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화르륵.
설하윤은 몸을 감싸고 있는 불길이 신기한지 연신 둘러보고 있었다.
뿔에 담겼던 화염 정수는 주위의 열기로부터 그녀를 보호해주는 중이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입니다.”
동시에 서진을 향해 한층 더 깊어지는 의문 가득한 설하윤의 눈초리.
어떻게 이런 세세한 것들을 알고 있는지 묻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말을 꺼내진 않는다.
궁금하긴 하지만 먼저 알려주기 전까진 굳이 캐묻지 않기로 생각한 모양이다.
서진은 숨을 돌리며 공중에서 낙하하는 이프리언을 베어 넘겼다.
분화구에 가까이 갈수록 새떼처럼 달려들던 이프리언들도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이 녀석들도 로열 이프리언의 영역에 다가가기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이윽고 영역에 발을 들인 순간, 고막을 강타하는 포효와 함께 용암이 어지러이 퍼져나간다.
뿔을 통해 몸을 보호하고 있음에도 일순간 숨이 막힐 정도의 압력.
전신을 감싸고 있는 주황빛의 화염도 주변의 열기에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역시나 오래 끌면 안 되겠군.’
로열 이프리언은 불쾌한 침입자를 처단하기 위한 열화를 뿜어냈다.
[민첩이 33 상승합니다]
서진이 여태까지 겪었던 화염 마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위력이라는 게 느껴진다.
일직선으로 쏟아져나온 불길에 서진과 설하윤은 각자 양쪽으로 회피하며 원을 그리듯 달려 나갔다.
좌우로 접근하는 적에 대한 로열 이프리언의 행동 패턴은 주로 세 가지.
서진은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고 관찰하여 어떤 동작을 취할지 예측해냈다.
‘공중 비행.’
펄럭!
서진의 예상대로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른 로열 이프리언.
당연히 그에 맞는 캐스팅이 준비되어 있었다.
몸에서 마나가 한꺼번에 빠져나가며 로열 이프리언의 위에서 급류가 쏟아져나왔다.
콰가가가!
용암으로 이글거리는 거체가 폭포에 휩쓸리자 치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기를 상실해간다.
4레벨의 마법인 만큼 녀석의 힘이 약해지는 건 찰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서진과 합을 맞춰온 설하윤에게 순간의 빈틈을 잡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검에서 돌풍이 일어나며 섬찟한 예기가 로열 이프리언의 날개로 향했다.
쐐애액!
폭포를 맞고 있는 와중에도 급격한 방향 전환을 선보이며 검기를 피해낸 로열 이프리언.
물을 피해 다시 원래의 업화를 되찾은 날개는 크게 펄럭이며 염화를 일으켰다.
화르륵!
수백 개의 깃털이 화염을 머금은 채로 지상에 내리꽂혔다.
서진은 충분히 막아낼 수 있지만 일부러 검으로만 쳐내며 위험을 자초했다.
다음 행동을 유도하기 위해서.
쏟아지는 화염을 피하던 서진이 발을 잘못 디뎌서 넘어지자 로열 이프리언은 몸을 구부리며 급강하해온다.
사냥감의 숨통을 끊기 위한 길쭉한 송곳니가 서진에게 닿기 직전.
‘점멸.’
한순간에 날개 쪽으로 이동한 서진은 압축된 뇌기가 서린 검을 내리쳤다.
촤악!
뇌검의 절삭력을 버티지 못한 날갯죽지는 처참하게 찢어지며 피로 물들었다.
크워어어어!
로열 이프리언은 고통과 분노가 뒤섞인 비명을 지르며 몸에 품고 있던 용암을 터트리려 했다.
하지만 미리 신호를 받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설하윤의 검격이 포효를 끊어냈다.
쿠웅.
절단된 목이 무겁게 떨어지며 빛을 발하던 용암은 삽시간에 식어간다.
행동 패턴을 꿰고 있는 서진이기에 가능한 속전.
“이렇게 빨리...”
설하윤은 본인이 목을 베었으면서도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덤으로 서진을 바라보는 설하윤의 눈빛이 더욱더 묘해졌다.
단지 이번 일만으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동안 서진을 지켜보면서 쌓였던 의문과 궁금증이 오늘을 계기로 촉발된 것.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봤던 그녀이기에 이상하게 여긴 점들이 한둘이 아닐 터.
이계에서 천 년을 지낸 사람이 몇 년 만에 깨어나며 생긴 간극은 연기나 거짓말로 메꿀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언젠간 말해야 할 때가 오겠지.
‘아직은 잘 모르겠군.’
생각해보면 설하윤에겐 그렇게 비밀로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지만 아직은 입을 열기가 망설여진다.
“서진 님. 이제 끝난 겁니까?”
“음? 아 네. 당분간은 분화구도 잠잠할 거예요. 물론 시간 지나면 또 나타나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해치워야겠지만.”
그리고 이번 공략에서 제일 중요한 게 아직 남아있다.
서진은 로열 이프리언의 사체를 가르고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있네.”
조심스럽게 손을 뻗은 서진은 붉은빛이 도는 내단을 꺼냈다.
로열 이프리언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품고 있기 때문에 운이 따라야 했다.
서진은 망설임 없이 바로 내단을 입에 넣었다.
“서진 님!”
놀란 설하윤이 말리려 했지만 이미 식도를 타고 넘어간 상태.
서진은 별일 아니라 듯이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안 위험하니까.”
베놈 스콜피온의 내단과 달리 이건 정제 없이 바로 삼켜도 무탈하게 소화 가능했다.
[특성 ‘화염 내성’이 추가되었습니다]
[7레벨 이하의 화염에 대해 완벽한 내성을 가집니다]
“이제 나갑시다.”
그리고 서진은 던전을 나가기 직전에 블러드 아이를 둘러싸고 있던 일루전 마법을 해제했다.
**
“정말이구나. 지옥 같던 열기가 사라졌어.”
공략 결과를 직접 확인한 기갑성가의 가주는 크게 웃으며 서진에게 감탄했다.
“주원이가 큰 복을 곁에 두고 있어. 정말 고맙구나.”
가주뿐만 아니라 던전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갑성가의 헌터들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여태까지 한 번도 공략 실패한 적 없다고는 들었는데 설마 이것마저 해낼 줄이야.”
“심지어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았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놈을 쓰러트린 거지? 너무 궁금한데.”
“아서라. 헌터에게 있어서 그런 중요한 비밀을 함부로 알려고 들면 위험해.”
“그냥 해본 말이지. 어쨌든 믿기지가 않네. 우리가 그리 생고생을 해도 접근조차 쉽지 않았는데.”
“저런 헌터가 사고당해서 몇 년 동안 누워있었다니.”
“아니면 여태까지 송곳을 숨기고 있다가 최근에서야 드러낸 걸지도.”
그렇게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가던 중에 누군가는 서진의 칭찬을 넘어서 미래를 그렸다.
“우리 도련님이 한서진이랑 친한 듯하니 만약 한서진이 가주가 되면 강력한 동맹을 얻게 되는 건가?”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켜네.”
“아냐, 내가 생각하기에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그때 서진과 웃으며 얘기를 나누는 성가을을 본 헌터는 눈에 불을 켰다.
“설마 저놈이 아가씨까지!”
“둘이 잘 어울리는구만 뭘.”
“조금 부럽긴 부럽다.”
서진으로 인해 잠시 기강이 풀어진 기갑성가의 헌터들에게 가주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던전에 들어가지 않고 뭐해!”
“예!”
헌터들은 사체 수거와 아직 남아있는 분화구 주변의 이프리언을 정리하기 위해 황급히 들어갔다.
그리고 언제 화냈냐는 듯 가주는 서진을 향해 진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시간 되면 식사 같이 할 수 있겠나?”
“네, 괜찮습니다.”
**
언제부터였을까.
재능과 무장 기동 능력, 둘 다 성주원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역전되어버렸다.
지금 와서 성주원이 변하게 된 기점을 짚어본다면 예전에 한서진이 기갑성가에 오고 나서부터.
한 달 동안 머무르길래 병원에서 퇴원하고 한량처럼 놀면서 쉬려는 거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한서진이 성씨 남매에게 무언가를 해주었고 그 덕분에 재능이 개화되어 나비효과를 일으켜 버렸다고 볼 수 있다.
예전만 해도 설설 기던 기갑성가 헌터들이 이젠 성주원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만 봐도 달라진 위치가 체감된다.
‘하여간 기회를 보며 떠도는 이리 같은 놈들.’
정인호는 입매를 비틀며 살의를 짓눌렀다.
‘뭐, 그런 놈들도 다시 예전의 입지를 되찾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숙이겠지.’
최근에 얻은 뱀파이어의 능력만 잘 활용한다면 충분히 뒤집을 수 있을 터.
현재 정인호의 앞에는 블러드 아이를 통해 서진을 비추고 있는 화면이 띄워져 있었다.
관찰당하는지도 모르고 던전에 들어가는 꼴이 퍽 우스워 보였다.
‘멍청한 녀석.’
화면 속의 서진은 이제 막 첫 이프리언에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던전 입구 부근은 어렵지 않아.’
로열 이프리언의 영역 밖에선 기갑성가 헌터들도 문제없었으니까.
“음?”
서진이 이프리언을 잡은 것까진 평범했는데 이후의 행동이 이상했다.
이프리언의 어금니를 뽑고 있었으니까.
“저걸 왜?”
정인후는 의아해하면서 서진에게 더욱더 집중했다.
모든 건 서진이 보여주는 환상이었지만 그가 알 턱이 없었다.
화면 속 서진은 이프리언을 죽일 때마다 어금니를 계속 챙기며 나아갔다.
그러다가 작은 가방이 묵직해질 때쯤 불그스름한 빛이 은은하게 서진의 전신을 덮었다.
“저게 뭐지? 혹시 분화구에서 버틸 수 있는 비밀이 저건가?”
실로 놀라운 현상이었다.
어금니를 모으면 저런 효과가 나타나다니.
하지만 비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서진이 혼 이프리언을 산채로 붙잡아 뿔을 뽑아서 품속에 넣은 이후, 그의 검기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말도 안 돼.”
정인호는 그런 말을 하며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서진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의문을 빛을 덮어쓰고 강대해진 검기를 손에 놓은 서진은 어렵지 않게 로열 이프리언을 죽였다.
“저런 방법만 알면 공략하는 건 별것도 아니었어.”
그리고 블러드 아이는 서진이 던전 밖으로 걸어가는 도중에 지속시간이 다 되어 사라졌다.
“볼 건 다 봤어.”
엄청난 정보를 얻었다.
이제 적절한 타이밍에 직접 터트린다면 쓸데없이 서진을 데려와서 수익을 나눈 것에 대한 비난 여론을 조성할 수 있을 터.
뒷거래가 있었다는 식의 소문을 퍼트리면 금상첨화.
정인호는 더 이상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어금니는 둘째치고 뿔을 이용해 마나를 증대시키는 효과는 매우 탐났기에.
저걸 잘 쓰면 아쉬운 마나량으로 인한 출력 제한을 극복할 수 있다.
“당장 시험해보고 싶은데.”
이프리언 던전은 기갑성가가 최초로 발견했기에 다른 곳에서 구할 수는 없다.
직접 던전에 들어가야 하는데 성주원이 관할하고 있었다.
‘그놈이 쉽게 허가를 내줄 리가 없으니 어쩔 수 없군.’
정인호는 잠입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해가 지고 있으니 시간대도 적절했다.
뱀파이어가 된 이후로 부쩍 밤과 친해진 그였기에.
혈마법을 쓰면 몰래 들어가는 건 너무나 쉬웠다.
**
가주와 식사를 마친 서진은 성주원을 따로 불러냈다.
“혹시 뱀파이어 들어봤어? 현실에서.”
“너 뭐 잘못 먹었냐? 점심 메뉴엔 이상 없었을 텐데.”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보이긴 하는데...”
현재 서진은 일루전 마법으로 미끼를 던져놓은 상태.
거기에 정인호가 반응한다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다만 정인호가 기갑성가 소속인 이상 성주원의 협조는 필수 불가결.
서진이 망설임 없이 성주원에게 뱀파이어 얘기를 꺼낸 이유였다.
“일단 급하니까 짧게 말해줄게.”
서진은 백야의 5구역에서 싸웠던 뱀파이어 얘기를 적당히 생략해서 얘기했다.
성주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받아들였다.
“뭔가 좀 신기하다 싶으면서도 그리 놀랍진 않네. 이미 세상이 이 꼴이라 그런 거겠지만.”
“그럼 너희 가문에 뱀파이어가 있으면 어때? 그건 좀 놀랍지 않을까.”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