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엘릭서가 담긴 병을 잡은 서진의 손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처음 마시는 거라 몸이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기에.
그렇지만 낫게 해줄 거라 확신하는 이유는 있었다.
7성주 중의 하나, 뱀파이어 로드가 고룡에게 당한 ‘심장 쇠약’이란 고유 마법을 말끔하게 치유한 채로 모습을 드러낸 걸 두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에이션트급 드래곤의 고유 마법은 자연의 이치와 같은 격을 지닌다.
마광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족쇄.
그걸 엘릭서로 씻어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거기다 체내의 마나를 증가시켜주는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이제 검술뿐만 아니라 마법도 배우는 바람에 최근 부쩍 마나의 부족함을 느낀 참이다.
이렇듯 서진에게 필요한 마광병 치료와 마나 증진을 단번에 해소하게 되는 것이다.
서진은 차분하게 마음을 다스리며 엘릭서를 마시기 시작했다.
정신을 고양하는 향이 후각을 자극하고 청량하며 따듯한 기운이 목을 축이며 식도로 넘어간다.
효과는 환 종류의 영약보다 빠르게 나타났다.
체내에 스며든 엘릭서는 가장 시급한 문제부터 처리하겠다는 듯 오염된 마나를 먼저 건드렸다.
‘큭.’
오랫동안 서진의 몸에 뿌리내린 마나는 낯선 기운에 반발하며 부담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엘릭서는 통증마저 완화시키며 오염을 제거해 나갔다.
서진이 그간 극도의 운용력으로 마나를 제어했음에도 몸 곳곳에 침식된 흔적이 산적해 있었다.
영약으로 두 차례 정화했는데도 이 정도니.
만약 중간에 영약을 복용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마인이 되었겠지.
현재 서진의 마광병 진행도는 22.3%
분명 7%로 낮춘 지 엊그제 같았는데 금세 이렇게 치솟아 버렸다.
갈수록 진행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영약으로 상태를 되돌리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거겠지.
그러나 이런 걱정도 이제 끝이다.
엘릭서가 몸속을 누비며 침식된 마나를 씻어내리고 있었으니까.
희대의 영약이라고 불리는 엘릭서답게 전에 먹었던 대환단보다 훨씬 기운의 운용이 편하고 부드러웠다.
몸에 가해지는 부담을 최대한 줄이면서 독소를 내보내는 느낌.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영약과 차원이 다른 감각이었다.
엘릭서의 기운이 퍼져 나갈수록 서진의 몸에선 지독한 노폐물이 쏟아져 나왔다.
오죽하면 설하윤도 슬며시 후각을 차단할 정도.
하지만 그만큼 서진은 깊은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마광병 진행도가 떨어지는 게 보였으니까.
몸이 점점 가뿐해지는 느낌과 함께 축적되었던 오염은 제거되는 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상태이상 ‘마광병’이 사라졌습니다]
시스템 창의 알림대로 그간 서진을 갉아먹던 병은 말끔하게 치유되었다.
몸이 잠식되며 늘어가던 이물감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구로 돌아온 뒤로 처음 맛보는 감각.
하지만 엘릭서의 효과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광병을 없애고 남은 엘릭서의 기운은 마나 경로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침식으로 인해 약해져 있던 경로가 탄탄해지며 이전보다 더욱더 빠른 운용이 가능해지게끔 탈바꿈했다.
[스킬 발동 속도가 빨라집니다]
[마나 출력량이 증가합니다]
그야말로 마나를 위한 육체로 재구성되고 있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이리저리 휘젓던 기운은 이제 단전으로 모여들며 서진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마나가 대폭 증가합니다]
[마나 감응력이 상승합니다]
[독에 대한 저항력이 상승합니다]
[독 내성(Lv.8)이 되었습니다]
[마력이 50 상승합니다]
[지력이 30 상승합니다]
[Lv.7이 되었습니다]
서진은 일단 알림창을 전부 치우고 눈을 감으며 천천히 마나를 움직였다.
의지에 따라 즉각적으로 세차게 흐르는 마나.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청명한 마나와 출력 속도였다.
‘만족스러워.’
그뿐만 아니라 서진의 마나는 엘릭서의 정화의 기운까지 받아들인 상태.
마나 자체가 힐러들이 발현하는 치유 스킬과 성질이 비슷해진 것이다.
타인의 마나에 간섭이 가능한 서진이기에 새로운 활용성이 열린 셈이었다.
“서진 님.”
서진은 뒤늦게 설하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아. 하윤 씨, 냄새 때문에 고역이었을 텐데 자리를 지켜줘서 감사해요. 덕분에 마광병은 아예 없어졌어요.”
“정말입니까?”
설하윤은 자기 일처럼 기쁜 듯이 환한 미소를 보였다.
“하아, 정말 축하드립니다. 서진 님.”
“고마워요. 그보다 지금 방 꼴이 말이 아니니 일단 가보세요. 나중에 다시 얘기를 나누죠.”
방에선 갈수록 지독한 냄새가 짙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설하윤은 흑발을 찰랑이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저도 같이 치우면...”
“아뇨. 전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서진은 반강제로 설하윤을 쫓아냈다.
성화에 못 이긴 설하윤이 떠나고 서진은 오랜만에 상태창을 열었다.
❴한서진❵
【레벨】7
【특성】투신전(2/3) 독 내성(Lv.8)
【스텟】근력690 체력684 민첩696
마력753 지력728
【스킬】흑룡검술(7성) 투신공(7성) 점멸(6성) 용체화(웜) 공용마법(Lv.3) 원소마법(Lv.3)
‘드디어 7레벨.’
중급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고레벨에 속하는 경지.
이제 마광병도 없으니 내키는 대로 마나를 마음껏 끌어다 쓸 생각이었다.
덕분에 마법을 배우는데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공용마법은 기초단계는 마스터한 상태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다.
원소마법은 더욱더 그렇고.
그런데도 다른 속성이 눈에 아른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우선 수 속성부터 제대로 익히면서 전격 속성과 연계하는 방법을 연습하는 게 우선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배우긴 했지만 서진의 성장 방식은 스승이 없다면 나아가기가 힘들다.
‘조만간 마탑에 찾아가든지 부르든지 해야겠네.’
그리고 상태창에서 가장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이 제일 위에 있었다.
레벨이 오름으로서 투신전에 가신을 한 명 더 영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누굴 넣지?’
몇 개월 만에 미친 듯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건 투신공과 투신전 덕분이다.
사실 비정상적인 성장에 대해 헌터 학계에선 서진을 분석 대상으로 삼은 학자도 있을 정도였다.
서진을 취재하거나 샘플을 채취하기 위해 가문 앞까지 무작정 찾아왔다가 쫓겨나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해외에서도 꾸준하게 서진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하니.
흑룡검가의 후계자니까 귀찮은 일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거지 아니었다면 상당히 짜증 났으리라.
아마 7레벨로 올라간 게 공개되면 더욱 극성으로 달려들겠지.
‘끔찍하군.’
어쨌거나 투신전의 중요성이 그만큼 높으니 가신을 잘 골라야 했다.
설하윤과 백화연까진 아주 성공적인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기왕이면 7레벨 이상이면 좋겠는데.
서진의 주변에 7레벨 이상의 헌터라 하면 흑룡가주와 흑룡대장, 레이놀즈 정도.
애초에 고레벨 헌터 자체가 적다 보니 선택지도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저 셋이 가신 제안을 받을 것 같진 않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가능성이 매우 옅었기에 서진은 세 명은 고려 대상에서 뺐다.
빨리 가신을 추가하면 좋은데 마땅한 헌터가 없으니 이번엔 살펴보면서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단번에 해결할 문제는 아닌 듯하니까.
**
다음날, 서진은 미뤘던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정보를 제공해주었던 천궁부터.
서진은 리펠길드에서 얻었던 자료를 공유해주었다.
천궁이 아니었다면 찾아서 습격할 수 없었을 테니.
거기다 서진이 얻은 정보를 토대로 미처 몰랐던 연결점이나 새로운 정보를 창출해낼 수 있는 능력이 천궁엔 차고 넘쳤다.
문선영은 습격 당시의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지만 서진은 급한 일이 있어 다음으로 미뤘다.
그리고 제주도와 시애틀에 대신 가주었던 성주원과 레이놀즈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런 서진의 행보와 별개로 한국의 정세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서진이 리펠 길드라는 보급 기지를 망쳐놓았지만 협회장의 상태는 여전했기에.
흉수는 여전히 누군지도 모르며 목적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서진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정체는 조만간 드러날 테니까.’
이번 일은 리펠 길드라는 꼬리만 자른 게 아니었다.
그들에게 제일 중요한 엘릭서를 훔쳤으니 어떻게든 복수하려고 혈안이 되어있을 터.
굳이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상대는 알아서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있다.
물론 만만한 녀석은 아닐 테니 준비하고 있어야겠지만.
마관청에서도 이번 일을 파악했는지 만나서 얘기를 나누길 원했지만 서진은 먼저 가야 할 곳이 있었다.
바로 이곳, 두 번째로 방문하게 된 협회장의 자택.
사건의 흐름을 거슬러 짚어보면 임유나에게서 비롯되어 리펠 길드가 수면 위로 올라온 셈이다.
결과적으로 서진은 엘릭서를 얻게 되었지만 임유나가 계속 눈에 밟혔다.
그래서 한 번 시도해보러 가는 것이었다.
정화의 기운을 품게 된 마나라면 임유나의 병세를 완화시켜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부채감인가.’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는 서진도 헷갈렸다.
주차를 한 서진은 마당으로 올라가서 집사와 인사를 나누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
“하아, 썩을.”
한치성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평소 무기를 아끼던 그가 아무렇게나 내팽개칠 만큼 현재 정신이 흐트러졌다는 증거였다.
그걸로도 부족한지 한치성은 답답하게 몸을 옥죄는 갑옷도 거칠게 풀어헤쳤다.
“진정 좀 하지?”
맑은 목소리의 여성이 차분하게 한치성을 달랬다.
눈에 띄는 금빛의 머리칼이 바람에 어지러이 휘날렸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으며 바위에 걸터앉았다.
“안 되는 거 억지로 하지 말고 포기하는 게 어때.”
“뭐?”
한치성은 듣자마자 표정을 구겼다.
“쓸만한 아티팩트가 있는 거 뻔히 알면서 포기하라고? 절대 안 돼.”
“포기 안 하면, 마땅한 방법은 있어? 다섯 번이나 공략했는데 실패한 던전은 버리는 게 맞아. 아티팩트 때문에 부하들 목숨까지 버릴 거야?”
그녀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레이나의 얘기를 받아들이는 게 현명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한치성의 승부욕과 자존심은 아까운 던전을 쉽게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 던전의 독만 버틸 수 있으면.’
특수 방독면을 비롯해 온갖 아이템을 착용하고 도전해봤지만 전부 무용지물이었다.
뭘 쓰든 간에 푸르스름한 독이 몸 안으로 침투해왔으니까.
여태껏 익혀왔던 대처 방법들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여전히 한치성이 포기할 기미가 없어 보이자 레이나는 머리를 묶으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난 이번 던전 더 이상 참가 안 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그리고 오기 전에 약속했던 조건 기한까지 이제 5개월 남은 거 알지?”
일방적으로 통보한 레이나는 등을 보이며 멀어졌다.
“하.”
짧은 한숨을 내쉬는 한치성에게 그의 팀원 중 한 명이 다가왔다.
“팀장님.”
“왜.”
“그냥 포기하기가 그러시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뭔데, 말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