며 말했다.
“또 옵니다.”
이번엔 오우거들이었다.
서진은 멀리 있지만 눈에 띄는 한 녀석을 가리켰다.
“혹시 저게 계층장님이 찾으시던 몬스터 아닙니까?”
양손에 화염을 가득 품고 있는 오우거.
레이놀즈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맞네! 저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