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그 던전을 한서진에게 넘기는 겁니다.”
동료의 말을 들은 다른 팀원은 숨을 들이켜며 기겁했다.
둘째 도련님이 한서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서 저딴 망발을 지껄인단 말인가.
가뜩이나 공략이 안 돼서 예민한 상태인데 거기다 기름을 붓다니.
팀원들은 이제 곧 싸늘하게 화를 낼 한치성을 예상하며 눈치를 봤지만 의외로 잠잠했다.
“넘긴다라.”
한치성이 신경 쓰던 부분을 정확하게 짚은 조언이었다.
후계자라는 위치는 던전의 공략 여부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어떤 던전을 공략해왔고 실패한 던전이 있다면 손해는 어느 정도로 입었는지.
모든 요소가 지휘력을 가늠하는 척도다.
그런 점에서 던전 하나를 포기해 버리는 건 부정적 평가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가문에 복귀하고 이미지를 쌓아가는 시점이라 특히 좋지 않았다.
반면 한서진은 실패한 던전이 없으니 더욱 비교될 터.
하지만 이번 던전을 떠넘겨서 한서진이 실패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한서진의 커리어에 흠집이 나는 것은 물론 자신의 공략 실패를 덮을 수 있게 된다.
“좋은 아이디어야.”
그럴듯한 명분도 있다.
다른 가문이나 길드에 공략권을 넘기는 것보단 흑룡검가에서 끝내는 게 좋으니까.
“그럼 한번 얼굴 보러 가봐야겠어.”
한치성은 입매를 비틀며 일어났다.
**
“안녕하세요.”
다시 만난 임유나는 저번보다 초췌해 보였다.
부작용이 있긴 해도 효과는 있었던 약을 먹지 않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이미 진행이 많이 되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예전의 서진처럼 마광병이 심해지면 날카로워지기도 하지만 힘이 빠지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침대에 위에서 상체만 일으킨 임유나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입을 열었다.
“이번엔 무슨 일로...?”
서진은 잠시 나가 달라는 눈빛으로 집사를 바라보았다.
일전에 과도한 걱정을 보였던 집사는 이번엔 별말하지 않고 방을 나가며 문을 닫았다.
“서진 씨?”
갸웃거리는 임유나에게 서진은 천천히 다가갔다.
“저번에 유나 씨가 말해주신 단서. 도움이 됐습니다.”
“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배시시 웃던 그녀는 궁금한 게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가보니 어떠셨어요?”
서진은 리펠 길드 앞에 도착한 순간부터 습격을 마무리한 것까지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엘릭서를 발견한 얘기는 제외한 채.
말솜씨가 그리 없는 서진의 설명에도 임유나는 눈을 빛내며 경청했다.
그러던 중, 그녀는 눈치를 보듯 힐긋거리다 조심스레 말했다.
“그런데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네.”
“서진 씨도 저와 같은 병인데 어떻게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는 건가요? 사실 전부터 너무 궁금했어요.”
“제 능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
떨리는 목소리로 흘러나온 작은 탄식.
짧은 한마디로도 그녀가 품고 있던 희망이 사그라들었다는 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서진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치유라는 가능성에 불씨를 붙이기 위해 왔으니까.
“혹시 지금 마광병 진행도가 몇입니까?”
“56퍼센트예요. 그런데 그건 왜...”
서진은 대답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저번처럼 등에 손을 올려 봐도 괜찮겠습니까?”
“네?”
임유나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농담이나 수작 부린다고 생각하기엔 서진의 눈빛과 태도, 분위기가 너무나 진지했다.
그녀는 얼떨떨한 기색으로 허락하며 등을 보였다.
사실 저번에 서진의 마나 경로를 바로잡아주었던 감각이 기분 좋게 남았던 영향도 컸다.
그때 이후로 잠깐 기력을 회복했었으니까.
‘흐음.’
서진은 짧게 심호흡하며 손을 올렸다.
할 수 있을 거란 직감은 들었지만 가능한 일인지 실제로 확인하는 순간이라 긴장되었다.
정순하고 맑은 서진의 마나가 손을 타고 임유나의 체내로 주입되기 시작했다.
정화의 기운을 가진 마나가 파고들자 곧바로 반발이 일어났다.
용체화 상태의 서진은 능숙하게 오염된 마나를 짓누르며 깊게 퍼트려 나갔다.
‘될 것 같네.’
마나의 정화력이 생각보다 강해서 일부 침식된 경로를 원상태로 되돌리는 게 가능해 보였다.
서진은 눈을 감고 본격적으로 마나를 쏟아부으며 임유나의 체내를 휘저었다.
그리고 십 분 정도가 흐르고.
“하아.”
서진은 작은 숨소리와 함께 마나를 거두었다.
계속 이어가기엔 마나도 부족하며 역량의 한계이기도 했다.
여기서 침식을 더 제거하려면 용체화가 웜급에서 에이션트급으로 올라서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어?”
상태창에서 마광병 진행도가 12%까지 낮아진 걸 확인한 임유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떻게 하신 거예요?”
몸 상태만 조금 좋게 만들어주려나 보다 싶었는데 상상도 하지 못한 결과가 눈앞에 있었다.
분명 너무나 기쁜 일이지만 상식이 뒤흔들리는 충격에 임유나는 말문이 막혔다.
마광병의 진행을 임의대로 낮추는 게 가능한 일이었던가.
“아까 서진 씨가 말씀하셨던 능력이 이걸 가리켰던 건가요?”
서진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엘릭서 덕분이니까.
임유나는 그런 서진의 침묵을 다르게 받아들이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못 들은 거로 해주세요.”
치료해주었는데 감사는 못 할망정 캐묻기나 하다니.
임유나는 스스로 질책하면서 머리를 숙였다.
“정말 감사드려요. 아직 잘 현실감이 안 느껴져서 혼란스럽긴 한데 이 은혜는 평생 갚을게요. 물론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요.”
임유나는 옅게 웃다가 이내 어깨를 늘어트렸다.
“협회장인 할아버지의 손녀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힘이 없는 몸이지만 제게 원하는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뭐든지 할게요.”
“네.”
서진은 그녀에게 빚을 씌우기 온 것이 아니기에 뭔갈 부탁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임유나의 강렬한 의지가 담긴 눈빛에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일은 끝났으니 이만 가겠습니다.”
임유나는 의자에서 일어나는 서진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볼 말이 있었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왜 자신을 치료해주러 온 건지.
‘성역의 세리아’같은 특이 케이스가 아닌 이상 헌터들은 기본적으로 능력을 쉽게 베풀지 않는다.
특히나 희소한 가치를 지닌 스킬일수록 심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서진은 아무런 용건 없이 오직 치료만을 위해 방문한 것처럼 보였다.
사실 ‘성역의 세리아’와 성향이 비슷한 걸까.
잠시 가정해 봤지만 역시나 말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봐왔던 서진은 대책 없이 퍼주는 스타일은 결코 아니었으니까.
‘그럼 도대체 왜?’
물론 이런 질문 자체가 서진을 곤란하게 할 수 있으니 직접 물어볼 순 없었다.
그렇지만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는 법.
속으로 열심히 생각하는 거야 그에게 민폐가 안될 테니.
그러나 임유나가 알지 못하는 게 있었다.
서진이 이미 그녀의 생각을 눈치챘다는 것을.
말만 안 했을 뿐이지 눈과 표정, 태도로 뭘 궁금해하는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숨기는 걸 잘 못 하는 성격임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서진은 모른척하며 얼른 협회장의 저택을 나왔다.
혹시나 그녀가 뒤늦게 마음을 바꿔 입을 열어버리기 전에.
서진도 아직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으니까.
‘조금 위선적인 건가.’
짧게 고민해보지만 해답 없는 잡념만이 떠돌 뿐이었다.
**
카앙!
흑룡검가의 직계전용 수련장.
서로의 검이 부딪히는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래간만에 서진은 설하윤과 검을 맞대는 중이었다.
시간이 흐른 만큼 대련도 다른 양상을 보였다.
물이 치솟으며 설하윤의 시야를 가리는 사이 서진의 검이 찔러 들어왔다.
가까스로 막아낸 그녀는 보이지 않는 검으로 서진의 측면을 노렸다.
콰앙.
허점을 찌른 절묘한 일검이었지만 즉시 발동된 실드에 막혔다.
설하윤은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검에 마나를 무겁게 실었다.
검명이 울림과 동시에 내려친 검격.
이번엔 서진도 같은 검으로 받아쳤다.
아직 마법 레벨이 높지 않아 설하윤의 저런 매서운 검을 막기엔 무리였으니까.
찰나에 공수가 오가고 다시 한번 물이 설하윤을 덮쳐왔다.
“읏.”
살상력이 하나도 없는 흙탕물이지만 설하윤의 신경을 상당히 거슬리게 했다.
시야도 가릴뿐더러 물에 젖으면 전격에 의한 피해가 더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도 만만치 않은 실력을 지닌 검사.
서진이 마법을 쓸 때 검의 영역에 빈틈 생긴다는 걸 간파하고 즉시 파고들었다.
카각!
서진은 경지에 도달한 반응 속도로 그녀의 검을 막았다.
그리고 맞대고 있는 검을 통해 전격이 전달되었다.
파직!
“윽.”
물론 가벼운 대련이니까 찌릿할 정도로만.
“이쯤에서 잠시 쉬죠.”
“하아, 네.”
설하윤은 숨을 내뱉으며 물끄러미 검을 보다가 말했다.
“서진 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서진은 오전에 설하윤을 데리고 가문의 비고에 다녀왔었다.
한동안 신경 써주지 못했던 설하윤에게 검부터 신발까지 전부 선물해주었다.
환영신과 적륜성을 거치면서 서진 소유의 아이템이 많아진 덕분이기도 했다.
“감사하긴요. 뒤늦게 챙겨준 것뿐인데.”
그때 구현수 비서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진 님, 가주님께서 부르십니다.
또 무슨 일인 걸까.
“하윤 씨는 먼저 가 있으세요. 전 가주실로 가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가주실에 곧장 도착하니 먼저 와있던 한치성이 묘한 눈초리로 서진을 바라봤다.
한벽호는 둘을 보는 게 재밌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형석아. 설명해주거라.”
“예.”
김형석 비서는 서진에게 말했다.
“최근 한치성 도련님이 머드 골렘 던전을 공략하고 있었다는 것. 알고 계셨습니까?”
“그랬던가요.”
얼핏 얘기는 들었지만 자세한 소식은 귀담아듣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공략에 난항을 겪는 바람에 불가피하게 포기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서진은 한치성의 기색을 확인했다.
집요한 면이 있는 저 녀석이 쉽게 포기할 리가 없을 텐데.
“그리고 공략 권한을 한서진 도련님께 이양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과연.
서진은 한치성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눈치챘다.
자신이 공략을 못 했으니 한서진도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술책.
선뜻 양보한다는 명분까지 챙길 수 있으니 일석이조이기도 하다.
“공략 대기 중인 머드 골렘 던전엔 아티팩트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한서진 도련님이 거절한다면 흑룡대로 넘어가게 됩니다.”
서진은 거절해도 크게 상관없었다.
물론 공략 성공할 자신이 없어서 피했다는 말은 조금 나돌겠지만 흘러 넘기면 될 일이다.
다만 그동안 아티팩트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서진에겐 탐낼만한 던전이기도 했다.
“던전 내부 정보는?”
서진의 말에 김형석 비서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건네주었다.
빠르게 훑어본 서진은 한치성이 뭐 때문에 공략을 못 한 건지 알아챘다.
‘고생 좀 했겠네.’
왜 자신 있게 떠넘기려 한 건지 이해되었다.
물론 독 내성이 8레벨인 서진에겐 아무렇지도 않지만.
서진이 베놈 스콜피온의 내단을 흡수했다는 건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 모르는 상태.
‘그래서 착각하고 있는 건가.’
어찌 됐든 서진에겐 좋은 일이었다.
아티팩트가 있는 던전을 준다고 하니 받아야지.
“하겠습니다. 공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