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이건 말도 안 돼! 한 달 만에 원소 마법을 배우고 더블 캐스팅까지 한다고? 여태까지 이런 전례는 없었어!”
인정하기 힘들었던 칼렙은 절절하게 외쳤다.
“이건 분명 성취를 숨긴 겁니다.”
칼렙은 흉흉한 눈빛으로 서진을 보며 말했다.
“애초에 마법도 할 줄 알았지? 기회다 싶어서 작정하고 이번 기회에 드러낸 거고.”
“칼렙.”
분노를 주체 못 하는 칼렙을 마탑주가 나직하게 말렸다.
“마법사라면 이성을 되찾고 냉정하게 생각하고 말하게.”
“후우.”
칼렙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의 열기를 낮췄다.
“탑주님은 이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못할 건 또 뭔가.”
“진심으로 하신 말입니까?”
“자네 잊었나? 초대 마탑주님은 한 달 만에 2레벨을 달성하셨네.”
그 말에 칼렙은 복장이 더 터지는 것 같았다.
“아니 지금 저놈은 3레벨이잖습니까! 저놈 재능이 초대 마탑주를 능가한단 얘깁니까?”
“나타난 현상을 보면 그런 셈이지.”
“탑주님!!”
말이 안 통하는 기분에 칼렙은 소리쳤다.
물론 마탑주도 다른 의미로 답답한 건 마찬가지였다.
“하아, 칼렙. 자네야말로 왜 이러나. 마법사의 기본적인 자세를 완전히 망각한 건가? 아무리 믿기지 않는 일이라도 현실에 나타났으면 그것은 진실인 법이네. 나도 쉬이 믿기진 않아. 하지만 반박하려면 걸맞은 증거가 있어야 하지. 어린애처럼 떼를 쓴다고 될 일이 아니란 말일세.”
냉철한 탑주의 말에 칼렙은 입을 열지 못했다.
“레이놀즈는 서진이 마법을 배우기 전부터 3레벨까지 도달하는 모든 과정을 기록해놓았더군. 그걸 뒤집을만한 물증을 가져오면 자네의 말을 인정하겠네.”
“하, 하하하.”
칼렙은 털썩 주저앉아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탑주는 그를 안쓰럽게 보다 고개를 돌렸다.
“원로원장님, 부마탑주는 레이놀즈로 결정하겠습니다. 동의하시죠?”
“그렇네. 정말 예상치 못한 결과구먼.”
“그럼 레이놀즈, 사흘 뒤에 부마탑주 임명식을 할 테니 준비하고 있게.”
“알겠습니다. 탑주님.”
탑주의 시선은 레이놀즈에서 서진에게 옮겨갔다.
“한서진 마법사는 마탑주실로 한 번 와줄 수 있겠나?”
그에 레이놀즈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탑주를 쳐다봤다.
“탑주님, 무슨 용건이신지.”
현재 마탑주는 대지를 다루는 황위(黃位) 학파 소속.
그리고 외부 제자는 다른 학파로 옮겨갈 수 있을 정도로 운신이 자유로웠다.
탑주는 무언가 정곡을 찔린 듯 헛기침했다.
“커흠. 그냥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신성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그러네.”
그때 전위(電位) 학파의 7계층장이 나서며 노골적인 속내를 드러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학파가 제일 어울리지 않겠소. 뇌 속성을 잘 다룬다고 하니.”
“아니지. 검사의 근본은 예리한 공격 아닌가? 그렇다면 살상력에서 제일 앞서는 바람 마법이 어울리지.”
원로원에 밀려 조용히 있었던 계층장들이 본격적으로 서진을 꼬드기려 했다.
그들은 사막의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서진을 쳐다봤다.
흡사 좀비 같기도 하고.
그 모습에 서진은 조금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뒤에서 당기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정소율이 소매를 살포시 잡고 있었다.
“서진 님. 어서 가요.”
혹시나 다른 학파에 갈까 불안한 듯한 정소율의 손짓.
서진은 작게 웃으며 발을 뗐다.
“그러죠.”
서진이 움직이자 계층장들은 아쉬운 탄식을 냈다.
솔직히 서진도 다른 원소 마법이 탐나긴 했지만 마탑에서 벌써 한 달이나 지났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일단 돌아갈 시간이었다.
**
레이놀즈, 정소율과 작별 인사를 나눈 서진은 가문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오자마자 구현수 비서가 대형 소식을 들고 왔다.
“서진 님!”
구현수는 다급한 기색으로 서진을 찾아왔다.
“무슨 일입니까?”
“헌터협회장이 현재 혼수상태라고 합니다. 불과 십여 분 전에 알려진 사실입니다.”
“예?”
서진은 귀를 의심했다.
10레벨 헌터가 의식이 없는 상태라니.
그러고 보면 최근 협회장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는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곤 했던 협회장이었는데.
혹시 저번에 흑룡가주가 정상회담에 협회장 대신 갔던 것도 연관성이 있는 걸까.
“다른 정보는 없습니까?”
“예. 다만 협회의 분위기를 보고 한 가지 추측하자면 어제오늘 발생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전부터 의식이 불명이었지만 협회에서 이제야 공개한 거다?”
“아직은 확실치는 않습니다. 하지만 협회 측에서 상당히 기민한 대처를 보이고 있습니다. 공개될 걸 예상했다는 듯이.”
그렇다면 무언갈 숨기고 있는 건가.
서진은 여러 가능성을 떠올렸지만 현 상황에선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서진 님. 그리고 이틀 전에 천궁에서 알려줄 정보가 하나 생겼다는 연락이 왔었습니다.”
“그래요? 일단 백야에 다녀오겠습니다. 구 비서는 협회장 관련 소식들 계속 확인하세요.”
“알겠습니다.”
서진은 곧바로 천궁으로 향했다.
**
“오랜만이에요.”
이제는 눈에 익을 정도의 천궁 길드장실.
문선영도 서진을 맞이하는 게 익숙한 듯 다소 편한 기색으로 다가왔다.
“예. 그런데 오면서 느낀 거지만 백야 거리 분위기가 조금 어수선하더군요.”
“최근 자오 길드와 부딪히면서 국지적인 전투가 일어나기도 했거든요. 거기다 협회장님 소식도 한몫하고 있죠.”
“혹시 미리 알고 계셨습니까.”
“추측 정도만요. 확실치 않기도 했고 협회 건드려봤자 좋을 것도 없어서 가만히 있었죠. 그리고 저도 그 이상은 전혀 알지 못해요. ‘쓰러졌다’라는 것 외엔.”
추측이라 말했지만 서진에게 전달되는 뉘앙스는 달랐다.
확신하고 있던 게 틀림없다.
하지만 서진은 ‘왜 말하지 않았냐’ 같은 질문 따위를 꺼내지는 않았다.
그녀가 서진의 아랫사람도 아니고, 묻지도 않은 정보를 보고할 관계는 아니었기에.
서로가 그것을 인지하고 있으므로 대화는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어쨌든 협회장 덕분에 백야가 안정되었던 면도 있어서 술렁거리긴 해요. 자오 길드도 갈수록 과감하게 나오고 있고.”
“그런데 백야는 천궁이나 자오말고도 비슷한 급의 길드가 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백야는 크게 세 길드가 영역을 나눠 지배하고 있는 도시였으니까.
문선영은 듣자마자 골치 아프다는 듯 옅은 한숨을 쉬었다.
“거긴. 후우, 완전히 반응이 없어요. 길드장이 폐관 수련인가 뭔가 같잖은 걸 한다고 꿈쩍도 하지 않네요.”
여태까지 봐왔던 문선영치곤 왜인지 상당히 격한 반응이다.
“혹시 그쪽 길드장이랑 친하십니까?”
“친하긴요. 절대 아니랍니다.”
그녀는 정색하며 부정했지만 서진은 오히려 확신했다.
잘 알지 않고서는 저런 반응이 나올 리 없으니까.
문선영은 이 주제로 더 대화를 나누기 싫은지 말을 돌렸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제가 후계자님과 만나고 싶다고 한 이유는 이거 때문이에요.”
그녀는 폰을 탁자 위에 올려 녹음된 파일을 들려주었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리펠 길드에서...아, 죄송합니다.
-예, 물론입니다.
-협회장 교체되기 전에 정리하겠습니다.
재생 시간은 상당히 짧은 편이었다.
하지만 내용은 간단하지 않았다.
자오 길드장이 누군가의 명령을 받는다는 것과 협회장 교체를 언급하는 대답까지.
아직 정확한 실체를 알 순 없지만 핵심적인 내용이 담겨있었다.
“대단하군요.”
서진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은밀하게 적대 길드의 심처에 접근해서 길드장의 대화를 빼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녹음 시간이 짧죠. 조금 아쉽긴 해요. 재밌는 점은 리펠 길드를 알아봤는데 나오지 않는다는 거죠.”
“유령 길드?”
“그렇겠죠.”
국가에 창설 신고를 하지 않고 음지에서 움직이는 길드.
“백야에선 그런 길드가 꽤 있긴 하지만 여기엔 없었어요. 국내 다른 곳에 있거나 해외일 수도 있구요.”
“그런데 이 정보는 저와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요.”
“중요한 건 지금부터예요. 저 대화 이후에 못 보던 장비를 착용한 자오 길드 헌터들이 많아졌어요. 그래서 위험을 감수하고 한 번 더 잠입을 시도했고, 알아낸 게 있어요.”
역시나 천궁 길드.
정보 수집에 있어선 흑룡검가와 철혈백가를 능가하는 길드다웠다.
“최근에 늘어난 장비를 포함해 각종 치료제까지 리펠 길드의 지원을 받고 있더군요. 그중엔 마광병 신약도 있었어요.”
자오 길드장의 아내가 마광병을 앓고 있다는 건 알만한 사람은 아는 사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신약? 단순한 항마제가 아니란 말입니까?.”
“자세한 건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취급하고 있었어요.”
서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련의 사건과 정보를 취합하면 흐릿한 밑그림이 보일 것 같은 감각.
“후계자님이 저에게 준 서류 말이에요.”
문선영은 눈빛이 깊어진 서진에게 갑자기 다른 얘기를 꺼냈다.
하지만 서진은 중요한 얘기라는 직감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흑마법사 게일러가 혼자 활동하는 게 아니라 어느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게 느껴지잖아요?”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서진이 보기에도 정황상 확실했다.
“그리고 그 게일러와 연관 있는 자오길드가 유령 길드의 지원을 받고 있죠.”
“혹시 협회장 사건이 불명의 집단과 관계가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그럴 확률이 있다는 말이죠. 협회장이 아끼는 손녀도 마광병을 앓고 있는 걸 생각하면 과연 우연일까 생각이 들기 마련이죠.”
파편처럼 흩어진 정보를 모으고 현재 나타난 사건을 겹치자 어렴풋이 감이 잡힌다.
어쩌면 한 집단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는 의구심.
서진은 눈을 감으며 침잠했다.
이런 사건들이 계속 진행된다면 끝은 어디일까.
목적은 무엇이고.
무엇 하나 선명하게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서진은 잠자코 있을 생각은 없었다.
가만히 넋 놓고 있다간 늦는다.
관계없어 보였던 일이 연결되어 있듯이, 언제 서진과 이어질지 모르기에 안심할 수 없다.
아니 사실 이미 반쯤 걸쳐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게일러의 제자 두 명을 죽이고 연구소를 파괴하며 적륜성까지 무너트렸으니까.
9레벨의 흑마법사가 구축했던 인프라를 서진이 박살 내버린 것이다.
‘우선 협회장 사건을 자세히 알아봐야겠군.’
서진의 눈꺼풀이 올라가고 의지를 담은 눈빛이 문선영에게 전달되었다.
“방관할 생각은 없으신 듯하니 다행이네요.”
문선영은 서진이 혹여나 그런 결론을 도출해내지 못했을 경우엔 직접 말해줄 생각이었다.
단순히 서진의 위험뿐만 아니라 천궁도 엮인 일이었으니까.
“그러니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천궁은 서진에게 계속 정보를 제공할 수밖에 없다.
현재로선 한배를 탄 셈이니.
**
가문에 돌아온 서진은 구현수 비서를 불렀다.
“협회장에 대해 업데이트된 소식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만 협회 직원들도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들도 몰랐던 것 같습니다.”
문선영과 얘기를 나누고 온 서진은 예상했던 보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천궁이 자오 길드 조사 때문에 여력이 없었다곤 해도 협회장에 대한 다른 정보는 모른다고 했을 정도니.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기다릴 생각은 없다.
멀리서 알 수 없다면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