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화염을 지닌 오우거를 보며 눈을 빛내는 레이놀즈.
단순히 힘만 센 몬스터라 알려져 있는 오우거가 속성력을 사용한다는 건 놀랄 만한 일이었다.
서진도 이계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신기했었기에.
물론 그래 봤자 화염밖에 쓰지 못해서 플레어 오우거라고 불렸지만 말이다.
그래도 플레어 오우거가 희귀한 가치를 지닌 건 사실이었다.
오우거 중에 특별한 피를 타고난 개체만이 화염을 일으킬 수 있으니까.
“최대한 훼손 없이 죽이길 바라시겠군요.”
“아니. 자네가 그걸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부탁하러 온 입장인데 내가 알아서 잡아야지.”
“그럼 최대한 저희 쪽 화력에 휩쓸려 죽지 않게끔만 조절하겠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네.”
서진은 거리를 재면서 후열 부대에게 공격 지시를 내렸다.
원거리 스킬을 가진 헌터라도 유효 범위 사거리는 대부분 비슷해서 비교적 정교한 조절이 가능했다.
물론 초장거리의 저격형 스킬을 지닌 헌터도 있지만 아직은 나설 차례가 아니었다.
“돌입.”
그렇게 후열이 공격을 퍼붓고 나면 서진을 비롯한 근접계 헌터가 들어갈 순서가 다가온다.
특히나 오우거의 지근거리에서 공격해야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몬스터.
곳곳에서 오우거의 피륙을 베는 소리가 들려온다.
“우어어어!”
화륵!
멀리 있던 플레어 오우거가 어느새 다가와 화염을 쏘아 보냈다.
서진은 가볍게 피하며 레이놀즈를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하고 있던 마법을 발동했다.
집채만 한 크기를 자랑하는 물 덩어리가 허공에 등장하더니 오우거를 향해 떨어졌다.
쿠웅!
거대한 물 감옥에 가둬서 화염을 꺼트리고 질식사시킬 모양.
플레어 오우거는 거칠게 발버둥을 쳤지만 상대는 8레벨의 마법사.
벗어날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숨이 끊어지고 거대한 사체를 손상 없이 얻을 수 있었다.
플레어 오우거가 제일 후방에 있었기에 이것으로 오우거 무리는 끝이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3차 웨이브일 뿐.
쿠구구구!
다른 몬스터가 다시 몰려오고 있었다.
“쉴 틈을 주지 않는군.”
서진은 뇌기를 일으키며 맞이할 준비를 했다.
**
“후, 이거 생각보다 힘들구만.”
레이놀즈는 거친 숨소리를 내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계속된 웨이브 토벌은 8레벨 마법사도 지치게 했다.
마력과 지력은 8레벨을 급을 넘었어도 육체 관련 스텟은 한참 아래일 테니 그럴 만했다.
“힘드시면 들어가 쉬시죠.”
서진은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부상자와 휴식을 위한 임시 막사.
그러나 레이놀즈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마지막이라 하지 않았나?”
“예. 보스급 몬스터 한 놈만 막아내면 끝납니다.”
“아직 마나도 남아있으니 기왕 시작한 거 끝을 봐야지.”
그때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몬스터가 서서히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저 놈은...?”
모습을 확인한 레이놀즈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뿐만 아니라 부대 전체가 술렁였다.
“저거 뭐야. 드레이크가 왜 저렇게 커?”
“혹시 수십 년 전에 한번 나타났다던 드래곤은 아니겠지.”
“에이 설마.”
서진도 이번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반 드레이크보다 열 배나 큰 덩치와 탁한 회색빛의 비늘.
서진도 이계에서 자주 보진 못했던 모습이지만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반룡으로 탈피하기 직전이군.’
드래곤에 제일 가까운 드레이크는 탈피를 거치고 나면 이족보행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되면 힘과 스피드는 비약적으로 상승해 기존의 드레이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현재 저놈은 몬스터 등급으로 표현하자면 준 S급.
만약 날개가 솟아난 반룡체가 된다면 완벽한 S급 수준이 된다.
탈피 자체가 매우 드문 일이지만 마경이란 환경 때문인 건지.
어찌 됐든 차라리 잘된 일이다.
반룡체가 되기 전에 여기서 처리하는 기회를 얻은 건 행운이라 볼 수 있었으니.
탈피하고 나서 개성으로 내려오게 된다면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서진은 찬란하게 뇌기를 빛내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자네. 저런 드레이크를 본 적이 있는가?”
레이놀즈는 담담한 서진의 태도에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서진은 그의 눈빛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계층장님의 지적 욕망은 이해하지만 저놈은 상처 없이 죽이기 힘듭니다.”
“그런 무리한 요구 안 할 테니 걱정 말게. 만약 알고 있으면 그냥 나중에 이야기나 들려주면 좋겠네. 사례는 얼마든지 하지.”
“참고로 저놈은 플레어 오우거처럼 못 넘겨드립니다.”
드레이크가 비대해진 만큼 상당한 양의 가죽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레이놀즈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끄응, 내가 이리 도움을 주는데 조금은 받을 수 있지 않나?”
“비율 조정이야 얼마든지 가능하죠.”
“그럼 됐네.”
레이놀즈의 조건을 받아들인 서진은 후열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각종 스킬들이 공중을 수놓으며 드레이크를 향해 날아갔다.
키이익!!
하지만 드레이크의 입에서 굉음이 나오는 순간 그것들은 힘을 잃고 수직 낙하했다.
레이놀즈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하며 감탄했다.
“피어까지 쓰니까 진짜 드래곤 같구만.”
진짜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위력이지만.
서진은 예전 기억을 흘려보내며 땅을 박차고 나갔다.
**
쿠웅!
30여 분이 흐르고 마침내 거대한 드레이크가 쓰러졌다.
드레이크의 비늘이 일정 레벨 이하의 마법은 튕겨 내버리기에 마법사들의 화력은 거의 포기해야 했다.
그나마 레이놀즈가 고레벨의 물 마법을 쏟아부은 덕분에 조금 수월하게 전투를 이끌어 갈 수 있었다.
탈피를 앞둔 드레이크는 A급 보스 몬스터 중에서도 최상위급.
작전 당시 예상했던 수준보다 한두 단계 더 높은 몬스터.
그런데도 사망자가 없는 것은 서진과 레이놀즈 덕분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서진은 마나 탈진 상태가 된 레이놀즈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나야 뒤에서 마법만 쓰고 자네가 더 수고했지. 그보다 자네 혹시.”
그때 자호대장이 다가오자 그는 말을 멈추었다.
“아니, 다음에 얘기하지.”
서진은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건지 궁금했으나 자호대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호대장. 다른 곳은?”
“이미 끝났다고 합니다. 우리 부대가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래, 오늘 수고했어.”
물론 웨이브를 막았다고 끝이 아니다.
시험을 봤다고 끝난 게 아니듯이 토벌 과정에 대한 강평이 남아있었다.
**
다음날, 서진은 천궁의 연락을 받고 백야로 향했다.
길드장실로 들어가니 문선영이 자신 있는 얼굴로 서진을 맞이했다.
“저번에 말했던 확실한 믿음을 주기 위해 아이템을 가져왔어요.”
그녀는 탁자 위에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
“이게 뭡니까.”
“마나 계약서예요. 생산 수량이 적어서 꽤 구하기 힘든 아이템이죠.”
조건을 기재하고 불이행 시 서로의 마나를 이용해 속박할 수 있는 효과를 가진 물건.
“이거라면 괜찮죠?”
문선영의 확신에 찬 물음에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충분합니다.”
서진은 문선영과 함께 아이템에 마나를 각인하여 계약을 맺었다.
조건에 따라 서진은 적륜성에서 얻었던 기밀 서류를 건네주었다.
“복사본이니까 안 주셔도 됩니다. 퍼트리지만 않으시면 됩니다.”
“풋, 후계자님도 농담을 할 줄 아시네요. 걱정마세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문선영은 당장 정보를 확인하기보단 서진을 향해 말했다.
“벌써 가시게요? 어제 재밌는 몬스터 사냥했다고 하던데 얘기 좀 들려주고 가시지.”
“단순히 덩치만 큰 드레이크입니다.”
“흐음? 거짓말이라는 걸 티가 나게 말하시니 더 궁금해지네요.”
아직 그 드레이크에 대한 정보는 서진이 독점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천궁은 물론이고 어떤 집단에서도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후계자님이 가지고 있는 그 정보를 원한다면 알려줄 의향은 있으신가요?”
“사체가 없는 천궁에선 딱히 가치가 없을 텐데요.”
“그렇진 않아요. 다만 후계자님께서 당장 공개할 의사는 없어 보이니 이쯤에서 말을 멈출게요.”
선을 넘을 생각은 없다는 듯이 문선영은 물러났다.
서진은 옅은 미소를 보이는 그녀에게 인사하고 천궁을 나섰다.
**
가문으로 복귀한 서진은 회의실로 향했다.
“토벌, 제일 늦었다며.”
먼저 도착해 앉아있던 한치성이 삐딱하게 고개를 틀어 서진을 바라봤다.
효율적인 지시를 통해 웨이브를 빠르게 막아내는 것도 중요한 요소 중 하나.
한치성 옆에 앉아있는 팀원들은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까.”
서진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관련 인원이 전부 착석하고 흑룡대장이 강평을 시작했다.
몬스터 웨이브를 막기 위해 편성했던 부대는 총 9개.
그중에 서진과 한치성이 지휘한 부대는 마지막 순서였다.
토벌 과정은 여러 위치에서 녹화를 해두었기에 회의실에선 다양한 의견이 오고 갔다.
“저 시점에서 폭탄을 터트리는 게 더 많은 몬스터를 죽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 정도는 그냥 후열부대 화력만으로 처리하고 방어선이 밀려날 위험이 있을 때 쓰는 게 낫죠.”
그렇게 일곱 부대에 대한 분석이 지나가고 이제 한치성 부대의 차례였다.
후계자라 해도 이 순간에는 냉철한 평가가 우선된다.
맹목적인 비난은 없을지라도 잘못된 판단에 대한 비판은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이것은 흑룡검가만의 전통이기도 했다.
그래야 다음 웨이브 때 사상자를 최대한 줄이면서 막아낼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로운 의견이 오가며 마지막으로 한치성이 막아낸 보스몬스터가 화면에 비췄다.
“A급 보스인 블러드 골렘이군요.”
“골렘이다보니 다소 시간은 걸린 것 외엔 흠잡을 것 없는 전투네요.”
“역시나 해외 던전 경험이 많다 보니 최선의 공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교보재로 삼아도 될 것 같아요.”
전투에 대한 칭찬이 연이어 쏟아졌다.
한치성 라인이 아니더라도 좋게 말할 수밖에 없는 공략이었다.
잠시 후, 한치성 부대에 대한 평가가 끝나고 드디어 서진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그때 한치성 팀원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레이놀즈 9계층장님은 8레벨이니까 막아내기 정말 편했겠습니다.”
“그래서 한서진 부대에는 마법사를 상당히 적게 편성했지 않나? 그만큼 다른 분대는 예전보다 마법사가 늘어났지. 그리고 저런 분을 끌어들이는 것도 능력이지.”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정보건의 대꾸에 팀원은 입을 다물었다.
서진의 부대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좋게 흘러갔다.
이계에서 몬스터를 이끌고 전쟁을 해본 적도 있던 서진이기에 지적받을 만한 빈틈은 없었다.
그렇게 평탄하게 지나가던 회의실 분위기는 보스 몬스터가 나온 순간 급변했다.
“저건 뭡니까.”
“드레이크라기엔 너무 큰데?”
“드래곤 아니요?”
의문을 쏟아대던 이들의 시선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고, 서진은 차분하게 답했다.
“드레이크 맞습니다.”
서진의 대답에도 그들은 쉬이 믿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사냥 장면을 보자 회의실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공격 패턴이나 모습을 계속 보니 드레이크는 맞긴 하네요. 그런데 저거 일반 드레이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예요.”
“마법도 잘 안 먹히는 저 괴물을 사상자 없이 잡아내다니 진짜 대단한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