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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가문의 천재는 사실 귀환자-95화 (95/141)

95화

안드레이는 자신의 모래성 같은 마법 수준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겉보기엔 10레벨이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부실하게 쌓아 올린 탑이라는 것을.

리치의 힘을 받아 급속도로 강해질 때까지만 해도 문제점을 전혀 알지 못했다.

9레벨쯤에 다다르고 나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나서야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그때 리치와 계약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이미 죽었을 테니까.

그러니 돌이킬 수 없는 과거는 흘려보내고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안드레이가 11레벨에 집착하는 이유였다.

천외천의 경지를 넘어서야 흑룡가주와 같은 진정한 의미로 10레벨에 도달한 이들과 대등하게 설 수 있을 테니.

흑룡가주와 마주하고 기세를 온몸으로 체감한 안드레이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더했다.

‘흑룡가주는 아직 감당할 수 있는 놈이 아니야.’

흑마법을 사용하고 나서부터 느껴본 적이 없었던 피식자의 심정.

폭력에 몸을 떨었던 과거가 떠오를 정도로 흑룡가주의 무위는 ‘완성된 10레벨’ 그 자체였다.

도대체 저 인간이 어째서 이곳을 찾아낸 건지 궁금했지만 여기서 해소할 수 있는 의문은 아니었다.

안드레이는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수십 가지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그중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방법을 골라냈다.

흑룡가주가 앞에 있는 이상, 시간이 오래 걸리고 무방비한 상태가 되는 워프는 사용할 수 없다.

상당한 거리의 공간을 이동하는 마법은 불완전한 10레벨 마법사에겐 현 상황에서 고를 수 없는 선택지였다.

‘결국 흑룡가주의 발을 묶고 그사이에 도망쳐야 하는데.’

안드레이는 이럴 때 쓰기에 아주 적합한 마법을 알고 있었다.

품속에 들고 다니는 작은 인형을 매개체로 발동되는 마법이기에 캐스팅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만약을 대비해 실드를 추가한 안드레이가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 할 때, 한벽호가 입을 열었다.

“저번에 찾아갔을 때 자리에 없어서 이번에도 그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있군.”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안드레이에게 여유롭게 안부를 묻는 듯한 태도.

“후우, 한국의 헌터가 어째서 러시아까지 와서 이러는 거지.”

“그거야 네놈이 한국의 협회장을 그 꼴로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겠나. 거기다 흑룡가까지 건드려놓고 편하게 지낼 생각은 아니었겠지.”

담담한 목소리에 비해 더욱더 짙어진 압박감에 안드레이는 식은땀을 흘렸다.

흑룡검가의 후계자에게 손을 뻗친 건 실수였던 걸까.

안드레이는 뒤늦은 후회를 넘기며 짐짓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멋대로 증거를 만들어내고 뒤집어씌우는 건 아닌가?”

“그렇게 말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군.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게 무엇이 중요하겠나.”

흑룡가주의 말대로 고작 몇 마디로 넘어갈 상황은 아니었으니.

안드레이는 휘하의 헌터들에게 명령했다.

“공격해!”

대화하는 동안,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헌터들.

전부 안드레이의 명령만을 듣는 충실한 사냥개였다.

저택을 뇌룡이 삼켜버리는 바람에 반이 날아갔지만 아직 서른에 가까운 헌터들이 살아있었다.

낮게는 5레벨부터 높게는 7레벨까지.

이미 사망한 헌터까지 포함한다면 어지간한 대형 길드와 맞먹는 수준의 전력이었다.

그들은 10레벨이 상대인데도 망설임 없이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무심하게 바라보던 한벽호는 수평으로 검을 그었다.

간결해 보이는 일검에 6레벨 이하 헌터들의 몸이 반으로 잘려 나가고 두 번째 검격에 7레벨마저 목이 달아났다.

“....”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 피를 적시고 있었다.

안드레이가 몇 년간 공을 들이며 만든 부대가 한순간에 전멸한 것이다.

‘애초에 방패막이용으로 세우긴 했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릴 줄이야.’

누적되는 두려움에 손이 떨려오지만 목적은 이뤘다.

흑룡가주가 검을 두 번 휘두르는 사이, 안드레이가 던진 손바닥만 한 인형.

피로 얼룩진 땅에 서 있는 인형 주위로 마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매개체를 이용한 마법은 준비 과정이 번거로울 뿐, 발현 속도는 찰나에 가깝다.

검은 폭풍이 걷히고 그 안에서 인간의 형체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호오.”

한벽호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인형의 겉모습은 물론이고 마나까지 전부 자신과 거의 같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육체와 능력을 전부 모방한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10레벨급의 흑마법.

‘도플갱어라면 저 노괴도 충분히 막을 수 있겠지.’

복제하는 헌터의 레벨이 높을수록 마찬가지로 강해지는 도플갱어.

흑룡가주의 눈앞에 있는 인형은 전투 자아만으로 움직이는 또 다른 흑룡가주.

결국 자기 자신을 상대하게 되는 셈이니 아까처럼 빠르게 처리할 수가 없을 터.

“신기한 마법이군.”

얼굴의 주름까지 빼다 박은 도플갱어는 한벽호와 같은 자세로 검을 고쳐잡았다.

파직.

검은색 전류까지 흘리며.

도플갱어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낸 안드레이는 피를 흘리면서도 입꼬리를 올렸다.

이 흑마법의 유일한 단점은 복제 대상의 레벨이 높을수록 시전자에게 육체적인 부담이 가중된다는 것.

그러니 체내가 진탕되어 피를 쏟을 수밖에.

그마저도 흑룡가주를 완전히 모방해내진 못했다는 점이 안드레이를 소름 끼치게 했다.

‘아마 전투가 길어질수록 티가 나겠지.’

도플갱어가 자멸하기 전에 얼른 도망쳐야 한다.

살 수만 있다면 이까짓 내상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으니까.

안드레이는 텔레포트로 거리를 벌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흑룡가주가 멀어지는 안드레이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도플갱어가 막아섰다.

카앙!

“이거 제법이구나.”

마치 거울과 같은 움직임에 한벽호는 색다른 시각으로 자신을 관조할 수 있었다.

그사이 안드레이를 놓쳤음에도 그의 표정은 의외로 무덤덤했다.

“간만에 재밌는 놈을 만났으니 한번 검을 섞어보자꾸나.”

잠시 검의 간격을 재던 한벽호와 도플갱어는 다시 격돌했다.

**

“허억, 허억.”

안드레이는 입에서 단내를 풍기며 정신없이 앞으로 뛰고 있었다.

흑마법의 근간이 되는 마기는 다른 세계로부터 빌려오는 힘.

육체가 불안정할수록 일반 마법보다 훨씬 사용하기가 까다롭다.

7레벨급의 텔레포트를 연달아 사용하기엔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안드레이의 눈빛만은 살아있었다.

흑룡가주에게서 벗어난 이상, 생존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기에.

이제 인근에 있는 스팟에 들어가서 몸을 추스르고 워프하기만 하면 끝이다.

여태까지 쫓기는 삶을 살았던 안드레이는 이런 일을 대비해 저택 주변에 지하창고를 여러 개 만들어놓았다.

기척을 지우고 몸을 회복해서 원활하게 워프를 쓸 수 있게끔.

안드레이는 생존에 대한 강한 일념으로 목적지까지 발을 멈추지 않았다.

저벅.

그때 안드레이의 앞길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흑룡가주?’

끔찍한 상상을 떠올렸지만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감지되는 마나량은 흑룡가주보다 적었으니까.

“꼴이 말이 아니군.”

입에서 흘러나온 피가 수염을 검붉게 적시고 옷은 나뭇가지에 걸려서 찢어졌는지 나풀거리고 있었다.

서진을 본 안드레이는 안광을 번뜩였다.

“한서진... 흑룡가주가 혼자 왔나 싶었더니 후계자도 데려온 건가.”

“보아하니 어딜 급하게 가는 길이었나 봐?”

전혀 긴장하지 않는 듯한 서진을 보며 안드레이는 입매를 비틀었다.

“흑룡가주는 몰라도 너 정도는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몸 상태가 안 좋다고 해도 3레벨이나 낮은 놈을 상대로 겁을 먹을 안드레이가 아니었다.

“마침 잘 됐어. 네 목을 잘라서 동생을 위로해줘야겠다.”

쉐도우 블레이드.

안드레이의 특기 마법 중 하나, 마나를 효율적으로 적게 소모할 수 있어 현 상황에 알맞았다.

지면에 붙어있던 그림자가 치솟으며 칼날이 되어 서진에게 뻗어나갔다.

[체력이 38 상승합니다]

[마력이 40 상승합니다]

10레벨 마법사답게 살의 가득한 투기는 서진에게 좋은 스텟이 되어주었지만 알림창을 보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그림자 칼날은 방향을 자유롭게 전환하면서 서진의 사각을 끊임없이 찔러왔다.

그림자를 쳐내도 다시 뻗어 나와 빈 공간을 채우며 서진의 사방을 둘러싼다.

점멸로 위치를 바꿔도 숲에 가득한 그림자는 어느 곳에도 있었기에 의미는 없었다.

거기다 10레벨 흑마법사의 마기가 담긴 그림자는 서진이 뇌검으로도 쉽게 끊어내기 힘들었으니.

몸을 피할 공간마저 점점 잠식해간다.

서진은 올가미 같은 그림자 지옥을 끊어내기 위해 뇌격을 발사했다.

콰아앙!

극한으로 압축된 자색의 뇌격포는 검은 감옥을 박살 내고 틈을 만들어냈다.

공간을 창출한 서진은 바로 전광검을 펼쳤다.

안드레이에게 접근하려는 순간, 시간 흐름이 비틀어지며 아래에서 송곳 같은 그림자가 서진을 꿰뚫었다.

푸욱!

순간적으로 몸을 틀었으나 왼팔의 부상은 피할 수 없었다.

피를 흘리는 서진을 보며 안드레이는 히죽 웃어 보였다.

“무슨 수작을 부려도 내겐 안 통한다.”

3레벨이란 격차가 있었기에 전광검이 만들어낸 흐름에 안드레이가 간섭할 수 있었던 것.

“그래도 제법 버티는 듯하니 하나를 더 꺼내야겠어.”

쉐도우 필드.

안드레이를 중심으로 모든 물체와 공간이 어둠으로 물들어간다.

본디 그림자는 주위 환경에 쉽게 변하는 성질이 있다.

마법으로 발현하면 영향을 적게 받을 수 있긴 하나 아예 벗어나긴 힘들었다.

하지만 안드레이가 펼친 쉐도우 필드는 그 약점을 완벽히 보완하는 마법이었다.

주변의 수풀은 순식간에 본래 색을 잃고 검게 바뀌었다.

공간 자체를 거대한 그림자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빛에 따라 변화하는 그림자를 제한 없이 쓸 수 있는 영역.

“지금까지 여기서 살아나간 놈은 한 명도 없었다. 내가 시간이 많았다면 이걸 보여줄 일도 없었을 테니 영광으로 생각해라.”

서진의 발밑에서 솟구친 그림자는 다리를 묶어버렸다.

어디에 발을 디뎌도 그림자뿐이니 서진이 갈 곳은 없었다.

점멸을 써도 쿨타임이 있는 이상, 옭아매 오는 그림자를 피할 순 없었다.

“자아, 이제 그만 죽어라.”

다리가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서진을 노리고 그림자 칼날이 쏘아졌다.

연폭뢰로 칼날을 떨어트리지만 이 영역에서 그림자는 무한에 가깝다.

공방이 계속될수록 어느 쪽이 먼저 나가떨어질지는 자명했다.

여뢰를 이용해 번개를 방출해서 상반신의 구속까지는 막고 있지만 이것도 시간문제.

이대로 가면 서진을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다.

“발버둥 쳐봤자 소용없다!!”

아까보다 더욱 거대해진 칼날이 서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서진은 모든 스킬을 제쳐두고 눈을 감으며 검에 집중했다.

검의 본질은 눈앞의 존재를 베는 것.

투신의 심상이 만들어낸 검은 몸이 달라졌어도 여전히 기억 속에 잠들어 있다.

‘7레벨이라면.’

조금은 꺼낼 수 있지 않을까.

서진이 가능성을 일깨운 순간, 날카로운 공명음이 울리며 검에 씌워진 뇌기의 색이 변화했다.

동시에 전신에서 퍼져나간 전류 파동에 그림자 칼날이 튕겨졌다.

치이잉!

“...뭣!”

서진의 심장이 꿰뚫리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던 안드레이는 눈썹을 치켜뜨며 경악했다.

흑룡가주가 보였던 번개와 같은 검은색 뇌기가 서진의 검에서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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