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흑룡검술 극의, 흑뢰(黑雷)를 터득했습니다]
[모든 스텟이 50 상승합니다]
[일시적으로 마나가 대폭 증가합니다]
찬란하게 빛을 내던 자줏빛 전격이 사라지고, 이전보다 묵직해진 감각을 선사하는 흑뢰.
밀도가 높아진 전류를 컨트롤하기 힘들어할 법도 하지만 이미 지나왔던 길이었기에 서진은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벽을 깨고 한층 더 강해진 흑색의 뇌기는 안드레이의 그림자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파지직!
서진의 다리를 묶고 있던 그림자도 뇌기에 밀려 강제로 풀어져 운신의 자유를 되찾았다.
“도대체 이게...”
안드레이는 눈앞에서 벌어진 현상을 부정하고 싶었다.
전투 중에 실시간으로 강해지다니.
리치의 힘으로 10레벨까지 올라온 그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진은 전류를 흩뿌리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글쎄. 하려고 하니까 되더군.”
서진의 심상에 녹아들어 있는 깨달음을 당겨 가져온 것뿐이었다.
아직 투신의 무위를 온전히 발휘하려면 부족하기에 이건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10레벨에 들어서야 가능한 흑뢰를 벌써부터 끄집어낼 수 있다는 건 괄목할만한 성과였다.
“큭. 물론 그래도 변하는 것은 없다.”
안드레이는 냉정하게 이성을 되찾으며 그림자를 일으켜 수백 개의 검을 만들어냈다.
그의 손가락이 까딱거리자 서진을 겨누고 있던 검들은 해일처럼 쏟아졌다.
동시에 바닥 면에 있는 그림자까지 조작하며 서진의 발밑을 교란시켰다.
흑뢰를 각성한 이상, 그림자로 묶는 것은 불가능하니 집중력을 흩트리게 할 심산이었다.
위에선 해일이 들이닥치고 땅에선 그림자가 울렁거린다.
막는 건 물론이고 피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형국.
서진이 서 있는 곳은 그림자의 영역인 만큼 주도권은 아직 안드레이에게 있었다.
안드레이는 이번에야말로 끝장낼 생각으로 전력을 다해 그림자를 움직였다.
내색하고 있진 않지만 이만한 크기의 그림자를 조작하는 데 소모되는 심력은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다.
거기다 흑룡가주의 도플갱어를 만들며 심신이 해져버린 상태라면 몸에 가해지는 부하는 한계치 가까이 차오른다.
그야말로 여력을 끌어모은 혼신의 힘을 다한 공격.
안드레이 입장에선 서진이 죽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만약 살아서 도망친다고 해도 나쁘지 않았다.
흑룡가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이니까.
서진이 피하지 않는다면 검의 폭풍에 휘말려 죽게 될 터.
‘어느 쪽이든 좋다.’
안드레이는 입안의 피를 뱉으며 소리쳤다.
“자! 어떻게 할 테냐!”
서진은 살갗을 베어버리는 거대한 풍압 앞에서 물러섬 없이 검을 들었다.
흑룡검술 제1식 개변·일섬(改變·一殲)
힘을 싣기에 가장 유용하며 다채로운 변화를 부여할 수 있는 기본기, 섬아를 변형해 새로운 기술을 창출해낸다.
서진의 검이 무겁게 아래로 그어지며 칠흑의 전격이 해일에 맞서 격돌했다.
콰아아앙!
흙먼지가 일어나며 주변의 나무들이 꺾여 부러질 정도의 충격파.
그림자 폭격과 부딪힌 검강은 뇌광을 번쩍이며 해일을 반으로 갈랐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검은 폭풍 속에서 여뢰 상태의 서진은 정확히 안드레이의 위치를 찾아냈다.
치이이잉!
날카로운 뇌명이 울리며 지쳐 보이는 안드레이를 내려쳤다.
그림자를 덧씌운 10중첩의 실드가 막아섰지만 뇌검을 버티지 못하고 깨져간다.
그렇게 명치에 검이 닿기 직전에 블링크를 통해 회피한 안드레이.
거리를 벌린 채로 다른 마법을 캐스팅하려는 순간.
푸욱!
“커헉!”
등에서 찔러 들어온 검이 가슴을 뚫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분명...저기 있었.”
안드레이는 심장을 관통당해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뇌영환보가 만들어낸 분신으로 블링크를 유도해서 빈틈을 만들어 찌른 것이지만 서진은 설명해줄 생각은 없었다.
그저 검을 통해 강력한 전류를 흘려보낼 뿐.
파지지지직!!
“끄아아악!”
다른 마법을 사용할 찰나의 여유조차 주지 않기 위한 전격은 안드레이의 정신까지 앗아갔다.
촤악!
그리고 심장을 도려내고 목을 벰으로써 완벽하게 생명 반응을 정지시켰다.
새카맣게 타버린 목 없는 시체가 바닥에 쓰러지고 지면을 타고 흐르는 피가 서진의 신발에 닿았다.
서진은 검을 늘어트린 채 잠시 광경을 눈에 담았다.
마지막에 흑뢰를 각성하지 않았다면 시체가 된 건 자신이었을 테니.
10레벨 흑마법사를 죽였지만 서진은 그리 큰 감흥이 없었다.
완전한 10레벨도 아니었을뿐더러 상태도 좋지 않았으니까.
복합적인 상황이 겹쳐 나타난 결과일 뿐.
그림자가 걷히며 숲이 다시 본래의 색을 되찾으니 땅에 떨어진 작은 주머니가 눈에 띄었다.
안드레이의 옷 안쪽에서 떨어진 듯했다.
“이건.”
손바닥보다 조금 큰 천 주머니를 열어보니 공간확장 마법이 걸려있는 아이템이었다.
안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서진의 눈에는 하나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동안 숱하게 들었던 마나를 모으는 구슬.
“리치의 라이프 베슬이었군.”
다만 살펴보니 아직 리치와 연결되지 않은 상태이기에 깨트려 봤자 타격은 없을 터.
그리고 이걸로 해야 할 일이 남아있기 때문에 서진은 주머니를 챙겼다.
그때 멀리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아아!
“서쪽이면.”
서진과 흑룡가주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돌입했으니 저 소리가 나는 곳에는 아마 흑룡가주가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러고 보니 10레벨 헌터를 지금 막고 있다는 건데, 도대체 무슨 수로?’
서진은 궁금증을 풀기 위해 안드레이의 시체를 챙기고 서쪽으로 향했다.
**
“왔느냐.”
서진이 도착하니 땅바닥에 허여멀건 인형이 넝마가 된 채로 누워있었다.
‘도플갱어였군.’
인형을 보자마자 서진은 안드레이가 어떤 흑마법을 썼는지 알아챘다.
그리고 안드레이가 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건지도 알 수 있었다.
자기보다 강한 존재를 흑마법으로 복제해냈으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겠지.
하지만 그만큼 도플갱어의 효용성은 대단했다.
서진과 안드레이가 결판을 낼 때까지 10레벨 헌터의 발을 묶었으니 제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흑룡가주가 이마에 흘리고 있는 땀과 팔다리에 있는 자상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확실하게 죽였느냐.”
“예.”
6레벨 흑마법사도 붙잡아두기 힘든데 10레벨은 무조건 죽이는 게 답이었으니.
“빨리도 오는구나.”
그 말에 서진도 땅이 울리는 미세한 진동을 감지했다.
아마 러시아의 헌터들이겠지.
여기가 시베리아의 외진 지역인걸 감안하면 대응이 신속한 편이었다.
물론 서진과 흑룡가주에겐 애매한 타이밍이었지만.
잠시 후에 도착한 러시아의 특수 헌터부대 대장은 굵은 목을 돌리며 현장을 둘러보다 흑룡가주에게 다가갔다.
“흑룡가주, 이게 무슨 일입니까.”
각국 10레벨 헌터의 인적 사항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대장인 드미트리는 한 번에 그를 알아보고 난감해했다.
타국에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을 확인한 순간, 당장 결박해서 끌고 가야 하는데 상대는 10레벨.
도저히 손을 쓸 수 있는 헌터가 아니었다.
최대한 말로 푸는 수밖에.
“저 흑마법사가 흑룡가를 건드렸고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해줬을 뿐이네.”
“그렇다 해도 타국 땅에서 무력을 행사하고 인명을 해치는 것은 국제헌터연합의 협정을 위반하는 일입니다.”
힘의 논리에 따라 유명무실해지는 협정이긴 하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입씨름을 싫어하는 흑룡가주의 심기가 틀어지려는 찰나, 서진이 나서며 입을 열었다.
“선후 관계를 짚자면 러시아의 흑마법사가 먼저 선을 넘었습니다. 관련 증거는 마력관리청을 통해 보내드리도록 하죠.”
드미트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확인하진 못해도 그렇게 주장하는 이상, 더 추궁하긴 힘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시체는 놓고 가시죠.”
“그럴 순 없겠군요. 10레벨 흑마법사의 시체라서.”
“예?”
“구체적인 얘기는 마관청하고 나누시면 됩니다.”
“잠시만...!”
서진도 상당히 피곤했기에 말리는 드미트리를 뿌리치고 한국으로 향했다.
**
가문으로 돌아온 서진을 제일 먼저 맞이한 사람은 의외로 성주원이었다.
“아직 기갑성가로 안 돌아갔어?”
“지금까지 정보 뽑아내느라. 게다가 네가 갔다 온 지 고작 사흘도 안 지났어. 물론 이제 가야지.”
“원하는 얘긴 다 들었나 보네.”
“어, 그리 놀랍지도 않더라. 정인호에게 뱀파이어가 먼저 접근했고, 목적은 우리가 가진 그 던전. 소유권을 가져올 생각이었나 봐.”
로열 이프리언이 영역으로 삼은 분화구에서 나오는 용암은 이계에서도 여러 종족이 탐내던 마나의 보고였다.
지성이 있으며 이용할 능력만 있다면 누구든 눈독을 들였으니까.
서진은 성주원에게 미리 경고했다.
“앞으로 그런 일이 더 많아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지. 어쨌거나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멀쩡히 살아 돌아온 거 보면 잘 해결된 거냐?”
“어. 시체 가져왔다.”
“흑룡가주께서 죽인 거야? 10레벨 흑마법사는 어땠냐?”
궁금한 게 많은지 두서없이 질문을 던지는 성주원.
“일단 내가 죽이긴 했다.”
“뭐? 미친, 정말이냐?”
“일단 나중에 얘기하자. 해야 할 일이 남아있어서.”
라이프 베슬이 들어 있는 주머니가 무겁게 느껴지고 있었기에.
“그래. 나도 돌아가야겠다. 나중에 정리되면 연락해.”
성주원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던전 사냥을 마친 설하윤이 날 듯이 달려왔다.
가주의 명으로 인해 따라가지 못했기에 걱정을 쌓아왔던 그녀였다.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예, 덕분에요.”
“그러면...”
“구슬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가보려 합니다.”
**
생명유지 장치를 달고 있는 협회장의 육신이 있는 저택의 안방.
서진은 마나가 가득 찬 라이프 베슬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이 넓은 방에 있는 사람은 서진과 협회장 단둘뿐.
다른 이들은 전부 문밖의 복도에서 대기 중이었다.
서진도 처음 시도하는 일인 만큼 마나가 어떻게 폭주할지 가늠하기 힘들었기에.
과연 빼앗겼던 마나를 다시 주입한다면 의식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서진은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마나 운용력이 이전보다 월등하게 올라갔다고 해도 한 번도 겪지 못한 현상에 대한 결말은 장담하지 못하니까.
서진은 라이프 베슬 속의 협회장의 마나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체내에 미약하게 잔존하는 마나를 분석하고 그와 일치하는 성질을 찾아 천천히 추출한다.
일반 마법사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일을 용체화 상태로 해내고 있는 것.
마나의 종족이라 불리는 드래곤에 갈수록 근접해지는 서진이기에 가능한 이적이었다.
그럼에도 긴장감을 떨칠 순 없었다.
일반적으로 마나 드레인에 당하면 죽기 마련이라 살아있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
아마 안드레이가 생명은 유지되게끔 조절한 것이겠지만.
어쩌면 그 흑마법사는 전투보다 이런 방면에 더 재능이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리치가 알아보고 선택했을 테고.
결과적으로 비교적 빠르게 마나를 다 모았으니.
서진은 떠오르는 상념을 접고 다시 라이프 베슬에 집중했다.
그리고 추출된 마나가 서서히 협회장의 육체에 깃들려는 순간, 서진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