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해츨링’급에서 ‘웜’급이 되었습니다]
[마나 간섭에 걸리는 시간이 줄어듭니다]
[이전보다 세밀한 마나 조절이 가능해집니다]
오랜 시간 동안 꿈쩍도 하지 않던 용체화의 등급이 올라갔다.
죽어라 검만 휘두를 땐 미동도 하지 않던 스킬이었는데.
마법의 종족인 드래곤과 연관이 있는 스킬이라 그런 건가.
서진의 스킬 중에 그나마 마법에 가까운 점멸은 엄밀히 말해 마법이 아닌 초능력.
그러니 손위에 발현된 라이트가 서진에겐 최초의 마법이었다.
“혹시나 보여줬는데 정말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
레이놀즈는 서진의 재능을 확인했지만 이 정도로 습득이 빠를 줄 몰랐다.
“이렇게 빨리 첫 마법을 시전한 것만으로도 마탑 내에선 한 손에 꼽힐 수준이네.”
물론 처음에 진도가 빠르다고 무조건 꽃길이 펼쳐지는 건 아니다.
초반에 남다른 두각을 보이는 인재야 생각보다 많기에.
레이놀즈가 놀란 이유는 서진이 검사라는 것 때문이었다.
20대 중반까지 검만 잡던 헌터가 이렇게 마법을 발동한 건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니.
“어쨌든 아주 좋은 신호네.”
서진의 재능이 레이놀즈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었다.
레이놀즈는 기대감에 다른 마법을 꺼내 보여주었다.
공용 마법에서 유일한 공격기인 매직미사일.
“어떤가. 이것도 가능하겠나?”
살상력을 띠기 때문에 라이트보다 더 높은 난이도의 마법이었다.
서진은 레이놀즈의 체내에서 마나가 어떻게 움직여서 나오는지 눈으로 확인했다.
“확실히 라이트보다 발동 방식이 복잡하군요.”
“이건 조금 어렵긴 하지.”
하지만 말이 끝나자마자 머리 위에 매직미사일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허허.”
레이놀즈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혹시나 해서 보여주었는데 이것까지 한순간에 익힐 줄이야.
‘나조차 공용 마법의 첫발을 떼는 데 보름가량이 걸렸거늘.’
이것만으로도 수재 소리를 들었는데 서진은 일주일, 아니 하루도 안 돼서 다 습득할 기세다.
미묘한 질투심마저 들 정도.
하지만 레이놀즈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허무감을 빠르게 씻어냈다.
8레벨까지 오면서 쌓아 올린 정신력은 그리 연약하지 않았으니까.
‘예전에 깨닫지 않았던가. 사람의 재능과 역할은 모두 다른 것이라고.’
비교를 시작하는 순간, 늪에 빠져들 뿐.
오히려 매우 기뻐할 일이었다.
이런 천재가 제자로 들어왔으니.
“계층장님?”
서진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레이놀즈.
“미안하네.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아닙니다. 그보다 다음 마법 보여주시죠. 기왕이면 실드가 좋겠습니다만”
서진은 마도현가 소가주와 싸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전격을 압축한 검으로 부수긴 했지만 꽤 애를 먹었었지.
실드를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쓴다면 반룡포가 뚫리는 빈도도 줄어들 터.
레이놀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훈련실로 가서 본격적으로 해보지. 매직 미사일도 만들기만 할 게 아니라 보내봐야 할 것 아닌가.”
마법의 명중은 발현보다 더 중요하다.
아무리 잘 만들어도 맞추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실제로 명중시키는 실력이 없어서 마법사를 그만두는 경우도 간혹 있을 정도니.
그만큼 원하는 목표물에 적중시키는 건 본격적인 공격 마법의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훈련실로 이동한 레이놀즈는 서진에게 전방을 가리켰다.
“여기선 마음껏 써도 되네.”
앞에는 원형이나 사람 모양의 과녁들이 늘어서 있었다.
레이놀즈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진은 매직미사일을 만들어 쏘아 보냈다.
콰앙!
[명중]
그리고 짧게 흘러나온 안내음.
레이놀즈는 안도와 감탄이 뒤섞인 헛웃음을 내었다.
혹시나 조준을 못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나 보다.
“처음 하는데도 깔끔하군. 그럼 이제 자네가 원하던 실드를 보여주지.”
완전한 구체형의 막이 레이놀즈를 감싸며 나타났다.
서진은 유심히 관찰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어렵진 않군요.”
서진도 금방 둥근 실드를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만족스러운 듯이 반투명한 막을 둘러보는 서진.
“자네, 어디 가서 이런 미친 재능이 있다는 걸 함부로 발설하지 말게. 마법사들에게 맞아 죽을지 모르니.”
레이놀즈의 진담 섞인 농담이었다.
“제가 그런 걸 떠벌리고 다닐 성격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행이네.”
그때 레이놀즈의 허리춤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폰의 화면을 들여다본 레이놀즈는 발을 떼며 말했다.
“여기서 연습하고 있게. 나는 잠깐 계층 업무가 있어서 처리하고 오겠네.”
“알겠습니다.”
**
“레이놀즈.”
복도를 걷던 중,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레이놀즈는 몸을 돌렸다.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8계층장인 칼렙이었다.
“무슨 일이지.”
오랜 경쟁 관계였기에 서로의 분위기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칼렙은 제자가 말했던 게 진짜인지 질문했다.
“듣자 하니 무슨 검가의 후계자를 데려왔다면서. 정말인가?”
“그런데.”
“허. 그런 놈은 뭐 하러 데려온 건가. 9계층장에 올라서니 마탑이 만만해졌나? 그런 무식한 집단의 후계자를.”
“칼렙.”
레이놀즈는 낮게 깔린 차가운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었다.
“자네가 어떤 그릇된 생각을 하며 살아가던 내 알 바 아니네. 하지만 내 제자를 모욕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칼렙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가 입을 열었다.
“뭐? 제자? 자네 제정신인가? 검 잡는 놈에게 마법을 가르치겠다고?”
“내가 누구를 제자로 삼든 자유지. 그리고 낮게 부르지 말라고 방금 말했을 텐데.”
“으하하하! 자유고 말고. 그래, 무시 안 할 테니 열심히 가르치게.”
칼렙은 조소를 흘리며 레이놀즈를 지나쳐갔다.
레이놀즈가 혹여나 어떤 수를 쓸까 걱정했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신경 쓸 가치가 없었군.’
**
하루가 지나고, 서진은 공용 마법을 마스터해버렸다.
마법 역사에 남을만한 속도였다.
“자네가 시작할 때부터 녹화를 비롯해 여러 증거를 기록해 두었으니 필요할 때 공개하든지 하게.”
“요즘 마법사들은 다 이렇게 성장 기록을 남깁니까?”
“당연하지. 기록이야말로 마법사에게 가장 큰 자산이네. 물론 자네 같은 타입은 안 해도 별 상관없어 보이긴 하지만.”
마법을 보자마자 습득해버리니 기록이 큰 의미가 없었다.
“어쨌든 축하하네. 하루 만에 걸음마를 뗐군.”
“이제 다음 단계는 원소 마법입니까?”
“그렇네.”
서진의 목적인 수 속성 마법을 배울 차례가 되었다.
“받게.”
레이놀즈는 개인 서고에서 가져온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물에 대한 1레벨 마법서네. 그보다 훨씬 두꺼운 책들도 많이 있지만 어차피 자네에겐 의미가 없을 테니. 그 책으로도 충분하겠지.”
서진에겐 마법의 탐구가 아니라 빠르게 성취를 올리는 것이 중요하니까.
비교적 얇은 마법서로 스킬창에 원소 마법이란 항목을 추가하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책 볼 필요 없이 보고 익히기만 하면 될 뿐.
“자네가 공용 마법을 빠르게 배우긴 했지만 원소 마법부턴 난이도가 상당히 올라갈 걸세.”
머리 좋다는 마법사들이 괜히 한 속성만 익히는 것이 아니었다.
주 속성에 부 속성을 추가로 다루는 마법사가 있긴 하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이중 속성은커녕 하나만 잘 익히기도 힘든 게 현실.
“그럼 가장 기초가 되는 마법부터 보여주겠네.”
레이놀즈는 영창 없이 허공에 물 덩어리를 생성했다.
축구공만 한 물은 느린 속도로 회전하면서 안정적으로 떠 있었다.
“모든 물 마법의 근간이 되는 ‘아쿠아’라고 하네. 자네라도 한번 보고 만드는 건 힘들 걸세. 원소 마법부턴 술식이 중요해지니까.”
확실히 이전과 달리 보는 것만으론 따라 할 수가 없었다.
술식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걸까.
마나를 어떻게 움직여야 저런 물이 나오는 거지?
서진이 다루는 번개는 검술에서 파생되어 자연적으로 나오는 힘이라 근본부터 다르게 느껴졌다.
레이놀즈의 마법 시연을 다시 확인한 서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빠트린 게 있는 것 같은데.’
서진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질문했다.
“계층장님은 방금 마법 쓸 때 술식을 떠올리셨습니까?”
“그렇진 않네. 고레벨 마법사들은 축약해서 발동하지. 어릴 때 머리 싸매며 풀었던 수학 문제를 나중엔 암산만으로 풀어내듯이.”
서진은 거기서 문제점을 발견했다.
공용 마법은 생략할 술식 자체가 없어 괜찮았지만 원소 마법은 다르니까.
오랜 습관으로 인해 서진 앞에서도 무의식적으로 과정을 생략해서 마법을 보여준 것이다.
서진이 이런 내용을 말하자 레이놀즈는 아차 싶은 얼굴로 말했다.
“이건 내 어처구니없는 실수구만. 그럼 이번엔 정석대로 발동해보겠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원소 마법을 느릿하게 보여줬다고 단번에 만들어낸다는 건.
하지만 웜급으로 올라간 용체화는 그것을 가능케 했다.
마나에 대한 서진의 통찰력이 높아진 덕분이었다.
‘저렇게 변환되어서 나오는 거구나.’
서진은 이해를 마쳤고, 곧바로 아쿠아 볼이 허공에 나타났다.
“세상에.”
옆에서 지켜보던 정소율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공용 마법을 하루 만에 배운 것보다 더 놀랄만한 일이었으니까.
서진은 무덤덤하게 다음 마법을 재촉했다.
“이거 재밌네요. 다른 것도 얼른 보고 싶어지는군요.”
“너 정체가 뭐냐. 혹시 말로만 듣던 드래곤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사람입니다.”
천 년 동안 살긴 했지만.
“후우, 그래. 일단 다음으로 넘어가지.”
**
그로부터 일주일 후.
서진은 1레벨의 수 속성 마법을 마스터하고 2레벨로 진입했다.
레이놀즈와 정소율은 더 이상 놀랄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마법 배우는 게 즐거워진 서진은 레이놀즈와 계속 같이 시간을 보냈지만 오늘은 미뤘던 계층 업무 때문에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정소율도 제자로서 할 일이 있었고.
서진은 어쩔 수 없이 휴식할 겸 마탑 내부를 천천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9계층을 둘러보고 8계층에 내려가자 붉은 로브를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네가 한서진이냐.”
“그런데?”
“말이 짧네. 네가 집에선 대접받을지 몰라도 여기선 새파란 신입인 걸 자각해야 할 거다.”
“그렇지만 당신에게 존대할 필요성을 느끼진 못하겠는데.”
나이도 많지 않은 녀석이 대뜸 반말을 해오는데 거기다 존댓말을 할 만큼 서진의 성격이 말랑하진 않았다.
“하. 마탑의 기본적인 에티켓조차 모른다니.”
“상대에게 예의를 강요하기 전에 누군지부터 밝히는 게 순서 아닌가?”
“8계층장 님의 제자인 미첼이다. 2주 뒤에 너와 대결할 상대이기도 하지.”
과연.
서진은 그가 왜 적개심을 보이는지 조금 이해했다.
“이런 것도 일일이 알려줘야 한다니. 하여간 검 쓰는 놈들은 무식해서...”
“그러다 지면 쪽팔려서 어쩌려고 그러지?”
“핫, 어처구니가 없군. 알아보니 6레벨까지 빠르게 올라갔다고 하던데, 마법은 그런 식으로 성장할 수가 없지. 일주일 배워보고 느꼈을 텐데 소감이 어때?”
실실 웃는 미첼 앞에서 서진은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이 되었기 때문에.
하지만 미첼은 그 침묵을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래, 만만하지가 않지? 나한테 패배하고 나면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는 걸 추천할게.”
“미첼.”
그때 서진의 맞은편에서 정소율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