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러시아 극동부에 위치한 사하 공화국의 수도.
야쿠츠크에서 얇은 코트를 걸친 한 명의 동양인과 수행원으로 보이는 자가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검은 코트를 입은 노인은 한국에서 유일한 10레벨인 만큼 주변에서 알아볼 법도 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주는 이가 없었다.
그의 얼굴이 유명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기척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게 그 저택이군.”
한벽호는 반쯤 뜬 눈으로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담벼락과 그 너머에 있는 저택을 바라봤다.
보고서에서 봤던 사진과 정확히 일치하는 모습.
이틀 전, 서진은 가주실에서 알렉세이에게 얻은 정보를 얘기해주었다.
그 내용은 한벽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이계와 인간이 아닌 지성체의 존재.
던전에서 몬스터가 전술적으로 움직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 하니.
선뜻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충분히 있을법했다.
설명 불가능한 상태창과 던전도 있는데 다른 세계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한벽호는 그런 피상적인 이해를 넘어 보다 실체에 접근한 상태에서 이계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인간이란 종 자체를 초월해 인과율의 간섭에 저항할 수 있는 10레벨.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법칙들을 뛰어넘어 새로운 영역을 확립한 경지이기에 타 차원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10레벨의 심상은 시공간의 제약을 뚫어낸다.
‘흥미롭군.’
여태까지 던전에서 나오던 몬스터가 다른 세계에서 왔던 것이었다니.
‘몬스터는 도대체 왜 나타나며 어디서 오고 있는 것인가.’
이 질문은 과거부터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희대의 난제였다.
관련 논문은 수도 없이 쏟아졌지만 누구도 명쾌하게 설명하진 못했다.
한벽호도 종종 의문을 품곤 했으나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이계라...”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당시 서진의 눈빛에 담긴 감정.
그 미묘한 눈빛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한벽호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물론 이 모든 추측이 부질없는 가설일 수도 있겠지만 이미 한벽호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은 뒤였다.
이젠 감정이 다 닳아서 없어진 줄 알았거늘.
육신이 이리 늙어도 새로운 세계는 가슴에 동요를 일으킨다.
서진은 그리 자세하게 말해주진 않았다.
그저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괴물이 발을 딛으려 한다는 것뿐.
어찌 됐든 자신보다 강하다니 어찌 흥미가 안 생기겠는가.
그리고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다.
사람이 살아가는 지구에서 몬스터 따위에게 주도권을 내어줄 수는 없는 노릇.
던전이 처음 생겨났을 때 몬스터에게 살아가는 터전을 잃을 뻔했다가 겨우 되찾지 않았던가.
어렵게 안정시켰으니 어떻게든 지켜야만 한다.
‘리치라고 했었지.’
한벽호가 드물게 직접 행차한 이유는 사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거슬리긴 해도 협회장이 그 꼴이 되었으니 같은 10레벨로서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었다.
마음속 이면엔 리치를 한번 상대해보고 싶기도 하지만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
좋은 가주 소리를 듣진 못할망정 적어도 해를 끼친 말아야 할 테니.
“가주님?”
우두커니 한벽호가 가만히 서 있자 김형석이 작게 입을 열었다.
“아니야. 가지.”
산들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걸어가던 한벽호는 이내 멈춰 섰다.
‘음?’
건물 내부에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벽호는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서 기감을 확대했다.
넓은 부지 위에 세워진 거대한 저택을 한 번에 휘감으며 생명 반응을 확인한다.
“사람은커녕 쥐새끼도 없군.”
하지만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가득했다.
여기저기 열어 젖혀진 문과 어수선하게 떨어진 물건들.
급하게 비웠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 찾아올 걸 눈치채고 사라진 게 분명했다.
서진이 알렉세이를 생포하고 정보를 얻은 뒤 자신이 여기에 오기까지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사이에 결단을 내리고 은신처를 버리다니.
비상한 판단력과 실행력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기 동생이 죽은 것도 짐작하고 있겠지.
“얻을 것은 없나. 이만 가지.”
한벽호가 미련 없이 등을 돌리려 할 때 누군가의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그건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한벽호가 기척을 차단한 공간을 뚫고 존재감을 드러내다니.
발소리의 주인도 최소한 초월적 강함을 지녔다는 의미.
고개를 돌리자 선글라스를 쓴 백발의 중년이 담배를 꼬나물고 있었다.
러시아를 떠받치고 있는 다섯 기둥 중의 한 명인 9레벨 권각사, 세르게이.
마침 야쿠츠크에서 머물고 있던 그는 한벽호가 기감을 펼친 순간,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었다.
“한국의 흑룡이 여긴 웬일이신가.”
“그걸 내가 말해줘야 하는가?”
“10레벨 헌터가 남의 나라에 불쑥 들어오면 매너가 아니지 않소.”
“내가 들어오는 게 싫으면 집안 단속부터 하는 걸 추천하겠네.”
“뭐요?”
세르게이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흘려들을 순 없었다.
조금 전, 흑룡가주가 적색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저택을 보는 눈빛이 심상찮았기에.
한벽호는 몸을 돌리며 김형석에게 말했다.
“러시아 경치는 잘 구경했으니 이만 돌아가지.”
“예.”
한벽호가 홀연히 사라지고 나서 세르게이는 저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촤악!
돌바닥에서 치솟은 물줄기가 순식간에 정소율을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그녀가 만들어낸 두터운 수벽에 부딪히며 일그러진다.
뜨거운 햇빛을 받은 물이 빛을 발하며 사방에 흩뿌려졌다.
그대로 떨어질 것 같던 물방울들은 공중에 정지하더니 총알처럼 서진에게 발사되었다.
‘실드.’
콰과강!
3중첩된 장막에 물로 된 탄환이 막혀 힘을 잃는다.
실드 안에서 다음 마법을 시전하려는데 수벽 뒤에 있어야 할 정소율이 보이지 않는다.
마법을 위한 대련이지만 불가피하게 검사로서의 기감이 그녀의 위치를 잡아냈다.
오른쪽으로 몸을 틀자 블링크로 이동한 정소율이 거센 파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실드도 소용없을 거란 듯이 공간을 휩쓸어버릴 기세의 물살이 덮쳐온다.
서진은 아쿠아 웨이브를 흘려보내기 위해 반구형의 베리어를 둘렀다.
밀려들어온 파도는 둥근 면적에 힘이 분산되며 옆으로 갈렸다.
그렇게 허무하게 흘러가 버리나 싶었던 물살의 움직임이 급변했다.
서진의 베리어를 둘러싸며 급류를 만들어내더니 세차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거센 소용돌이에 서진이 갇혀버린 것이다.
그만큼 정소율의 마법 운용이 능숙하다는 증거.
이대로라면 서진은 베리어를 잃고 와류에 몸이 휩쓸리게 될 터.
오로지 마법만을 활용하는 대련이기에 검은 두고 온 상태.
이때 서진은 콜롬비아에서 정소율이 베리어를 확장해 아쿠아 볼트를 난사했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다른 형태로도 변환할 수 있지 않을까.
서진은 베리어에 솟아난 칼날을 떠올리며 마나를 끌어냈다.
마법은 술사의 역량에 따라 심상 속 이미지를 현실에 구현할 수 있는 것이 특징.
정소율이 만든 와류에 점점 얇아지던 베리어에서 수십 개의 칼날이 생겨나 회전하기 시작했다.
콰가가가!
그러자 이제 역으로 소용돌이가 갈려 나가며 비틀거렸다.
소용돌이의 아랫부분이 약해지자 균형을 상실한 마법은 비가 되어 떨어져 내린다.
서진이 만족스럽게 베리어를 해제하고 공수를 전환하려는 순간, 평범했던 비가 얼음 결정으로 변화했다.
블리자드 레인.
수 속성 마법에서 성질 변화를 거쳐 만들어낸 빙결 마법.
서진의 급성장 못지않게 정소율도 끊임없이 성장을 거듭하며 유망한 천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콰득!
하늘에서 매섭게 낙하하는 우박은 서진의 3중첩 실드를 뚫고 들어왔다.
수천 개의 물방울이 얼음이 되어 움직임을 봉쇄하는 막강한 범위 공격.
실전이었다면 죽음이 확정된 감옥이나 마찬가지.
[내구도 : 250/500]
대련을 위해 착용한 슈트의 내구도가 점점 줄어든다.
실드가 통하지 않는다면 남은 건 공격뿐.
서진은 물로 된 기다란 장창을 만들어내어 정소율을 향해 던졌다.
쐐애액!
7레벨 검사가 던지는 창의 속력은 일반 마법사의 반응 속도를 아득히 뛰어넘는다.
정소율은 가까스로 블링크를 캐스팅하여 투창을 피해냈다.
그리고 시전자의 위치가 변한 순간, 마법도 힘을 잃게 되기 마련.
블리자드 레인은 단순한 물방울이 되어 지면을 적셨다.
자유의 몸이 된 서진은 발밑에 물을 일으켜 위로 솟아올랐다.
정소율이 고개를 살짝 들어서 봐야 될 정도로 올라간 서진은 다시 한번 창을 던졌다.
다른 마법을 준비 중이었던 정소율은 급히 방어막을 펼쳤다.
직전에 블링크를 썼기에 이번엔 제자리에서 막아내야 했다.
아까와 달리 아무런 방해 없이 위에서 아래로 던져진 창은 그녀의 베리어를 단숨에 관통했다.
그렇다 해도 아직 5중첩 실드가 남아있었다.
콰앙!
잠깐 생겨난 안도감이지만 실드 한 겹이 깨질 때마다 깎여나간다.
하지만 마지막 실드가 남은 순간, 힘을 다한 창은 형태를 잃고 평범한 물이 되어 떨어졌다.
“후우.”
이윽고 대련이 종료되고 정소율은 가슴에 손을 얹으며 숨을 내쉬었다.
“깜짝 놀랐어요. 그런데 이거 반칙 아니에요? 창을 만들어서 던져버리다니.”
정소율은 웃음기를 띠며 작게 항의했다.
“어쩔 수 없죠. 현재 제가 할 수 있는 마법으론 소율 씨의 방어를 못 뚫으니까요.”
그래서 보통 수속성 마법사끼리 붙으면 레벨의 격차는 절대적이었다.
레벨에 따라 살상력이 크게 갈리니까.
정소율은 젖은 머리를 정돈하며 대련 소감을 말했다.
“그런데 그새 실력이 또 느셨네요. 아쿠아 베리어를 그렇게 사용하실 줄은 몰랐어요.”
“소율 씨가 했던 걸 따라 한 것뿐입니다.”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에요. 정말...”
“그런데 빙결 마법은 언제 익힌 겁니까?”
“얼마 전에 작은 성취가 있어서요. 아직 걸음마 단계지만요.”
정소율은 서진의 재능을 보고도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마도를 닦아나가고 있었다.
“이제 4레벨 되셨다고 했죠?”
서진이 정소율을 가문에 초대한 이유였다.
“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마법 레벨이 낮아 아직 전투에 본격적으로 사용하기엔 부족했다.
알렉세이 때와 같이 찰나의 순간에 내린 판단으로 승패가 갈리는 격전일 경우, 마법을 펼치기가 상당히 까다로웠다.
캐스팅 하다가 치명적인 빈틈을 보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렇기에 끊임없이 수련을 거듭하며 검술과 비슷한 수준으로 올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나머지 부족한 점은 재능이 메꿔줄 테니.
그때 서진의 폰으로 감찰각주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서진 님, 혹시 러시아의 9레벨 헌터인 세르게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의 아들이 지니고 있는 팔찌가 있는데 이틀 전부터 거기 담겨있던 마나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세르게이의 마나가 들어있던, 아들 보호용 아이템이었는데 죽지 않는 한 빛이 꺼질 리가 없는 아이템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는 건.”
-타국의 사건이긴 한데 최근 엮인 일이 있다 보니 혹시 몰라 전해드렸습니다.
서진은 나흘 전에 흑룡가주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저택엔 이미 아무도 없었으며 9레벨에게 언질만 주고 왔었다고.
“감찰각주. 그 얘기 자세하게 알아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