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서진은 결국 미국행을 선택했다.
클리어 길드는 애리조나 주의 피닉스 시에 위치해 있었다.
“와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서진과 설하윤을 태우고 있는 차가 길드 건물에 가까워지자 브랜던은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그만하면 됐습니다. 그보다 동생을 노린다는 유니온 소속 헌터의 레벨은 모르는데 플래티넘 멤버라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묻지 않아도 그냥 본인 입으로 말하더군요.”
“그리고 찾아오는 시간과 날짜도 일정하고 하셨죠.”
“예, 보름 간격으로 저녁 6시가 되면 나타납니다.”
스스로가 옳다는 신념으로 가득 차 있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행동.
아직 이름은 모르지만 마광병 환자를 척살하는 것에 깊이 심취한 녀석이지 않을까 싶다.
하기야 서진이 이전에 만났던 유니온의 헌터들도 그러지 않았던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 길드 상태는 어떻습니까?”
“남아있는 헌터는 거의 대부분 중상이라 병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전부 떠나버려서...최소한의 경비만 세워두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윽고 차는 길드 정문에 정차하고 서진과 설하윤은 뒷좌석에서 하차했다.
브랜던은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며 서진을 향해 말했다.
“우선 케일러스의 열매부터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서진이 내걸었던 조건.
포션 조제 기술의 전수는 유니온을 막고 나서 받되 아티팩트는 계약 이행에 상관없이 먼저 받기로 했다.
일종의 선수금인 셈.
지하창고에 내려간 브랜던은 안쪽에 있는 금고를 열고 열매를 꺼내왔다.
“이겁니다.”
[케일러스의 열매]
굳이 시스템 창이 아니더라도 이계에서 봤던 생김새와 특징이 일치했기에 진물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서진은 작은 가방에 넣고 나서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애초에 케일러스의 열매는 부차적인 목적에 불과했으니.
서진이 태평양을 건너 이곳까지 온 이유는 늑대가 연상된다는 헌터 때문이었다.
“털빛이 회색이라고 했었죠?”
“예, 은색의 웨어울프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래도 던전에서 나오는 웨어울프보단 훨씬 인간 같았습니다. 물론 사람이 스킬을 썼으니 당연한 말이지만요.”
브랜던이 말해준 얘기를 곱씹을수록 서진이 알고 있는 7성주 중의 한 놈이 떠오른다.
셀 수 없이 많은 웨어울프 위에 군림하는 단 하나의 개체, 실버 울프.
전신을 뒤덮은 털이 은빛으로 반짝여서 붙여진 칭호.
무력은 순수 육체적인 면만 놓고 본다면 투신 시절의 서진과 맞먹을 정도.
다만 지능이 높지 않아 전투가 수싸움으로 전개되면 항상 패퇴하곤 했다.
그래도 원초적인 힘이 제일 위협적이란 말이 있는 만큼 방심해선 안 되는 존재임은 분명했다.
물론 이 길드에 찾아오는 플래티넘급 헌터가 성주는 아닐 테고 관련이 있는 녀석이겠지.
“보름 주기라 했으니 내일 오겠군요.”
“예, 일단 해가 저물고 있으니 지내실 곳을...”
브랜던이 말을 이으려던 찰나,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누군가 내려왔다.
“형.”
브랜던과 같은 갈색의 머리칼에 비슷하면서도 비교적 앳된 얼굴.
유니온이 데려가려 한다는 길드장의 동생일 테지.
브랜던은 살짝 웃으며 서진에게 소개했다.
“저 녀석이 제 동생, 제프리 미첼입니다.”
“형. 저 사람은.”
“그래, 며칠 전에 한 번 말했었지? 직접 모셔왔다.”
제프리는 별다른 대꾸 없이 무언가 탐탁지 않은 듯이 서진을 바라봤다.
믿음직스럽지 못한 건지, 아니면 자신 때문에 외부의 힘을 빌려야 하는 현실이 불만인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서진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계약에 명시된 조건을 이행하고 보상만 받아 가면 될 뿐.
어색한 기류 속에서 제프리는 몸을 홱 돌려서 다시 올라갔다.
브랜던은 민망한 웃음을 보이며 뒷머리를 긁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그 일 때문에 최근에 예민해졌나 봅니다.”
“신경 쓰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마나를 생각보다 많이 품고 있군요.”
어디까지나 거의 없을 줄 알았던 서진의 예상을 기준으로 한 말이었다.
“하핫, 알아보셨습니까. 저래 봬도 벌써 4레벨입니다. 동생이 희귀한 특성을 갖고 있어서 마나를 그렇게 자주 움직이지 않아도 연구 성과에 따라 레벨이 오르곤 합니다. 이제는 이 길드의 핵심 연구원 중 한 명입니다.”
동생에 대해선 말이 많아지는 브랜던.
서진은 적당히 끊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세상에 독특한 스킬과 특성을 가진 헌터는 생각보다 많다.
레벨을 올리는 방식이 저마다 달라도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흔한 케이스는 아닌 만큼 유니온에서 데려가려 하는 걸까.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는데.”
브랜던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서진 님은 이제 괜찮으십니까? 전에 한국 땅에서 유니온과 크게 마찰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지부를 정리해서 문제없습니다.”
발본색원했기에 그 후로 유니온은 그림자조차 내비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다 서진의 레벨이 올라가도 마광병에 대한 부작용을 보이지 않으니 언론도 비교적 조용한 편이었다.
물론 우려가 섞인 글들을 쏟아내곤 있지만 신경 쓸 서진이 아니었으니.
어차피 이젠 상관없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마광병은 완치가 된다 한들 타인에게 인지시켜줄 수 있는 증거나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부작용 안 나타나는 정도.
그러니 말해도 믿을 리가 없으니 서진이 가만히 놔두고 있는 이유였다.
“그러고 보니 미국에선 최근 마인 사건이 많아졌다고 했었죠.”
“예. 그 때문에 유니온이 극성입니다. 실제로 피해가 많이 발생해서 뭐라 말하기도 힘든 분위기구요.”
듣기론 유니온의 마스터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꽤 됐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지금의 활동은 누가 지시를 내리고 있는 걸까.
개별행동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서진은 그들이 조직이란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전체적인 방향성이 일치할 땐 뒤에서 명령을 내리는 놈이 있기 마련이니.
한국에서 치워버린 이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았는데 만약 서진이 목표로 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다시 맞붙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 오늘 묵으실 곳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제가 너무 세운 채로 붙잡고 있었군요.”
서진과 브랜던이 길드장실에서 나가려는 찰나, 거칠게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화려한 적발에 메마르고 꺼칠한 얼굴의 여성은 눈을 부릅뜨고 서진과 설하윤을 쳐다봤다.
“길드장. 이 사람들 누구야.”
“제가 초빙한 흑룡검가의 후계자, 한서진 님과 호위인 설하윤 헌터님입니다. 그리고 스칼렛, 부길드장이면 호칭 좀 조심해주세요. 손님 앞에서 이 사람이라니요.”
하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감정을 표출했다.
“뭐? 초빙? 나랑 잠깐 얘기 좀 해.”
“안됩니다. 지금 막 안내를 하려고 일어섰는데.”
“전 괜찮으니 대화 나누세요. 하윤 씨, 나가죠.”
“예.”
서진은 짐짓 사람 좋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
브랜던은 곤란한 듯 둘은 번갈아 보다가 결국 짧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서진 님. 그럼 최대한 빨리 얘기를 끝내겠습니다.”
당연하지만 서진이 양보한 건 성격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저 여자가 꺼내고 싶은 말에 자신이 연관되어있음을 직감했기에.
서진이 밖으로 나오고 길드장실의 문이 닫히자 안에서 흘러나오던 작은 소음마저 완벽히 차단되었다.
‘사일런스 마법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듣지 못할 서진이 아니었다.
이미 수위에 오른 서진의 마나 운영력은 흔한 마법사의 사일런스 정도는 순식간에 분석해서 간섭할 수 있었다.
완전히 깨버리면 눈치챌 테니 엿들을 정도로만 마법의 장막을 열었다.
그러자 곧바로 적발의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길드장, 설마 저런 인간 데려온다고 무리하게 보상 쥐여준 건 아니겠지? 정확히 어떤 조건인지 말해봐.
-일부 포션에 대한 제조 기술과 케일러스의 열매를 주기로 했습니다.
-뭐? 미쳤어? 내가 열매만큼은 절대 안 된다고 했을 텐데? 당장 돌려보내!
신경질적인 그녀의 목소리는 서진의 귀를 살짝 괴롭게 만들었다.
-그걸 왜 스칼렛이 정합니까.
-길드의 재산을 상의도 없이 함부로 빼돌렸으니 이건 무효야. 당장 취소해.
-길드장의 권한으로 행한 계약이니 문제 될 건 없습니다. 스칼렛이야말로 개인적인 욕망으로 케일러스의 열매를 탐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나에게 모함을 씌우는 거야? 어쨌든 내가 쓸만한 헌터 데려올 테니까 당장 쟤는 쫓아내. 6레벨이라서 저런 놈보단 훨씬 강할 거야. 열매도 제조 기술도 넘길 필요 없이 돈만 주면 돼.
-6레벨이면 한서진 님보다 낮군요.
-뭐? 저놈이 그렇게 높아?
상당히 놀란 듯한 스칼렛의 하이톤.
-그래 봤자 가문에서 지원받고 자란 허울만 좋은 샌님일 테지. 내가 데려올 헌터는 음지에서 활동하는 검사야. 실전에선 이쪽이 훨씬 나을 게 뻔해.
-그렇군요. 하지만 열매는 포기하시는 게 좋습니다.
-뭐? 왜!
-그건 계약 시에 이미 드렸으니까요. 저도 염치가 있는데 이미 드린 건 어떻게 다시 받습니까. 조제 기술 전수는 취소할 수 있습니다.
-그딴 건 필요 없어! 열매를 가져와야 한다고!
-말했잖습니까. 그건 안 됩니다.
-제길!!
콰앙.
길드장실을 나와 1층 로비로 나온 스칼렛은 서진과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강렬한 눈빛만을 보낼 뿐 말을 거는 일 없이 고개를 돌려 서진을 지나치며 걸어 나갔다.
방금 대화를 통해 케일러스의 열매를 포기했거나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어 지금은 건들지 않는 것일지도.
[지력이 28 상승합니다]
아무대로 후자인 것 같지만.
**
하루가 지나고, 해가 지며 노을이 생기는 오후 6시가 가까이 오고 있었다.
서진은 검 손잡이를 매만지며 정문 앞에서 설하윤과 함께 서 있었다.
쳐들어오는 날짜, 시간, 장소까지 철저하게 지킨다고 하니 서진으로선 귀찮음을 덜었다.
잠시 후 시침이 정확히 6을 가리키자 누군가 멀리서 맹렬하게 이곳을 향해 돌진해온다.
콰앙!
이윽고 땅을 강하게 찍으며 멈춰 선 한 사내.
어깨를 뒤덮은 더벅머리에 살기 가득한 형형한 눈빛, 거뭇하게 탄 피부까지.
한 마리의 야수 같은 존재감을 보이고 있었다.
“브랜던! 이번에야말로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대뜸 소리를 지른 그는 눈앞에 있는 서진을 보며 목을 앞으로 내밀며 눈을 찌푸렸다.
“엉? 넌 뭐냐. 보아하니 만만한 놈은 아니군. 옆에 마스크 쓴 여자도 그렇고.”
동물적인 직감일까.
서진이 기세를 갈무리하고 숨기고 있음에도 한눈에 무력을 짐작하고 경계하기 시작한다.
‘대단하네.’
서진은 오히려 브랜던에게 감탄했다.
제약 길드가 이런 놈을 두 번이나 막아냈다니.
생각보다 저력이 있는 길드라는 의미.
그사이 야수남은 다시 한번 크게 소리쳤다.
“그런가! 너도 브랜던이 고용한 헌터인 거구만!”
“생각보다 머리가 돌아가나 보군.”
생김새처럼 머리도 아예 굳은 줄 알았는데 그 정돈 아니었나.
“이거 완전 나를 짐승 취급하다니!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말이야. 두 번째 왔을 때도 너 같은 용병이 있었거든! 물론 10분 정도밖에 못 버티고 나가떨어졌지.”
“그러면 왜 그때 마무리 짓지 않은 거지?”
“그야 비슷한 놈들이 여럿 있었으니까! 내가 많이 강하긴 하지만 역시나 체력적으로 힘들더라고.”
너무나 선선하게 뱉어내는 대답에 서진은 색다른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는 돈이 떨어졌는지 오늘은 두 명밖에 안 보이는군. 귀찮으니까 둘이 동시에 덤벼라!”
“아니, 나 혼자로도 충분해.”
일대일로 상대해야 투기 손실이 덜하니까.
서진의 칠흑 같은 검신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실버 울프와 어떤 연관점이 있는지 확인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