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문선영이 알려준 좌표에 도착한 서진은 결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세 번째 마주한 마나 봉인 결계이지만 이전과 다른 점이 보였다.
“더 발전한 건가.”
결계 내부의 자오 길드 헌터들은 자유로이 마나를 발산하고 있었으니까.
저래서야 천궁 길드가 못 뚫을 만했다.
아니 어지간한 가문, 길드들도 저런 환경 속에선 맥도 못 출 것이 자명하다.
게일러라는 흑마법사의 성취가 저 결계를 통해 느껴진다.
“천궁에서 해결하기 힘들만하군.”
아무리 정보를 많이 알고 있어도 무력이 닿지 않으면 처리할 수 없는 일이 반드시 존재한다.
자오 길드는 천궁의 약점을 정확하게 찌른 것이다.
‘그나저나 거기서 강화될 줄은 몰랐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결계가 개량된 이유 중에서 서진의 몫이 제일 클 것이다.
두 번이나 동일 인물에게 농락당했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흑마법사의 피나는 노력은 이번에도 의미가 퇴색될 예정이다.
서진의 안에 잠들어 있는 투기가 당장이라도 나올 듯이 용솟음치고 있었기에.
서진은 발을 떼기 전에 건물을 올려다봤다.
7층 옥상에서 사방으로 퍼지고 있는 막대한 마기가 감지되었다.
아마 저기서 자오 길드의 헌터들에게 마기를 부여하고 있는 거겠지.
그리고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기 위해 배치된 스무 명의 헌터들까지.
하지만 저들 중에 수준급의 마나를 가진 헌터는 없었다.
적당히 머릿수만 채워서 세워놓은 허수아비들.
그만큼 자오길드가 결계에 대해 자신하고 있다는 얘기다.
거기다 전면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기에 여력을 이쪽으로 돌리기 힘든 면도 있을 테고.
그때, 건물을 지키고 있던 헌터 한 명이 서진을 발견했다.
서진이 마나 봉인 때문에 차마 못 들어온다고 생각했는지 대놓고 조소하며 도발해온다.
“올려면 오던가! 으하하하!”
“그러지.”
초대를 받았으면 가는 게 인지상정.
서진은 다리에 마나를 흘려보내 포탄처럼 튀어 나갔다.
그러자 자오 길드의 헌터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미쳤나?”
“여기가 어떤 공간인지 잘 모르나 본데?”
그들은 서진을 비웃으며 느릿하게 움직였다.
제아무리 대단한 흑룡검가의 후계자이며 7레벨이더라도 여기선 자신들이 절대자니까.
하지만 그런 오만한 감정은 서진이 투기를 꺼내는 순간, 경악으로 바뀌었다.
“뭐야!”
“여기선 마나 못 쓴다며!”
“아아악!”
수평으로 휘두른 검에서 나온 투기가 그들을 무자비하게 참살했다.
애초에 서진보다 한참 못 미치는 무력을 지닌 헌터들이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사고가 정지된 놈들을 정리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씨바알!”
마지막으로 남은 조장급의 헌터는 두려움을 떨치려는 듯 소리를 지르며 서진에게 돌진했다.
서걱.
그래봤자 결말은 정해져 있지만.
건물 밖의 헌터들을 전부 제거한 서진은 피로 얼룩진 땅을 밟으며 정문으로 걸어갔다.
로비에 들어서니 남성의 목소리가 서진을 맞이했다.
“대단하더군.”
시릴 정도로 창백한 인상의 남자가 안광을 번뜩이며 서진을 내려보고 있었다.
“자오길드의 부길드장, 조현후다.”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와 땅에 발을 디딘 그는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말을 이었다.
“설마 여길 누가 올까 싶었는데 길드장의 걱정이 들어맞았군. 신기한 노릇이야. 어떻게 마나를 쓸 수 있는 거지? 나에게 알려 줄 수 있나?”
상당히 흥미로운 듯 서진을 향해 부담스럽고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보인다.
서진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시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스스로 인간을 저버렸군.”
“뭐? 크하하하!”
순간 동공이 확대된 조현수는 이내 목젖을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이거 정말 놀라워. 어떻게 나를 한눈에 꿰뚫어 본 거지? 그래, 사람이 아니면 뭐일 것 같아?”
“박쥐.”
마나도 마기도 아닌 이질적인 기운.
흐릿하게 느껴지는 혈향.
입을 벌릴 때 드러난 송곳니.
피를 마시며 수백 년을 살아가는 종족, 뱀파이어.
서진이 이계에 있을 때 지겹게 피를 노리고 달려들던 종족이기도 했다.
조현후는 비릿한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짓쳐들었다.
“굳이 멸칭을 입에 담다니 심성이 고약하군.”
“피 빨고 다니는 너만 할까. 언제부터 그렇게 변한 거지?”
서진은 조현후가 처음부터 뱀파이어였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순혈 뱀파이어는 눈동자 색부터 다르니까.
그리고 몇십 년 전부터 뱀파이어가 자리 잡고 있었다면 여태껏 몰랐을 리도 없고.
서진은 여태까지 뱀파이어를 목격했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마 리치와 마찬가지로 뱀파이어 로드도 손을 뻗기 시작한 거겠지.
서진이 며칠 전 했던 추측이 현실로 드러난 셈이다.
“미안하지만 그건 얘기해줄 수 없어.”
조현후는 진심으로 안타까운 듯이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그동안 좀 외로웠는데 반갑군. 넌 어떻게 뱀파이어의 존재를 알게 된 거지?”
“누가 너를 뱀파이어로 만들었는지 말해주면 답하지.”
“하아, 역시나 짓궂은 친구야.”
서진은 개소리를 무시하며 투기를 일으켰다.
그러자 조현후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벌써 싸우게?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전투가 끝나고 나면 실컷 입을 열게 해줄 테니 걱정 마.”
“이런, 전혀 반갑지 않은 소리...군!”
그 말과 동시에 서로가 내보인 힘이 부딪쳤다.
서진은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혈기를 받아쳤다.
뱀파이어 로드의 혈기에 비하면 하잘것 없는 수준.
하지만 서진도 그때의 투신이 아니기에 머릿속에서 조정을 거치며 대응법을 구상했다.
충격파가 터져나간 직후, 조현후의 주위에서 피가 솟구쳤다.
선혈은 네 갈래로 나뉘어 날카로운 호선을 그리며 서진에게 날아들었다.
[마력이 22 상승합니다]
[지력이 20 상승합니다]
콰가광!
서진은 투기를 쏘아 보내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 터트려버렸다.
그리고 전방으로 도약 후, 점멸을 사용해 조현후의 지근거리에 접근했다.
“흡!”
한순간에 따라붙은 서진을 보며 놀란 조현후는 피의 장벽을 생성했다.
서진에게도 익숙한 혈벽이었다.
건드리는 순간, 장벽에서 수백 개의 가시가 튀어나와 전신에 구멍을 내버리는 기술.
서진이 뒤로 물러나자 기대에 배신당한 조현후는 눈매를 좁혔다.
“너, 뭔가 알고 있는 거냐.”
“글쎄.”
서진의 묘한 미소에 조현후는 조급함을 억누르며 피를 끌어모았다.
혈산폭(血散爆)
검붉은 피는 완벽한 구체를 형성하며 허공에 떠올랐다.
“이것도 피해 봐라!”
제한된 공간에서 핏줄기가 무차별적으로 터져나갔다.
이 또한 서진이 알고 있는 기술이었다.
대상에 피가 묻기만 하면 그 부위를 폭발시킬 수 있는 혈마법.
처음에 모르고 당했다가 죽을 뻔한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으니.
이미 겪었기에 서진의 대응은 신속했다.
투기로 바닥을 크게 부순 뒤에 들어 올려 방패로 삼는다.
파바박!
피는 서진에게 닿는 일 없이 전부 방패가 대신 맞았다.
조현후가 주먹을 쥐며 피가 닿은 곳을 터트림과 동시에 서진은 투기를 길게 뽑아냈다.
혈산폭의 단점은 폭파 순간에 술사에게 딜레이가 생긴다는 것.
서진은 그 틈을 정확하게 잡아내서 수 미터가 넘을 정도로 거대한 투기를 횡으로 휘둘렀다.
콰가가각!
시멘트로 만들어진 벽을 사정없이 부수며 조현후를 덮쳤다.
그는 혈생문(血生門)을 발동해 막아보려 했지만, 투기를 극한까지 쏟아부어 압축한 검강이다.
급하게 만들어낸 혈마법으로 막아내기엔 서진의 검격에 담긴 힘이 너무나 강했다.
조현후는 투기의 폭풍에 휩쓸려 부서져 내린 벽 한구석에 처박혔다.
“...크르륵!”
혈기의 통제권을 잃은 조현후는 이지를 상실한 괴물이 되어 다시 일어섰다.
푸욱.
치명상을 입은 시귀는 서진에게 어떠한 위협도 되지 못했다.
서진이 내지른 검에 생명 반응을 잃고 허물어질 뿐.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살리는 건 무리였나 보네.”
서진은 작은 아쉬움을 버리며 위층으로 향했다.
설마 한 층마다 적이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서진은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전개를 떠올렸지만 다행히 그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마침내 7층에 도달한 서진은 차분히 앉아있는 흑마법사를 볼 수 있었다.
“결국 부길드장이 죽었는가.”
흑마법사는 등을 보인 채 중얼거렸다.
서진은 간격을 가늠해서 정교한 검기를 날렸다.
“크악!”
흑마법사의 어깻죽지가 절단되며 오른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순간, 건물 주변을 감싸던 결계가 걷히며 사방으로 뻗어나가던 마기도 끊겼다.
모든 능력이 결계에 치중되어 있는 흑마법사는 정면에서 서진과 맞서 대항할 힘이 없었다.
상황을 받아들이고 체념한 채로 죽음을 맞이하는 수밖에 없다.
서진은 흑마법사가 쓰고 있는 로브를 걷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게일러는 아닐 테고.”
눈앞의 흑마법사는 기껏해야 7레벨.
아마 게일러에게 결계 관리 요령을 전수받은 정도겠지.
“게일러에 대해 아는 걸 말해.”
“그냥 죽이게. 어차피 살려주지 않은 걸 알고 있네.”
“죽음도 여러 가지 모습이 있지. 마지막에 고문당하면서 추하게 죽고 싶지 않으면 말하는 게 좋을 거야.”
“허허. 쿨럭, 젊은 놈이 뭐 이리 흉흉한고.”
실제 나이로는 노인네를 훌쩍 뛰어넘은 서진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렸다.
“나도 아는 건 그리 없네. 말도 몇 번 나눠보지 못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가 만들어 놓은 결계를 유지하는 것뿐이니. 다만 나와 비슷한 나이대라는 점. 그리고 이번 전쟁에 큰 관심이 없는 듯 보였네.”
흑마법사는 문득 생각난 듯 말을 계속했다.
“참, 이건 내가 잘못 들은 걸지도 모르지만 ‘마령전’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린 적이 있었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고 특이한 단어라 기억에 남았지.”
“마령전?”
“어쨌든 나는 다 말했으니 약속은 지켜줄 거라 믿네.”
“이번 일에 안드레이라는 놈도 개입했을 텐데 들은 정보 있나?”
“으음, 누굴 지칭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지만 그건 길드장에게 묻는 게 빠를 걸세. 난 만난 적도 없으니까.”
“그런가.”
그 외에도 서진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흑마법사는 기억나는 대로 대답을 내놓았다.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건가?”
“방금이 마지막이었어.”
서진은 약속대로 깔끔한 안식을 위해 검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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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기 지원이 끊어지자 자오 길드의 헌터들은 빠르게 궤멸되었다.
강제로 펌핑시킨만큼 중단 직후의 부작용도 상당했던 것이다.
천궁 길드는 여세를 몰아 자오 길드의 사업체까지 빼앗으며 완전한 역전을 이루어냈다.
그리고 우려했던 자오 길드장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타이밍을 보고 있다가 전황이 뒤집혀서 물러난 건지 현재로선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서진 덕분에 가능했던 승리라는 걸 문선영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 이제 원하시는 걸 말씀해보세요.”
5구역에서 돌아온 서진을 맞이한 그녀는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길드장님이 현재 8레벨이시죠?”
“네. 맞아요.”
드디어 투신공의 효과를 올릴 때가 왔다.
서진은 투신전 창을 열어서 비어있는 가신을 채우기 위해 문선영을 터치했다.
“이건?”
그녀는 처음 보는 알림 창에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