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나를 혼자서 상대한다고? 호오, 과연 네가 이 휴고의 적수가 될만한 놈인지 기대되는군!”
서진이 발검하며 앞으로 나오자 야수 같은 사내, 휴고의 기세가 일변했다.
폭발적으로 발산되는 마나와 함께 구릿빛의 피부가 두꺼운 털로 덮이기 시작한다.
골격 자체가 변하는 건지 덩치가 커지며 입고 있던 옷들이 찢겨나갔다.
얼굴이 늑대처럼 변하진 않았지만 그 외의 외형은 확실히 웨어울프를 연상케 했다.
그리고 브랜던의 말처럼 어두운 회색빛을 띠는 털이 일반 웨어울프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탈태를 마친 휴고는 땅을 짓누르며 서진을 향해 포탄처럼 튀어 나갔다.
날카롭게 벼려진 늑대의 발톱이 서진의 머리를 내려찍는다.
카앙.
발톱을 얕은 마나가 감싸고 있을 뿐인데도 서진의 뇌검과 비등하게 힘겨루기 할 정도의 단단함.
의외라고 느낀 건 상대도 마찬가지인지 크게 웃었다.
“크하하! 싸울 맛이 나는군!”
말을 뱉은 직후, 순간 이동한 듯이 모습을 감춘 휴고.
기척을 감지할 틈도 없이 우측에서 발차기가 날아온다.
확실히 공속은 현재의 서진을 웃도는 수준.
하지만 이런 류의 기습에 익숙한 서진은 몸을 트는 것만으로 피해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스피드와 강건한 육체를 기반으로 하는 파워풀한 육탄 공격.
웨어울프를 아득히 뛰어넘는 힘은 서진에게 실버 울프를 연상케 했다.
‘물론 기억 속의 녀석보다는 한참 부족하긴 하지만.’
잠시 거리를 둔 서진의 발밑에서 한줄기 전류가 피어올랐다.
흑룡검술 제7식 여뢰.
그럼에도 뇌기로 몸을 각성시키지 않으면 반응을 따라가기 힘들 정도니 순수 육체 능력은 누구보다 압도적이라 할 수 있겠지.
전류를 흘리던 서진은 정면에서 다가오는 휴고와 맞부딪혔다.
근력에선 밀려도 서진의 경험과 검술은 스텟의 차이를 극복하여 대등한 공방을 이어간다.
휴고는 희열에 찬 듯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브랜던이 대단한 용병을 고용했군! 동생 놈을 데려갈 보람이 있겠어!”
서진은 중간에 연폭뢰를 섞어서 내리쳤지만 역시나 가볍게 피해버린다.
이런 상대에겐 전광검을 펼쳐도 괴물 같은 반사신경으로 회피하고, 도리어 카운터를 맞을 위험이 크다.
어차피 뇌까지 근육으로 차 있는 적은 그에 맞는 상대법이 있으니.
파지지직!
전류를 강하게 방출하며 휴고의 시선을 흩트리며 마나를 은밀하게 움직인다.
[사일런스]
주변에 소음 차단의 장막을 두른 상태에서,
[일루전]
환영을 일으켜 짧게나마 녀석의 시야를 한정시킨다.
휴고의 육체 능력 이상으로 서진의 마나 조작력은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
콰앙!
강렬하게 불꽃을 튀기며 검과 발톱이 정면 승부를 벌이는 동안, 주변에 있는 물탱크에서 굵은 물줄기가 치솟는다.
서진이 전투를 대비해 브랜던에게 부탁해서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본래 관련 속성이 없는 환경에서 창조하는 일보다, 존재하는 걸 활용하는 편이 훨씬 쉽고 빠르다.
특히나 찰나에 반응할 수 있는 휴고 같은 헌터에겐 조금이라도 마법 시전 간격을 좁히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촤아악!
뇌영환보.
분신을 만들어내 휴고의 발을 묶고 있는 상태에서, 하늘로 솟구친 격류가 아래로 내리꽂힌다.
휴고는 특출한 기감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신호를 느꼈지만 이미 늦었다.
늑대인간의 눈과 귀가 가려졌던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콰아아아!
빳빳하게 서 있던 무수한 털이 수분을 머금고 무겁게 가라앉는다.
동시에 휴고가 상대하고 있던 분신이 터지며 막대한 전격이 전신을 뒤덮으며 세포까지 파고들며 육신을 태운다.
“으아아아악!!”
아무리 육체가 튼튼하다고 해도 전도율이 올라간 상태에서 신경계까지 건드리는 뇌격을 버틸 순 없을 터.
이미 휴고의 사고는 일시적으로 정지되어 있었다.
흑룡검술 제5식 전광검.
서진과 휴고의 거리는 대략 열 걸음.
거리를 좁히는 사이에 생길 이변을 원천 차단하기 위한 기술.
흑색 뇌기로 물들어진 검이 휴고의 허벅지에 닿았다.
곧바로 전광검의 흐름이 사라졌지만 아직 뇌격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
서진의 검은 그대로 휴고의 다리 힘줄을 끊고 나서 명치에 검을 박아넣었다.
웨어울프 계열은 생명력이 질기기 때문에 이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서진은 휴고에게 묻고 싶은 게 있기에 입만 움직일 수준으로 제압해야 했다.
“크학! ...크르르!!”
몸이 꿰뚫린 순간, 휴고는 잔여 마나를 개방해서 폭주 상태로 전환하려 했지만 시도는 불발되었다.
서진이 검을 통해 마나 간섭을 이루어냈기 때문에.
이어서 강제로 마나를 억누르자 휴고의 몸이 작아지기 시작했다.
시이익.
그는 몸에서 증기를 내뿜으며 다시 인간의 육체로 돌아왔다.
서진은 박혀있던 검을 빼내며 건조하게 그를 내려다봤다.
“이제 좀 건설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겠군.”
**
웨어울프의 또 다른 특징은 자신을 패배시킨 상대에게 복종한다는 것.
덕분에 서진은 귀찮은 일 없이 바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물어본 것은 그 힘을 얻게 된 경위.
휴고는 깊은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일 년 전, 나는 마인에게 아내를 잃고 나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텐션이 높았던 과한 어투도 서진에게 두들겨 맞은 이후로 비교적 차분하게 바뀌었다.
서진은 한결 듣기가 편해 가만히 귀를 열었다.
“그땐 죽지 못해서 살았다. 아니 죽을 장소를 찾아다녔다고 해야겠지.”
“그러다 집에 있는 책에서 우연히 아틀라스산맥의 풍경을 보게 됐다. 그걸 보고 결정했지. 그곳에서 죽기로. 그리고선 최소한의 물품만 챙긴 채 모로코에 있는 투브칼산으로 향했다.”
아틀라스산맥에서 투브칼산이 제일 높았으니까.
휴고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산길도 아닌 곳으로 등산을 시작해서 한참을 올라가던 중에 우연히 그를 만났다. 웨어울프들의 군주를. 내 모습은 그와 비교하면 열화판에 불과해. 찬란한 은빛 털과 황금빛 눈동자는 절대 잊을 수가 없었지.”
실버 울프.
혹시나 했던 서진의 예상이 들어맞았다.
신기하게도 7성주 중에서 가장 먼저 지구로 건너온 놈이 실버 울프라니.
‘아니 어쩌면.’
아직 알지 못할 뿐 다른 성주도 이미 와있을지도 모르는 일.
일단 서진은 잡념을 밀어두고 휴고의 얘기에 집중했다.
“그땐 내가 제정신이 아니어서 죽고 싶으니까 얼른 꺼지라고 했다.”
다시 생각해도 스스로가 어이없는지 휴고는 옅게 실소하며 말했다.
“그런데 그가 묻더군, 이유가 뭐냐고. 난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기에 한탄하듯이 쏟아냈지. 그리고 사정을 들은 그는 내게 힘을 전수해주었다. 지금도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해. 그저 변덕이라고만 했을 뿐.”
역시 실버 울프에게 직접 힘을 받았으니 그만큼 강했던 거겠지.
“그 뒤에 나는 자살할 마음을 버리고 유니온에 들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복수라는 핑계로 힘을 발산하고 싶었을 뿐. 다 의미가 없는 짓이었지.”
자조하는 휴고에게 서진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유니온의 마스터는 만난 적 있나?”
“멤버가 되려 할 때, 딱 한 번. 그마저도 실루엣만 접했다.”
“어땠지?”
“당시 두려움이 머릿속을 지배해서 잘 생각나지도 않아. 의지만으로 나를 죽일 수 있겠구나 싶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나름 힘을 얻은 후였는데도 말이야.”
휴고는 그때가 다시 떠오른 듯 몸을 살짝 떨었다.
“목소리도 듣지 못했어. 마스터는 내 모습을 확인하고 금세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느낌상 외형은 젊은 남자 같았다. 실제 나이는 모르겠지만.”
휴고의 육감 자체는 뛰어난 편이니 맞는 말일 터.
서진은 마스터 외에 유니온에 대한 것들을 캐물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사실상 점조직에 가깝고 협력하는 일이 희박한 조직의 성격 탓에 다른 멤버와 연관될 일 자체가 적은 모양.
“그렇다면 최근 미국에서 벌어지는 유니온의 행동도 전부 개별행동이란 뜻인가?”
“아. 그건. 의지가 내려왔어. 마광병을 찾아서 처단하라고 말이지.”
“의지?”
“나도 정확히는 몰라. 머릿속에 명령이 내다 꽂히는 느낌이었으니까. 마스터만의 하달 방식이겠지.”
“그러면 너는 유니온에 들어간 이후로 지금까지 몇 명을 죽여왔지?”
“글쎄, 한 서른 명 정도 될 것 같은데.”
“그렇군.”
당초에 원했던 정보는 이미 얻었기에 서진은 몸을 돌렸다.
잠시 후, 클리어 길드의 지하실에는 휴고의 시체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
유니온의 헌터를 막아낸 것을 기념하며 열린 클리어 길드의 저녁 자리.
브랜던은 서진의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서진 님 아니었으면 분명 제 동생은 끔찍한 일을 당했겠죠. 제프리 너도 어서 감사 인사를 드려라.”
“저, 정말 감사합니다.”
서진의 전투를 멀리서나마 지켜본 제프리의 눈빛은 이전과 많이 달라진 상태였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강해질 수 있는 건가요?”
연구실에 틀어박혀 지냈던 그에게 서진의 모습이 상당히 인상 깊었던 걸까.
“나에게 묻는 건 의미가 없어. 너는 내가 될 수는 없으니까. 반대도 마찬가지고.”
서로가 지닌 스킬과 재능이 명확하게 다르다.
하물며 마광병이라는 족쇄를 차고 있다면 몸을 움직이며 마나를 쓰는 일은 더욱더 위험하다.
서진의 무심한 팩트에 시무룩해진 제프리.
“하지만 네 고유 스킬로 고레벨에 올라선다면 다른 길이 열릴지도 모르지. 다른 헌터들이 이룩한 경지에 눈을 돌리지 않고 네 갈 길을 가는 게 제일 가능성이 클 거다.”
일단 마광병에 얽매이지 않고 레벨을 올릴 수 있는 스킬에 집중하는 게 최선.
그러다 중간에 치료제가 나온다면 더 좋을 테고.
‘그러고 보니 잘 되고 있을지 모르겠군.’
예전에 서진이 리펠 길드에서 연구 결과를 얻고 나서 현재는 그걸 기반으로 치료제 개발에 착수한 상황.
가문의 약제원만으론 신약개발 인력과 기술이 부족하기에 약화련과 합작하여 이어가고 있었다.
리펠 길드의 치료약이 비록 부작용이 있었지만 원래 목적인 마광병 호전에는 분명한 차도를 보였던 것도 사실.
충분히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만약 예전보다 리스크를 줄이고 효과를 유지하는 약을 만들어낸다면 천문학적인 수익을 벌어들일 수 있을 터.
서진은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끊어냈다.
그 이상은 연구가 좀 더 진척되고 나서 고려할 문제니까.
오래간만에 술을 들이켠 서진은 휴고에게 들었던 얘기를 반추했다.
‘아틀라스산맥.’
심야에 그냥 죽기 위해 올라간 탓에 어디서 실버 울프를 만났는지는 모른다고 했으니.
직접 투브칼산으로 올라가는 수밖에.
아니면 그 지역의 길드와 연계해서 수색을 펼치는 방법도 고려해 봐야겠지.
그때, 클리어 길드원 중 한 명이 서진의 옆자리에 앉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마케팅 팀장인 마야라고 해요.”
흑룡검가의 외무각 같은 조직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제약 길드인 만큼 성격은 조금 다르겠지만.
“예, 반갑습니다.”
서진은 그녀의 눈빛에서 익숙한 기운을 읽어냈다.