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로열 이프리언이 화염 속성의 비행종 보스 몬스터라 까다로운 편이지만 난공불락이라 여길 정도는 아니다.
화산지대를 어떻게 극복할지가 문제지.
물론 이계에서 지냈던 서진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가능할 것 같아.”
무심한 듯 가볍게 나온 서진의 대답에 성주원은 고개를 홱 돌렸다.
“정말?”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해서 데려온 거 아니야? 근데 왜 그렇게 놀라?”
“막상 그리 말하니까 의외여서.”
조금 뜸을 들이거나 한번 해봐야 될 것 같다고 할 줄 알았던 성주원에겐 너무나 선선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이만한 사업이면 대가는 상당히 비싸게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예상컨대 용암으로 전투 지속력 문제점이 해소된다면 기갑성가는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될 것이다.
현재 서진과 성주원은 일방적인 원조 계약 관계.
기갑성가가 강해질수록 서진에게 좋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구두계약이 언제까지나 굳건하게 지속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다 당시 계약의 동기가 되었던 기갑부단장 정인호의 입지가 상당히 줄어든 상황.
성주원 입장에서 실리적이고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서진과 맺었던 계약을 파기해도 상관없을 터.
그러니 요지는 잠재적 경쟁 가문을 도와주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
물론 서진은 성주원의 속마음을 모르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진 알 수 없지만.
“계약 조건에 대한 협상권은 너한테 있어.”
“뭐?”
“일단 모양새는 갖춰야 하니 흑룡검가에 정식으로 의뢰를 넣긴 했지만 권한은 너에게 있다는 말이지. 뭣하면 원래대로 너희 가문, 그 뭐냐 내원당에 넘겨도 되고.”
순간 서진은 집무실에서 나오기 직전 가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슬쩍 입꼬리를 올렸던 진짜 이유가 이것이었나.
서진이 잠시 말이 없자 성주원은 은근한 어조로 어깨를 걸쳤다.
“미니 서프라이즈인데 감동했냐? 고마우면 형이라 불러도 되고.”
“아직도 형을 포기 안 했나 보네.”
서진은 어깨를 감싼 성주원의 팔을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어차피 이번 임무는 나 아니면 성공이 불가능하니 말 안 해도 권한은 가져올 생각이었어. 물론 신경 써준 건 사양하지 않겠지만.”
“동생인데 귀여운 구석이 없네.”
“헛소리 그만하고 계약부터 하지.”
“그래, 조건이 뭐던 간에 저놈은 꼭 없앴으면 좋겠다.”
별도의 아이템은 필요 없다.
서진이 협상권을 가지긴 했지만 가문 간의 계약이다.
무력집단 간의 계약이 늘 그렇듯 강제적인 제약은 큰 의미가 없다.
힘의 균형이 깨지거나 상황이 변하면 바람처럼 날아갈 수도 있는 게 가문 계약.
다만 한국처럼 좁은 땅에서 정상적인 가문으로 살아남으려면 대놓고 신의 없는 짓을 저지를 순 없으니 어느 정도 안전장치는 있는 셈이다.
대한가문회가 존재하는 이유도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니.
그리고 서진에겐 두 가지 믿을만한 구석도 있었다.
우선 서진은 로열 이프리언을 처치하는 방법에 대해선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계약이 성립할 수 있는 핵심적 내용은 최대한 비공개로 두는 편이 낫다.
거기다 유사시엔 용체화를 이용해서 압박을 넣을 수도 있으니.
“어우 답답해, 일단 얘기는 다 끝냈으니까 가문으로 돌아가서 계약 작성하자.”
유독 더위에 약한 성주원은 빠르게 던전을 나갔다.
“가요, 오빠.”
“그래.”
서진도 성가을과 함께 던전 밖으로 향했다.
**
나흘이 지나, 서진은 다시 이프리언의 던전 앞에 서 있었다.
그동안 서진은 기갑성가에서 머물면서 던전에서 창출되는 수익에 대한 구체적인 비율을 정하고 차후 서진의 요청에 따라 항목을 추가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계약 조건을 설정했다.
“네가 가능하다니까 따르긴 하는데, 정말 괜찮겠냐?”
공략을 위해 던전에 들어가기 전.
성주원은 여전히 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 서진이 설하윤만 데려가서 단둘로만 공략을 하겠다고 말했으니 그럴 만했지만.
“문제없어.”
서진에게도 소수로 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투신공의 효과를 극대화해서 스텟을 많이 올릴 겸 공략의 핵심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그런 서진에게 성주원은 한 번 더 당부의 말을 전했다.
“안 되겠다 싶으면 무리하지 말고 바로 나와 시급하게 성공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
서진도 만약 소수로 힘들다고 느껴지면 기갑단이든 흑룡대든 간에 동원할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보네요.”
그때 서진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며 누군가 다가왔다.
고개를 돌리니 예전에 한 번 만났던 정인호 기갑부단장이었다.
“반갑네요. 이번이 두 번째죠?”
서진이 입을 열기 전에 성주원이 치고 들어갔다.
“부단장이 여긴 무슨 일이지?”
이프리언의 던전은 성주원이 발견했기에 그의 직속 부대가 경비를 서고 있었다.
기갑부단장이 이곳에 올 이유는 없다는 뜻.
정인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뭐 어떠냐는 듯 답했다.
“너무 야박하게 구는 거 아니에요? 공략 성공 여부에 따라 기갑성가의 분기점이 될지도 모르는데 한번 와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일견 타당해 보이는 말이었기에 성주원은 찜찜했지만 넘어갔다.
정인호는 묘하게 웃는 낯빛으로 서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쨌든 잘 부탁드립니다.”
그 순간, 서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내려갔지만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저야말로.”
짧게 악수를 하고 정인호는 건투를 기원하며 물러났다.
“공략 성공하길 바라겠습니다.”
성주원은 의중을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정인호가 사라지자마자 서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서진아 몸에 이상은 없냐? 혹시 정인호가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니 자세히 확인해봐라.”
“아무 이상 없어.”
심지어 성가을은 서진이 악수한 손을 슬며시 잡고 살펴보고 있었다.
“...가을아?”
“아, 죄송해요. 혹시 몰라서.”
남매가 쌍으로 이러니 살짝 정신이 없어지는 것 같다.
서진은 가볍게 웃으며 이들의 걱정을 흘러 넘겼다.
“그럼 이제 들어갈게.”
“네. 공략 안 돼도 괜찮으니 다치지만 마세요.”
그 말에 성주원이 펄쩍 뛰었다.
“야. 공략은 해야지! 뭘 안돼도 괜찮아.”
“중요 순서가 있다는 거야. 오빠는 서진 오빠가 다쳤으면 좋겠어?”
“그게 그 말이 아니지.”
서진은 남매의 일상적인 말싸움을 말리는 대신 설하윤을 불렀다.
“하윤 씨 들어가죠.”
“예.”
**
던전에 들어온 순간, 서진은 풀어져 있던 표정을 굳혔다.
사실 정인호에 대한 경계심 가득했던 우려가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혈기.’
의외의 인물에게서 느껴진 기운에 서진은 순간 놀랐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악수했다.
그리고 손이 닿은 순간, 서진의 머리 위에서 핏빛의 외눈 박쥐가 나타났다.
블러드 아이.
혈기를 알아채지 못한 상대에게 발동된다면 감시당하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니 정인호가 자신 있어한 거겠지만 설마 서진이 알고 있으리란 생각은 전혀 못 했겠지.
설하윤에게도 혈기를 느낄 수 있게끔 해주고 싶지만 직접 접하면서 감각을 누적시켜야 하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일단 지금 중요한 것은, 정인후가 블러드 아이를 붙인 목적.
아마 공략 정보를 훔치기 위함이겠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을 품고 있는지가 관건이다.
현재 정인호가 소가주 경쟁에서 입지가 줄어든 것과 연관이 있겠지.
서진만 알고 있을 공략 정보를 빼돌리는 데 성공한다면 활용 여지가 무궁무진하다.
성주원은 아직 모른다는 점을 이용해서 영향력을 다시 넓히는 발판으로 쓸 수도 있고,
서진과 성주원 사이를 이간질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서진이 블러드 아이를 가만히 놔두는 이유가 있었다.
이걸 없애버리는 건 쉽지만 그리하면 정인후는 모든 촉각을 세워 서진을 경계할 터.
우선 방심을 유도해서 정인호를 풀어두고 혈기를 얻게 해준 놈을 잡을 생각이었다.
다만 블러드 아이를 이대로 두면 공략 과정이 유출되겠지만 당연히 대비책도 존재했다.
‘일루전.’
4레벨 들어서 익힌 공용마법 중의 하나.
이제부터 블러드 아이의 시야는 철저히 서진이 만들어낸 환상에 갇히게 된다.
정인호는 진실을 가린 거짓을 보며 믿게 되겠지.
“서진 님?”
설하윤의 부름에 서진은 상념을 접고 발검했다.
“가보죠.”
이프리언은 영역 구분이 확실한 몬스터.
멀리 있을 땐 굳이 공격하러 다가오지 않지만 가까이 접근할수록 떼를 지어 날아든다.
크와아아!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로열 이프리언의 포효.
이번 공략의 핵심은 저 녀석이 장악하고 있는 화구에서 전투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
“하윤 씨. 저 중에 이마에 뿔 달린 녀석을 찾으세요.”
일반 이프리언의 상위 개체인 혼 이프리언의 뿔을 이용하면 용암이 넘실거리는 화구에서 버틸 수 있다.
“알겠습니다.”
본격적으로 이프리언의 영역에 발을 들이자 한 번에 스무 마리가 불을 내뿜으며 쇄도해온다.
[근력이 32 상승합니다]
[민첩이 31 상승합니다]
[마력이 35 상승합니다]
:
A급 몬스터들의 야성적인 투기가 스텟이 되어 묵직하게 쌓여간다.
가신이 3명이 되니 시너지가 되어 이전보다 많은 스텟이 들어오고 있었다.
서진은 깊은 충족감을 느끼며 이프리언을 베어 넘겼다.
하지만 비행종이다 보니 검격이 잘 닿지 않았다.
서진은 아직 중력을 거스르는 경지에 도달하진 못했기에 놈들을 끌어내리기로 했다.
‘아쿠아 체인.’
끝에 갈고리가 달린 푸른 사슬이 날갯짓하는 이프리언의 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사슬에 이끌려 바닥에 처박힌 순간, 서진의 검이 틀어박힌다.
“이러니까 좀 편하군.”
마나를 최대한 사용했을 때, 사슬의 사정거리는 대략 7미터.
이제 놈들도 공중이 마냥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고도를 높이며 거리를 둔다.
물론 그래 봤자 몬스터.
영역을 침범한 존재에 대한 적의를 억누를 수는 없는 법이다.
크와아악!
화산지대를 올라갈수록 동족이 죽어나든 말든 불나방처럼 끊임없이 몰려든다.
“서진 님! 저기!”
설하윤의 시선 끝에는 혼 이프리언이 있었다.
서진은 아까보다 굵어진 사슬로 혼 이프리언의 다리를 휘감았다.
그러나 일반 이프리언보다 강한 힘을 가졌기에 쉽게 끌려오지 않았다.
심지어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르려 하자 사슬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때 급격히 팽창한 설하윤의 검기가 가까스로 묶여있는 혼 이프리언을 양단해버렸다.
A급 정예 몬스터를 일검에 죽여버리다니.
그녀도 계속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는 의미겠지.
서진은 두 동강이 난 사체에 다가가 뿔을 뽑아냈다.
“이제 하나만 더 얻으면 됩니다.”
화염의 정수가 가득 찬 뿔에 자신의 마나를 넣은 뒤에 부러트리면 일시적으로 화염 저항력이 덧씌워진다.
설하윤은 힐긋 서진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전부터 궁금했습니다만, 어떻게 이런 지식을 아시는 겁니까?”
“저도 딱히 알고 싶진 않았는데 그렇게 됐어요.”
“....”
서진은 왜인지 설하윤의 눈빛이 부담스러워 말을 돌렸다.
“마침 저기 하나 더 날아오네요.”
그리고 3분도 채 지나기 전에 뿔을 하나 더 챙긴 서진과 설하윤은 로열 이프리언이 있는 분화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