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가문의 천재는 사실 귀환자-94화 (94/141)

94화

서진은 정인호를 들쳐 메며 말했다.

“당분간은 실종된 걸로 하면 되지.”

“어째 말하는 게 이런 일 처리하는 게 익숙한 것 같다?”

“기분 탓이야.”

“그놈 심문할 때 나도 같이 들어도 되냐? 정인호가 왜 저렇게 됐는지는 알고 싶어서.”

“응, 상관없어. 애초에 설명해주겠다고 했으니까.”

성주원이 알아도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좋은 면이 더 많다.

사정을 알게 되면 여차할 때 협력을 쉽게 요청할 수 있을 테니.

“일단 내가 먼저 나가서 밖에 대기하고 있는 헌터들을 물릴게. 넌 그사이에 정인후 데리고 빠져나가.”

“오케이.”

그렇게 성주원의 협조를 받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흑룡검가로 향했다.

서진은 감찰각주를 불러 정인호를 뇌옥에 집어넣었다.

“감찰각주, 이놈한테 스킬 쓸 수 있겠지?”

“예. 안 그래도 사흘 전에 레벨이 올랐습니다. 서진 님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래, 축하해.”

사실 감찰각주의 나이와 직급에 비하면 레벨 상승이 더딘 편이었다.

다만 워낙 직무에 맞는 유용한 스킬을 지니고 있기에 각주직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다.

“6레벨이면 충분히 가능하겠네.”

“예.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정인호는 이미 몸과 정신이 쇠약해진 상태기에 수월하게 스킬이 스며들어갔다.

“너를 뱀파이어로 만든 놈이 누구지?”

“..케트론.”

재밌게도 서진이 알고 있는 이름이 등장했다.

뱀파이어 로드 아래에 있는 사주(四柱) 중의 하나.

우연히 이름만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서진이 알고 있는 케트론이란 이름의 뱀파이어는 그 녀석뿐이었다.

로드와 같이 합공해오다가 도중에 도망치는 바람에 놓쳤던 미꾸라지 같은 뱀파이어.

로드는 죽였지만 케트론 때문에 거슬리곤 했었는데 종지부를 찍을 기회가 찾아온 걸까.

“서진 님?”

잠시 생각에 잠긴듯한 서진을 위해 감찰각주는 질문을 멈췄다.

“괜찮으니 계속해. 아니, 캐트론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물어봐.”

“예.”

감찰각주가 그대로 읊자 정인호의 입에서 약속 날짜가 흘러나왔다.

“일주일 후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장소와 시간은?”

“오후 8시, 영종도입니다.”

“지금 케트론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나?”

“아니요...”

잠시 후, 구체적인 접선 장소까지 알게 된 서진이 발을 떼자 성주원이 입을 열었다.

“벌써 가게?”

“필요한 건 다 들었어. 따로 듣고 싶은 정보 있으면 옆에 각주에게 얘기하면 돼. 감찰각주는 여력이 되는 데까지 들어주고.”

“알겠습니다.”

뇌옥을 나선 서진의 입가엔 서늘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그 케트론이 맞다면 만났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가 궁금하군.’

**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폐허가 된 이후로 복구되지 않는 영종도의 사찰.

서진은 이곳에서 밤이 되어 찾아온 어둠 속에서 홀로 서 있었다.

천변을 쓰고 있는 채로.

누가 봐도 완벽한 정인호의 모습.

혈기까지 따라한 상태라, 만약 혈기를 아는 헌터가 있다면 뱀파이어라고 오해받기 딱 좋을 정도였다.

그때 기류가 바뀌며 누군가의 발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케트론인가.’

서진은 몸을 돌려 녀석의 전신을 살폈다.

‘확실하군.’

놓쳤던 이후로 케트론의 혈기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서진이 가만히 서 있자 케트론은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어딜 감히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서있는 거지?”

그러고 보니 케트론의 피로 정인호를 뱀파이어로 만들어줬으니 주종관계였을 터.

“힘을 얻더니 누가 주인인지도 잊었나 보군.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새겨주마.”

당장 무릎을 꿇어야 할 정인호가 아무런 반응을 안 보이자 케트론은 노기를 표출했다.

얕게 웃음을 흘린 서진은 천변을 벗었다.

“오랜만이야. 케트론.”

“건방지게 주인의 이름을 함부로...허억!”

정인호에서 서진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자 케트론은 기겁한 듯 입을 벌렸다.

얼마나 경악했는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할 정도.

“아니, 대체 어떻게. 소멸의 협곡에서 분명 죽었다고 들었는데...?”

서진의 얼굴을 본 순간, 내재된 공포가 깨어나 케트론의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도망치지 않았다면 죽을 뻔했던 그날의 기억이 강렬하게 떠올랐다.

이계의 질서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치러갈 때까진 좋았는데 막상 접한 투신의 무위는 로드를 상대로 우위를 점할 정도였다.

문제는 그런 미친놈이 왜 눈앞에 있느냐는 것이다.

케트론은 혹시 환영 마법에 걸린 건지 의심할 만큼 이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반응도 보이지 않은 케트론에게 서진의 검이 그어졌다.

절단면이 매끈할 정도로 하반신이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으아아악!”

그리고 이어서 두 팔마저 땅바닥에 툭 떨어졌다.

9레벨에 근접한 그의 무력치곤 너무나 허무한 결과였다.

멀리서 매복 중이었던 설하윤과 성주원이 무기를 꺼낼 필요도 없었으니.

서진의 얼굴을 보고 패닉에 빠지는 바람에 상황을 냉철하게 살피지 못한 것이 케트론의 패착.

공포심에 사로잡히지 않고 현재 서진의 경지를 파악했다면 이처럼 당하진 않을 것이다.

거기다 이계에 있을 때보다 약해진 힘도 한몫했다.

아무래도 지구로 건너오게 되면 제약이 생기는 모양.

그것이 일시적인지 영구적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괴물들이 전력을 온존한 채로 넘어오면 서진도 현재로선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었으니까.

“끄으윽...”

서진은 혈산독(血散毒)을 묻힌 단검을 케트론의 등에 꽂았다.

“끄억!”

혈마법으로 수작 부리지 못하게 혈기 사용을 방해하는 독이었다.

일주일 동안 케트론과의 전투를 대비해 서진이 만들었지만 예상외로 쉽게 끝나버렸다.

“이제 나와도 돼.”

서진의 목소리가 통신계 아이템인 귀걸이를 통해 멀리 떨어져서 대기하고 있는 설하윤과 성주원에게 닿았다.

잠시 후, 성주원의 사찰 계단을 올라오며 허탈한 듯 말했다.

“뭐야, 생각보다 엄청 약했던 거야? 전투 소리는 건너뛰고 바로 비명만 들리던데...어?”

성주원은 케트론을 보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혈기를 접한 지 얼마 되진 않았음에도 심상치 않은 수준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뭐야 얘 어떻게 빨리 잡은 거냐?”

“어쩌다 보니까.”

**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고, 서진은 케트론을 통해 의외의 정보를 알게 되었다.

바로 안드레이의 근거지가 있는 곳.

이번에는 감찰각주와 레벨 차이가 나서 세세하게 알 순 없었지만 핵심 정보와 전체적인 상황은 파악이 가능했다.

안드레이와 케트론이 주기적인 만남을 가졌다는 사실은 놀랄 법 하지만 납득이 가기도 했다.

서로의 목적은 리치와 뱀파이어 로드를 불러오는 것.

비슷한 목적을 가졌으니 서로 연결점이 생길 수밖에.

거기다 케트론도 리치의 도움을 받아서 이동했다고 하니 협력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

성주급은 쉽게 넘어오지 못하지만 힘이 약한 경우엔 비교적 쉬운 모양이었다.

그리고 서진이 관심을 기울이는 쪽은 당연히 안드레이였다.

이전의 로드가 서진에 의해 죽은 뒤에 새로 나타났다는 녀석은 별로 관심이 없었으니까.

예상대로 구슬에 마나는 가득 찬 상태라고 하니 조만간 다시 천궁을 노릴 것이다.

만약 안드레이까지 나선다면 이번엔 리치를 불러내게 될 터.

물론 이렇게 알게 된 이상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서진은 감찰각주를 통해서 취합된 정보를 가주에게 보고했다.

“...이상입니다.”

“잘했다.”

한벽호는 짧게 칭찬하며 벽면에 걸려있던 검을 집어들었다.

“가주님?”

갑작스러운 행동에 김형석이 의문스럽게 바라봤다.

외투까지 걸친 한벽호는 서진에게 물었다.

“너도 갈 테냐?”

목적지를 알수 없는 문장이지만 서진은 바로 대답했다.

“가겠습니다.”

옆에 있던 감찰각주는 안드레이의 은신처를 말한다는 걸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김형석은 우려를 표하며 급하게 말했다.

“가주님. 정보가 사실이라면 상대도 10레벨입니다. 흑룡대를 이끌고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번에 저택 버리고 도망간 것, 잊었느냐. 자기 안위에 대해선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놈이다. 떼로 몰려갔다간 습격하러 왔다고 광고하는 꼴이지. 인원을 늘릴 생각은 없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럼 차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그렇게 흑룡가주와 서진이 가문을 나간 뒤, 김형석은 작은 의문이 들었다.

소수 정예로 가실 의향이라면 서진 도련님 대신 흑룡대장을 데려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아.”

어쩌면 가주님 나름대로 보상을 주신 걸지도 모르겠다.

도련님이 이번 일에 가장 큰 역할을 해주었으니까.

물론 그것이 온정에서 비롯된 게 아니고 도련님이 그만큼 갈수록 두각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

쨍그랑!

흐릿한 불빛이 비치는 방 안에서 보드카 병이 깨지며 술이 바닥을 적셨다.

“후우.”

안드레이는 심호흡을 하며 가까스로 분노를 가라앉혔다.

동생이 죽은 이후로 이따금 이런 충동적인 분노를 억제하기 힘들어졌다.

아마 정신에 문제가 생긴 거겠지.

동생을 죽인 놈에게 복수를 하면 증상이 나아질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날아가고 싶지만 애써 눌러 담았다.

“빨리 강림시켜야 해.”

리치만 불러내면 구속에서 해방되며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

막대한 무력을 손에 넣은 채로 말이다.

거기다 11레벨에도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될 테고.

절대적 한계선이라는 10레벨을 넘어서 인류 최초로 11레벨에 도달한 마법사가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습격 날짜를 앞당겨야겠어.”

바닥에 퍼져나가는 술을 방치하며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가려는 순간.

치잉.

누군가 결계에 들어온 신호음이 귀에 꽂혔다.

그것도 8레벨 이상의 거물.

‘누구지?’

머릿속에 러시아의 몇몇 고레벨 헌터들이 스쳐 지나갔다.

안드레이는 저택 전체에 비상을 걸고 나서 마나를 넓게 퍼트렸다.

‘오는 방향은 북서쪽, 저택과의 거리는 5km. 아니 4km?’

그야말로 미친 듯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젠장!”

안드레이는 급하게 제단을 향해 뛰어갔다.

구슬만 챙기고 바로 도망갈 생각이었다.

누군지 몰라도 거사를 눈앞에 둔 상태에서 리스크를 짊어지고 싸울 필요가 없으니.

‘나중에 반드시 알아내서 갚아주마.’

안드레이는 장거리 순간 이동을 위해 워프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텔레포트는 고작 수 킬로미터가 한계이기에 금방 따라 잡힐 게 분명하니.

하지만 그 순간, 검은색 뇌기가 건물 천장을 뚫고 안드레이의 머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안드레이는 9중첩의 실드와 블링크를 동시에 펼쳐 뇌격의 포화로부터 가까스로 피했다.

번개가 꽂힌 바닥을 보니 지하 밑바닥까지 박살이 나있었다.

안드레이는 어쩔 수 없이 워프를 잠시 포기하고 텔레포트로 저택에서 나왔다.

그리고 하늘을 보게 된 안드레이는 믿기지 않은 광경을 목도할 수 있었다.

콰르릉!

거친 뇌명과 함께 하늘을 찢고 내려온 거대한 흑룡이 저택을 집어삼켰다.

콰가가광!

“드디어 보는구나.”

저택이 무너지는 굉음을 뚫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안드레이는 핏발이 선 눈을 하며 입술을 씹었다.

“...흑룡가주.”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